배려의 말들 - 마음을 꼭 알맞게 쓰는 법 문장 시리즈
류승연 지음 / 유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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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배려의 말들뿐만 아니라 부제처럼 내 마음을 꼭 알맞게 쓰는 법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자신의 삶으로인생의 옳은 방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식은 잔소리를 통해서는 좀처럼 배우지 않지만 부모 모습을 보면서는 좋은 점도 나쁜점도 무섭도록 배운다. 부모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이 배우고 싶은 점을 무의식중에 선택해 스스로 습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인 나는 내 인생을 잘 살면 된다. 내 그네만 잘 타면 된다. - P-1

어느 날 그가 "스펙은 허상입니다. 중요한 건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이에요"라는 말을 했을 때 한편으론 부끄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론 배려를 받은 듯 마음의 안도감마저 느꼈다. 장애 아이 엄마여도 괜찮아. 가난해도 괜찮아. 내가 그 무엇이든 괜찮아. 이 말이 그토록 듣고 싶었다.
스펙이 허상이고 존재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스펙을 사람 자체로 인식했던 건 그다음 단계를 몰라서였다. 스펙이 껍데기면 무엇이 알멩이인데? 그의 말에 답이있었다.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 중요한 건 우리 각자의 고유성이다. 어떤 껍데기(스펙)를 두르고 있든 변하지 않는 것. 존재의본질(고유성).
나는 어떤 인간이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떠한 태도로 삶을살아가고 있는가? 스펙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온전한 알맹이로마주했을 때 나는 어떤 개인일 수 있는가?
된다지금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스펙이라는 계급장을 뗀 알맹이로서의 개인, 그 고유성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그러고 나자 삶이 훨씬 편해졌다. ‘스펙 대 스펙‘의 만남이 아닌 ‘알멩이 대 알멩이‘의 만남으로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덕이다. 나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배려하기 시작한 덕이다. - P-1

잔소리가 소용없는 게 자식이다. 자식은 비만 오면 울어 대는 청개구리다. 자식 된 자의 본성이 그렇다. 그렇다면 부모가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그저 믿고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뿐이다. 삶은 자신의 선택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고 후회가 있더라도 스스로 한 선택이기에 기꺼이 책임질수 있다.
이젠 나와 내 자식들의 차례다. 딸이 내 뒤를 이어 기자가되길 바라는 마음이 슬며시 올라오려 할 때마다 "자식은 청개구리다. 개굴개굴"이라며 주문이라도 외워야 할 판이다. 자식들은알아서 각자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나는 그저 믿고 이해하고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임을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내 인생이나 잘 사는 것. 멋진 할머니로 늙을 수 있게 나나 잘 살아야한다. 그래야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자식들이 찰떡같이 배울 테니까. - P-1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는 너처럼 할 줄 아는 게 없어."
이 말에 진지하게 반대한다. 누구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경험을통해 배운 것들이 보이고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것들을 통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기운 없이 침울해 있는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배려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역사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특별한 누군가만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그 역사를통해 우리는 각자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 P-1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이다.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더숲, 2019) - P-1

긴 인생을 잘 살아 내려면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젊은 나이에 반짝 타오르고 화려하게 산화되겠노라 바라는 게아니라면 긴 인생 쉬어도 가고 주저앉기도 하고 멍도 때려야 한다. 그런 시간 속에 있는 자신을 다독일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필요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고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어나 달릴 때 더 큰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다. 날 위한 배려의 시간을갖는 중이다. - P-1

옳은 말과 정당한 말이 옳지 않은 말, 정당하지 않은 말보다힘이 세야 하는 건 당연하다. 옳은 말이 가리키는 대로, 정당한말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방식이다. 말하는 태도와 배려의 마음이다.
때로 사람들은 옳은 말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말을 하며 타인에게 정서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왔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파악하는 데 각각 다른 시간이 걸린다. 옳은 말이 옳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설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즉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옳은 방향을 깨우치는 데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한데,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때로 그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말에만 집중하다 보면 사람을 놓치기 쉽다. 옳은 말을 하는이유도 결국 사람을 위해서다. 사람 사이의 옳은 관계를 위해 옳은 말이 필요한데 말을 관철시키려고 사람을 묵살해 버리면 옳은 말이 가진 명분은 사라진다.
예쁘고 듣기 좋은 말만 하자는 게 아니다. 상대가 옳은 말을받아들일 수 있게 그의 시간을 존중하고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옳은 말을 하는 자의 옳음도 왜곡 없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진다. 중요한 건 진심보다 태도라는 말에 갈수록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 P-1

우리는 몇 가지 단서를 설렁설렁훑어보고는 다른 사람의 심중을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여긴다.
낯선 이를 판단하는 기회를덥석 잡아 버린다. 물론 우리자신한테는 절대 그렇게 하지않는다. 우리 자신은 미묘하고복잡하고 불가해하니까. 하지만낯선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있다고 생각한다.
말콤 글래드웰, 「타인의 해석」(유강은 옮김, 김영사, 2020)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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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핸슨, 나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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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악에는 리듬, 멜로디, 하모니가 있다. 이것이 음악의 3요소다. 강약과 높낮이, 반복의 조화가 결국 음악을만든다. 삶 역시 그렇다. 모든 반복되는 것 속에 삶의 가장반짝이는 것들이 숨어 있다. 그러니 반복되는 일상을 권태로움이라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된다. - P-1

옛날에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얘기가 있다. "어른 별거아니다. 애들 큰 게 어른이지." 그러니 다 안다고 착각하지말자. 힘주는 법도, 힘 빼는 법도 더 배우고 익혀서 행복해지자. - P-1

삶이란 스스로의 속도로 나만의 풍경을 얻는 과정이다.
풍경의 각별함은 많은 부분 속도가 좌우한다.
- P-1

한 연구에 의하면 50대에 최저점을 찍는 행복 곡선은 U자형‘을 그리며 70대에 절정에 이른다. 인간은 70대가 되면 스트레스에 초연해지면서 비로소 과거나 미래가 아닌현재를 살 수 있는 능력이 최대치가 된다. 시간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르면 우리는 손녀의 웃음소리나 손자의 발걸음에 집중할 뿐, 아이의 학원 숙제나 대학입시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더 이상 시간을 과정으로이해해 도구화하거나 투자 개념으로 보는 관점에서 자유로워진다. 대단한 걸 경험하겠다는 욕심에서 벗어나 봄날의 꽃에, 가을의 단풍에, 겨울의 눈에 감탄하며 오롯이 현재와 마주한다. - P-1

이제 내가 던졌던 첫 번째 질문 "까치 어미는 어떻게 저많은 새끼에게 먹일 먹이의 순서를 정할까?"로 돌아올 차례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튼 까치 어미는 어떻게 배고파우는 수많은 새끼에게 공평하게 밥을 주었을까? 이 질문의 답을 푼 사람은 저명한 조류학자나 생물학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 매일 새들을 관찰한 평범한 건물 관리인이었다.
우연한 어느 날, 그는 배고픈 새끼가 가장 입을 크게 벌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턱이 무너질 듯 쩍 벌린 입을 보며 그는 생명의 신비를 느꼈다. 그는 어미 새가 허기의 순간을 수학자처럼 포착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사랑은 모든 순간의 기다림이라 정의할 수 있다. 오랜 인내야말로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 P-1

회피하거나 되돌릴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드디어 관점을 바꾸고지금 일어난 일에서 좋은 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한 차선만 있는 도로에서 차가 밀린다면 짜증이 나겠지만 후회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두 차선이 있는데 유독내 차선만 막힌다면? 자신의 선택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여러 줄로 나뉜 붐비는 공항 검색대에서도 우리는 수시로이런 경험을 한다.
선택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다는 게 꼭 좋을까.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내가 다른 걸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에 시달린다.  - P-1

나는 누군가에게 ‘나 아닌 것‘을 적어보라고 조언하기전 에린 핸슨 Erin Hanson의 시를 들려준다. 시 제목은 <아닌Not)이다. 이 아름다운 시는 ‘나이‘ ‘옷 사이즈‘ ‘머리색까지 그것이 나를 말해주는 건 아니라고 선포하듯 말하며시작된다.
만약 내가 나를 내 나이나 몸무게, 학력, 피부색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키운 식물이나 반려동물, 방에 걸린 그림이나 읽어온 책의 숫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른 노래,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남몰래 흘린 눈물로 재정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삶이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듯 우리의 역할과 정체성은고정돼 있지 않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들과 딸의 역할 - P-1

이 사라지고, 아이가 생기면 부모의 역할이 새로 부여되며, 그 아이가 자라 아기를 낳으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로서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조금씩 흔들리며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날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서늘한 막막함이 우리를 덮치지 않는다. - P-1

느긋한 호텔 조식을 먹으며 가을빛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 일곱 시, 버터를 발라 구운 따뜻한 식빵과 아메리카노 한 잔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의 ‘행‘은 한자로 ‘다행할 행‘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매울 신‘자와 많이 비슷하다. 매울 ‘신‘은 주로 고생이나 괴로움을 뜻할 때 많이 쓴다는 것 역시 흥미롭다. 행복과 불행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 아닐까.
기쁘고 좋은 일만 행복이라 부르는 데 멈추지 않고, 별일없는 일상에서도 행복을 찾아 다행으로 여기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도 습관이기 때문이다. - P-1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온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연설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다. 만약 젊은 시절의잡스가 스스로 얘기한 ‘열정을 좇으라!‘란 조언에 따라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일만 추구했다면 인도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센터에서 가장 유명한 강사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열정의 배신》에서 칼 뉴포트는 청년의
"64퍼센트가 ‘직업에 매우 불만족‘이라고 답했다는 점"10을 지적하며 세대를 넘어선 ‘열정 중심의 커리어 관리 전략‘의 문제를 말한다.11만약 일에 대한 열정이 우리를 배신했다면 직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다양한 직업군을 조사한 결과, 누가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지 예측하는 강력한 지표가 있었다.
그것은 ‘근무 연수‘였다.
더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더 많았다. 12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몰입이 일어나는 데가장 중요한 요소 역시 ‘능숙함‘이라는 것이다. 달리기든글쓰기든 춤이든 악기 연주든 능숙해질 만큼 반복하면 만족도가 상승한다.  - P-1

과거는 변해,
그러니까 미래를 기억해,
지금을 살아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더 있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는 다스베이더가 있었다. 해리 포터에게는 볼드모트가 있었고, 어벤저스에게는 지구 인구의 절반을 날려버리겠다고 장담한타노스가 있었다. 조커 없는 배트맨을 상상할 수 있을까.
성공한 영웅 뒤에는 반드시 성공한 악당이 존재한다. 우리삶도 그렇다. 과거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내 안의 포스가커질 가능성이 내 안의 영웅이 자라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조커 같은 악당은 나를 담금질하고, 다스 베이더 같은빌런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악당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과거 사건에 대한 내 해석‘이 사건 자체보다 훨씬더 중요하다. 동물의 더러운 배설물조차 쓰임에 따라 거름이나 연료가 될 수도 있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다시 쓰면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갈 수 있다. 현재를 제대로살 때, 과거는 틀림없이 바뀐다. - P-1

하지만 ‘내가 확실한 내 편‘이라는 감정을 가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내 삶을 이끌고 있다는 강력한 느낌역시 그렇다. 그러기 위해선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긍정과 희망을 상징하는 ‘흰 늑대‘와 부정과 실망을 상징하는 ‘검은 늑대‘를 기르는 한 남자의 오래된 우화가 있다. 우화는 질문한다. 검은 늑대와 흰 늑대 중어느 늑대가 더 빨리 자라게 될까.
내가 더 많이, 더 자주, 먹이를 준 쪽이다.
먹이를 주는 내 선택이 결국 결과를 만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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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은 무수히 많은 좋아하는 것들 중 영화를 가장 좋아해 감독이 되었다. 10여 년간 오직 영화를 생각하고 만드는 일에 전력 질주하다 두 번째 영화를 마친 뒤 번아웃이 왔다.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잘 회복되지 않는 마음이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영화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진짜 좋아했고 어떤 삶을 진심으로 원했는지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나서 윤가은 감독은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글 속 구석구석 온통 영화 이야기뿐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한 이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 나또한 내 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오다 지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설사 그 좋아하는 대상이 처음과 달라져 있을지라도 작가의 말처럼 어쨌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눈이 크게 떠지고 세상이 활짝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니까!!

나의 상황과 고민이 가장 비슷했던 [걸어서 걸어서]를 읽고 많은 위안이 되었다.


언제쯤이면 정말 나의 길을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까. 그래도 마흔쯤 되면 얼추 맞는 길로 들어섰다는 희미한 안도감은 생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어떤 길이 진짜 나의 길인지 헷갈린다. 어떻게 걸어야 진짜내 모습대로 걷는 건지 자꾸 오락가락한다. 계속 부연 안개속을 더듬거리며 간신히 나아가는 느낌이다.
어려서부터 눈에 띌 만한 재능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그랬다면 나도 더는 나를 불안해하지 않고 안정과 평화속에서 삶을 즐기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일찍부터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고 꽃피운 이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인생의 크고 작은 변화 앞에서 나•처럼 깊은 막막함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지, 그동안 잘 - P-1

해온 건지, 지금은 잘하는 중인지, 앞으론 잘해나갈지를 끝없이 의심하며 괴로워하진 않는지.. …………. 자신만의 재능을 잘알고, 굳게 믿고, 훌륭하게 키워나가는 이들은 과연 자신에대해 어떤 질문들을 던지며 이 아득한 생을 채워나갈지,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 P-1

지금 생각해보면, 끝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실망의 여정 끝에 사지에 몰리듯 도달한 곳이 공부였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나는 엉덩이힘이 꽤 좋은 편이었다(이제 내 재능은 엉덩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제법 오랜 시간 붙들고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근성이 내게도 있었다(이미 여러 차례 증명된 바이지만). 다만 투자 대비 효과는 상당히 미미했다(더는 증명할 필요도 없다). 친구들이 3시간 공부하고 받는 점수를 나는 6시간, 때론 9시간은 해야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하는 만름은 늘었고, 늘다 보니 기댈 곳은 되었으니까. 나도 조금은잘하는 게 생겼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을 주기도 했다. - P-1

공부의 전 과정이 늘 부담스럽 고 버거웠다. 그래도 했다. 계속 꾸준히 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데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공부마저 놓으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봐,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버릴까 봐 늘 두려웠다. - P-1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매일 내게 묻는다. 영화가 진짜 나의 길일까. 나는 영화에 정말 재능이 있을까.
영화가 아니라면 또 어떤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길이 진짜 나의 길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이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과연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지,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는 길만이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데려다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진짜 행복의 모습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길을 끝까지 걸어서 도착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착각했던 것도같다. 오랜 시간 걸으며 깨달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행복은 - P-1

도착지에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있다는 진실이었다. 목표한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때론 목표한 곳 없이 떠돌아다녀도 나는 단지 걸을 수 있어 행복했으니까.
돌아보면 내 길을 찾아 부단히 걸어오는 동안, 만족할만한 성취는 이루지 못했어도 행복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을 지그시 눌러 원하는 화음이 흘러나왔을 때,
붓 끝에 묻은 물감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종이에 번져나갔을 때, 춤을 추고 발차기를 하며 흘린 뜨거운 땀으로 온몸이 노곤해졌을 때, 그 모든 순간들에 나는 아주 다양한 맛의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행복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부지런히 꿈을 꾸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나는 이제 그냥 걷기로 했다. 계속 헷갈리고 오락가락하면서. 쉼 없이 의심하고 흔들리면서, 그렇게 걷고또 걷다 보면 끝내 어딘가에는 도착해 있겠지. 그러다 보면마침내 누군가는 되어 있겠지. 사실 꼭 어딘가에 도착하지않아도, 반드시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걷는 동안 행복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멋진 삶일 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걷자. 오늘도, 내일도, 그냥 걷고 또 걷자.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꾸준히 잘 걷는 재능만큼은 끝내주니깐.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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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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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삶에서 찢어진 페이지를 담아낸 소설이라는 말에 읽은 소설.
그 거대한 용기가 부럽다.
보드랍고 섬세한 언어들로 조합된 문장들로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실크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 P-1

할머니는 나를 두고 일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어루만져서 좋아지는 게 세상에 있다는 듯이. 그 있음을 보듬는 눈빛과 손길로 나를만졌다. 나는 할머니 손에서 다시 빚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요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길에서만 존재의 당위를 얻었다. 그럴 땐 할머니가나를 낳았어야 했다고, 내 엄마여야 했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것은 쉽게 사라진다. 첫눈, 미소, 할머니, 인생의 봄. 왔다가 금세 가는 것.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런생각을 내가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한다. 생각은 사건 후에 온다. 시간이 지난후, 그때를 기억한 마음에 결정처럼 내려앉는 것. 다마네기처럼 내가 미끄러워서, 내 존재가 미끄러워 사랑하는사람을 붙잡아두지 못하는 걸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렇다. 어릴 때 나는 대체로 미끄럽게 존재했다. 미끄러워서 다들 나를 타고 훌훌 내려갔다. - P-1

나는 ‘난삽하다‘의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루비에게 물었다. 그건 며칠 전 담임이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못하고 가장 지저분한 옷을 입고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남자애를 추궁하며 사용한 말이었다. 그 말은 누가 내머릿속에 은하수를 부은 것처럼 신선하게 들렸다. 난삽하다니? 난과 삽이란 두 음절을 사용해 가엾은 그애를,
그리고 반 아이들의 동공을 흔들리게 하다니. 아이들은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세계에서 규정당한다. 진짜 이름을 받는다. 하늘을 날거나 지구 밖으로 꺼질 수 있고, 직업을 갖게 되거나 꿈을 잃을 수 있다. 불공평하지만 그렇다. 나는 열한 살 때 선생님이 "다른 건 고만고만한데 글쓰기는 빠르고 정확하고 기막히게 잘하는구나"라고말하는 바람에 직업이 결정되었다. 불공평한 세계에 거처하던 시기였으니까.
"난하다는 게 뭐야?"
"정돈할 수 없다는 거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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