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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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 책이기에 바로 빌려 읽었다.
장자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책!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방드르디』에서 투르니에는 타자와의 마주침과 소통이 우리에게긍정적인 삶의 전망을 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 무인도에표류했을 때, 그리고 방드르디에 의해 조롱받았을 때, 로빈슨은 탄식했고 또한 분노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로빈슨을 지배하고 있던 국가주의와 종교주의의 관념 자체가 드러낸 탄식과 분노가 아니었을까? 투르니에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타자와마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던 삶의 규칙에

대해 전혀 반성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기존의삶의 규칙이 지닌 문제들은 오직 새로운 삶의 규칙을 통해서만 대상화되고 해소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또한 얼마나 많은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겠는가? 로빈슨이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까지자그마치 28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무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백지(tabula rasa)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중간(milieu)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간다. 우리는 리듬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은 진

정한 외침을 던졌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당신들은 좋은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혹은 영혼이 이러저러한 마주침(rencontre), 배치(agencement), 결합(combinaison)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미리 알지 못한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장자가 말했던 노나라 임금 역시 바닷새를 완전한 백지상태로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미 인간사회의 규칙이 내면어 있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노나라 임금에게도 이미 구성된 "배치와 결합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미 구성된 "배치 그리고 결합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장자에게서도 인간은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존재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아비투스라고도 불릴 수 있는기존의 "배치와 결합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로 부상되는 것은 자신이 전제한 아비투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가진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이다.
장자의 성심은 들뢰즈에 따르면 특정한 ‘배치와 결합‘ 이라고도규정될 수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도 특정한 배치와 결합을 낳는 우발적인 "마침" (rencontre)이 역시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성심이라는 아비투스를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마주친 그 순간, 우리는 자신

이 앞으로 어떤 배치와 결합을 생성하게 될지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단지 예기치 못한 마주침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구성하게 될 때에만, 우리는 사후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회고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배치‘를 의미하는 ‘아장스망" (agencement)이란 개념이다. 이 개념은 장자의 성심이 타자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흔적 혹은 주름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가 말하는 성심의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장스망‘ 개념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있으며, 나이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é)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인간‘ - ‘동물‘ - ‘제작된 도구 유형의 아장스망, 즉 인간-말-등자(子)를 생각해 보자. 기술자들은 등자가 기사(騎士)들에게 옆 방향으로 안정성을 제공해 줌으로써 새로운 군대 조직, 즉 기병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이 경우 인간과 동물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이고, 전자나 후자모두 변화하게 된 것이다.-들뢰즈, 『대학』

수영의 비법에 궁금증을 가진 공자에게 수영의 달인은 다음과같이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땅에서 얻어진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지금 직면한 물의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이야기이다. 땅과는 전혀 이질적인 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그 흐름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땅보다는 물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완성했다는 것이며,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자에게서 성심이란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성심은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문제는 타자를 만났을 때, 다시 말해 이질적인 공동체와 조우했을 때 발생한다. 우리는 기존의 성심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타자와 관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려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물론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이 모험이 항상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모험의 성공에는 나의 역량만이 아니라,
내가 마주친 타자의 역량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아마 수영의 달인도 숱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이 점에서그가 새롭게 만든 주름 혹은 그의 성심은 일종의 비약이나 축복 속에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다. 수영의 달인이 결국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했던 것도 다름아닌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장자를 연구했던 많은 연구자들은 심재 이야기‘ 의 전반부, 즉 망각이란 테마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이런 시선 속에서라면 심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리고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누구보다도 분명하게 통찰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심재란잘 말해야 유아론적 형이상학, 즉 꿈으로부터 깨어난 상태에 지나지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심재라고 불리는 망각의 수양론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심재라는 수양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우리는 타자의 소리를 민감하게 들을 준비를 갖춘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를 읽으려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타자에 몸을 맡기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장자의 방법이 ‘목숨을 건 비약 (salto mortale)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사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방법 아닌 방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되겠지‘ 라고 섣부르게 생각했던 모든 방법들을 부단히 제거해야만 하고, 어떤 매개도 없이 그냥 타자에게로 비약해 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최종적인 조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날개가 없이 날아라!" 타자와의 연결을 보장하는 미리 설정된 어떤 매개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타자와 연결될 수있는 매개가 미리 존재한다면, 그 타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타자일수 없는 법이다. 이미 그는 나와 동일한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고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지적처럼 마주치지 않고 평행으로 진행하는 개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이 개체들에게 코나투스, 즉 삶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일단 개체들은 마주쳐야만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런 개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우발적인 마주침에는 이론상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코나투스가 억제되는 마주침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우리의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마주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에서
‘슬픔‘을, 그리고 후자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장자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도 기쁨이란 마주침으로부터 유래하는 삶의 고양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피노자라는 다리를 거쳐 장자가 모색했던 소통의 철학, 즉 그가 꿈꾸었던 삶과 연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장자 역시 기쁨의 윤리학을 지향했던 삶의 철학자였다. 기쁨의 윤리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보다도 자유로운개체들의 마주침과 연대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장자가 권고한 즐거운 연대의 기능성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얼마나 멀고도 힘든 길일까?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치열해야만 하는 망각의 수양론, 날개 없이 비약하는 새처럼 타자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아 줄 타자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초조함. 이 모든 시련을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통과할 때,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장자가 이야기한 봄이 분명 도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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