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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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여성들의 서사

 

 

여성들의 서사가 빛나는 SF 명작이 탄생했다. 이 책을 덮은 순간 뇌리에 떠오른 것은, 야심있는 수많은 작가들의 질투를 불러올 만한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한 번쯤 이런 멋진 이야기를 써보고 싶지 않을까. 여성이든 남성이든, 누구든 작가라면.

 

남성들만 공격하는 대역병이 세계를 강타하고, 지구상의 수많은 남성들이 죽어 나간다. 최초의 발병부터 시작해서 원인을 구명하고, 면역을 체크하고, 백신을 발명하고, 새로운 행정으로 나라의 기강을 잡는 것은 모두 여성들이다. 여성들의 힘이 삶과 세상을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슬픔과 절망에 빠지는 것도 여성들이다. 남편과 아들과 아버지를 잃고, 몸을 가누기 힘든 슬픔과 지옥같은 절망과 분투하며 싸워야 한다.

 

이 책이 출판된 시기가 공교롭게 코로나19로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현재라니, 작가의 말에도 남겼듯 놀랍기만 하다. 팬데믹의 소용돌이가 삶의 모습들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 소용돌이 한복판을 살아가는 지금의 독자들은 이것이 터무니없는 허황된 소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긴박하고, 재미있고, 공감이 가고, 그밖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소환된다. 경탄하며 읽은 독자로서 책을 통해 우러난 감정들을 따라 주인공들 이야기를 해보자.

 

  

존경

어맨더가 등장할 때마다 , 저 멋진 주인공은 도대체하는 압도적 느낌이었다. 최초로 0번 환자를 진료한 의사 어맨더는 두 아들과 남편을 잃고도 냉철한 이성과 행동으로 세상을 위한 일을 계속해 나간다. 뷰트 섬으로 가서 발병의 원인을 규명해낸 끈기. 자신의 말을 무시하던 스코틀랜드 보건국. 결국 그 기관의 수장이 되어 활약하는 그녀는 모든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만하다. 자신의 보고를 믿지 않고 묵살한 남자를 시원하게 해고해 버리는 장면과 상처 많은 캐서린을 다정하게 감싸고 위로하는(끝에는 캐서린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는) 장면을 보라. 어떤 할리우드 영웅들보다 더 영웅적인 그녀에게 존경과 경탄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통쾌함

헬런의 이야기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은 남성 대역병이 시작되자 딸들과 아내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져 버리고, 몇 년이 흘러 본인에게 면역이 있다는 걸 알자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남편이자 가장 행세를 하려 한다. 그가 없는 동안 딸 셋을 혼자 힘으로 키우고 국가에서 재지정해준 직업에 성실히 종사하며 헬런은 스스로의 힘으로 가정을 지켜내고 삶을 개척해 간다.

 

당신은 한번도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적이 없어. 나는 요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할 때면 내 두 손을 써서 다른 사람들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집에 와서 딸들을 볼 때면 여기가 바로 내 자리라고 느껴.”

 

통쾌함을 날리는 대사다.

헬런 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술자의 목소리도 여운이 남는다.

 

수가 줄었다고 그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여자든 남자든-는 모두 인간일 뿐이다. 단지 유전 법칙 혹은 운명의 장난으로 면역이 있다거나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일은 없다.”

 

시대나 나라를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삶의 주체성을 빼앗겨 왔던가. 철없는 남편 덕에 울고 상처받고 그림자같은 일생을 감내해온 것은 물론이고.

 

 

씁쓸함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리사 마이클 박사는 백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낸 위대한 과학자다. 하지만 철저하게 냉혹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백신 판매로 억만장자가 된 그녀는 스스로 쌓게 된 부와 성취를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전세계인을 구했지만 전세계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줄도 안다. 리사의 냉혹함에 씁쓸함을 느끼다가도 맞아, 남자들도 야망과 과시욕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이들이 많은데, 왜 여자라고 그러면 안되지? 왜 여자들은 좀더 숭고해야만 한다는 편견이 있었지?’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부러움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온 당찬 아가씨, 엘리자베스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스스로 인생의 돌파구를 찾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생존과 꿈과 열정과 사랑, 결혼까지 쟁취한 인물이다. 남성 대역병의 시대, 팬데믹의 공포가 세계를 휩쓴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모두가 부러워할 것들을 이루었다. 그렇다. 당찬 힘으로 낭만까지 손에 넣은 여주인공 한 명쯤은 우리 모두가 가슴 속에 품고 키울 수 있는 법이다.

 

  

놀라움

마리아 페레이라의 기사 속 주인공인 브라이어니 킨셀라는 대역병 이후의 세계 풍속도를 발빠르게 포착해 세계 최대의 데이팅앱인 어댑트를 창시한 CEO이다. 남성들의 수가 현저히 부족해진 세계에서, 여자들이 왜 남자들만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작가의 상상력에 이마를 때리고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제발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이들이 이 대목을 읽고 커다란 깨달음을 얻기를.

 

 

(그밖의 영웅들에게 바치는) 찬양

조용하고 힘 있는 행정가 던 그녀의 등장도 언제나 미소짓게 한다. 남자들보다 더 유능한 던이 승진 일로를 걸을 때마다 (흑인 여성이어서 더욱 그랬을까) 속에서 희열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당신은 이 책을 제대로 읽은 독자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바다를 2년째 표류하던 배에서 남편을 구해낸 영웅 프랜시스. 프랜시스의 끈기와 신념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 토비는 배 위에서 굶주려 죽고, 승객 중 소수의 생존자도 없었을 것이다. 프랜시스가 토비를 위해 벌인 위대한 일들은 다큐멘터리감이다. 여성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험난한 여정의 보고를 담은 저자이자 인류학자 캐서린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자란 캐서린이 자기에게 전부였던 앤서니와 아들 시어도어를 잃었을 때, 그 상실감은 모든 독자들에게 전염되고 만다. 캐서린이 친구 피비를 질투하고 피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이가 있을까. 책을 읽어가며 조마조마하게 빌었던 것은 캐서린이 정신적으로, 무사하기를, 잘 버텨나가기를, 하는 바람 뿐이었다.

 

전 세계인을 위한 빛나는 여성들의 서사 이 책은 인류와 코로나19라는 시의적절성 속에, 충격과 슬픔보다 희망과 위로를 준다는 점에서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보너스 하나 - 많은 나라의 인물들이 나오지만, 끝부분에 가서 대한민국 인물 한 명을 발견하게 되는 작은 기쁨도 맛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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