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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책을 덮고 나면 무작정 산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밤하늘에 손이 닿을 듯한 곳, 360도 대자연의 풍경이 마음을 벅차게 하는 곳에 서 있다면 저절로 겸손한 마음과 삶을 리셋하는 용기를 가지게 될 텐데.
미나토 가나에의 <노을 진 산정에서>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이니 고류다케, 쓰리기다케니, 하나도 모를 일본의 산 이름들은 다소 어렵긴 했다. 하지만 친구간, 모녀간, 헤어진 연인간에 저마다 산을 오르는 사연과 산을 매개로 풀어내는 고민과 화해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총 네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첫 번째와 세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우시로타테야마 연봉>에선 남편과 연관된 비밀로 산에 오르는 쉰다섯 아야코의 사연이 등장한다. 고류다케라는 카페를 차리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 아야코의 마음의 짐은 고류다케에 올라 하늘나라의 남편에게 사과하면서 풀어진다. 마미코와 가이드인 야마네가 대학 산악부 연인으로서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둘의 간질간질한 사연이 소개되며 산을 통해 긴 세월의 오해가 풀리는 내용이 설렌다.
"언젠가라는 말만 하고 있으면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아요." - 마음에 깊이 새길 만한 아야코의 말. 남편의 꿈을 반대했던 자신, 그가 꿈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가버리게 되어 얼마나 회한이 컸을까.
두 번째 이야기 <북알프스 오모테긴자>에선 이 책의 제목이 왜 '노을 진 산정'인지 알게 된다. 음악대학 세 친구의 엇갈린 감정, 섬세한 청춘의 고민들이 풀잎처럼 여린 울림을 준다. 산 정상에서 유이와 사키가 각각 노래와 바이올린으로 멋진 공연을 펼치는 대목은 옆에서 관람한 듯 압권이다. 산의 의미를 '재생'이라고 고백한 그들의 또 한 친구, 유의 이야기에서도 산은 주인공이다. 이야기 끝에 유가 보였다는 등산객들의 이야기는 환상적 장치일까.
세번째 이야기 <다테야마, 쓰루기다케>가 주는 울림도 특별했다. 딸을 위해 몰래 달리기 연습을 해서 초등학교 학부모 릴레이 예선 1등, 최종 2등을 달성한 엄마, 소방관인 남편이 일찍 죽고 최선을 다해 딸을 키우며 늘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엄마, 그 딸이 대학 산악부에 들어가려 하자 반대하지만 결국은 딸의 인생을 응원해주는 이토록 멋진 엄마라니.
딸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자신의 신혼 때처럼 '힐튼' 숙박을 손수 준비하는 장면은 최고였다.
네번째 이야기 <부나가타케, 아다타라산>은 두 친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을 담백하게 고백하고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다. 산이 주요 배경이 되어 그들의 인생이 강물처럼 펼쳐진다. 서로 오해했던 과거, 선택과 갈등, 결혼과 가업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음식을 산에서 먹게 된 경험. 모든 것이 잔잔한 드라마이다.
"지난 괴로운 날들은 괴로웠다고 인정해도 돼. 힘들었다고 입밖에 내어 말해도 돼. 그리고 그걸 지나온 자신을 그냥 위로해줘. 이제부터 다음 목적지를 찾으면 되는 거야." -친구의 편지를 통해 용기내어 산에 오르고,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
이 책의 모든 인물들에게 우주가 되고 힘과 위로를 주는 산과 같은 존재가, 모두에게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등산을 시작하고 싶지만 소심해서,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마음 뿐이라서, 시간이 없어서 망설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지금 당장 신발과 물병과 배낭을 챙길 듯하다. 가까운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가서 흙을 밟고 스치는 나무들의 숨결을 느끼지 않고는 못배길 욕망이 솟는 책.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우연히 만난 그런 책은 너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