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지음, 이훤 사진 / 디플롯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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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온 신간을 제일 먼저 읽는 기분은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기분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슬아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좋아서 최근에 책 몇 편을 읽었는데 신간이 나와 또 집어들게 되었다.
늘 그랬듯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글이다. 점점 그 범위가 확장 되는 듯 하다. 여러 일들에 과감히 도전하고 해내는 그녀가 멋지다. 그녀의 글을 읽고 나면 아랫배에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주변을 돌아보며 잘 살아보자고. 힘 내자고.

친구들은 최근에 본 시상식에 대해 수다 떨고 있다. 노래하는 여자가 김태리의 수상 소감을 회상한다.
"그렇게 큰 자리에서 진짜 자기 말투로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그래도 되는 줄 몰랐는데."
친구들은 맞장구치며 김태리의 수상 소감을 성대모사한다. 절제되지 않은 흥분과 벅참과 우악스러운 몸짓을 흉내 내며 좋아한다.
"무대에서 자기 자신처럼 굴어도 된다고 믿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까?" 번역하는 여자의 질문이다. 나에

게나 남에게나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나다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는 그 자기다움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경지인지 다들 안다. 무대가 주는압력은 굉장하니까. 그 압력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나 아닌것은 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버티는 사람을 보면 왠지 마음이 좋아진다.

부담과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 속에서 그들은 훈련한다.
하루는 훈련을 마친 두 선수가 로커룸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장면은 아주 짧게 슥 지나갈 뿐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는 할 수 없다. 타자인 저스티스가 일루수인 해티버그에게 묻는다.
"뭐가 제일 겁나?(What‘s your biggest fear?)"
"공이 내 쪽으로 오는 거.(The baseball being hit in mygeneral direction.)"
저스티스가 피식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해티버그의포지션은 일루수다. 야구에서 공을 가장 많이 받고 잘 다루어야만 하는 일루수가 공이 자기한테 올 때 가장 무섭다고 대답한 것이다. 저스티스는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말해보라고 재차 묻는다. 그러나 해티버그가 웃음기 없이 못 박는다.
" 농담 아니야. 진짜야.(No, seriously, that is.)"
그리고 이어지는 정희진 선생님의 목소리.
"제가 이 장면에서 엄청 울었어요. (…)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감당이 안 된다는 얘기잖아요."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느라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다. 뒤차가 클랙슨을 빵 울렸다. 슬퍼도 도로에 멈춰 있으면 안 된다.

에 멈춰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운전대를 꼭 붙든 채로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차를 몰았다.
"직업이든 공부든 생계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요.
회피할 수 없는 일, 회피하면 모든 게 무너지는 그런 일이누구한테나 있어요. 일루수한테 공은 그런 거죠. 그런데 그일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잘 써야만 하는데 자신이 없는 원고를 마주할 때면 서툰 수영 실력으로 파도에 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놀랐다. 이 사람도 무서워한다는 것에 잘해야만 하는 소중한 일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에 선생님에게도 글쓰기가 그런 공이라는 사실이 무지막지한 위안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안을 하나 드립니다. 약간 느슨한 협회를 만드는 거예요. 삶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의 모임. 그런 모임을 만들어서 각자 상황을 얘기해보면 어떨까. (…) 세상의 모든일루수한테 마음을 조금 보내주는 거죠. 마음을 조금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항을 서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알고 보면 모두 각자의 삶에서 일루수다.

"요즘 ‘유래’라는 말을 계속 곱씹고 있어요. 예를 들어제 아이들인 예지와 예서의 유래는 당연히 진형과 순일이라생각해왔는데요. 오히려 저의 유래야말로 예지와 예서가아닐까, 저의 유래는 제 아내인 순일이 아닐까 싶은 거예요.
이런 세상 살아 무엇 하나 하는 사춘기적 우울을 여태 앓고있는 저에게, 삶의 지속가능성은 예지와 예서 그리고 순일로부터 유래하거든요.
유래는 존재의 기원일 텐데요. 제가 순남씨를 알게 된건 슬아 작가님 덕분이므로 적어도 저의 세계에서 순남씨는 슬아 작가님으로부터 유래하죠. 고양이 탐이도 작가님으로부터 유래하고요. 여성의 계보도 그렇습니다. 작가님이만들어가는 세상에서 잊힌 여자의 계보가 복원되죠. 우리는분명 누군가로부터 유래한 사람들인데요. 그가 저를 낳은사람일수도 있겠으나 저를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도있겠어요."
그러자 이 책이 끝나도 끝나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삶이 끝났어도 나를 통해 선생님의 마음속에살아있듯이, 책이 내 손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에게는 이제막 시작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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