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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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뉴욕에 정착한 안드레 애치먼의 자전적 소설이다.

하버드라는 곳에 대한 애정과 증오, 친밀감과 거리감을 섬세한 심리 묘사 속에 버무려 읽는 즐거움은 남달랐다. 이토록 사람과의 관계를 섬세하고 잔잔하게, 애틋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묘사한 작가들이 또 있었던가.

와 칼라지의 관계가 주는 미묘한 긴장과 떨림에서 칼라지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킨다. 자유분방한 활력을 가진 괴짜,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거칠 것 없는 독설. 누구나 칼라지를 처음엔 독특한 이방인으로 바라보다가, 그의 내면에 감춰진 고독과 불안, 연약함을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특대형 미국에 대한 냉소와 비난이 결국 한 조각 파인애플을 얹은 슬라이스햄 때문에 찬양과 경외로 변하다가, 마지막엔 매정하게 내쳐지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짙은 연민이 솟아나온다.

는 칼라지와 스스로가 닮았음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를 멀리하고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추방당하기 직전의 고독한 아웃사이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상류층을 비웃는 웨이터, 늘 여자와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언제나 버림받는 거리의 부랑자와 닮은 칼라지. 보스턴의 늦은 밤 거리를 운전하며 재즈를 듣는 고독한 야수의 모습 속에서 는 동질감과 함께 그와 멀어져야 한다는 이중적 고뇌를 느낀다.

미국 사회 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유대인과 아랍인 이방인으로서의 연대감은 를 숨쉬게 하고 를 살아있게 하고 고독에서 건져주지만, 동시에 그런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기만 한다. 자신은 절대 칼라지처럼 되어선 안된다고, 칼라지와 어울리다가 영원히 미국으로부터, 케임브리지로부터 버림받아선 안된다고 불안해한다.

그리하여 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칼라지를 사랑하면서도 그와 자신이 결코 같은 부류가 아님을(적어도 는 하버드에서 강의하는 지식인, 대학원생이 아닌가.) 증명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 간사한 마음을 경멸한다. ‘는 아이비리그 학생이고 그는 택시운전사일 뿐이라는 선긋기, 칸막이 세우기를 무의식적으로 자꾸 시도하는 자신을 비참히도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어디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극단적인 무능력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살며 평범한 일을 하고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불가촉천민이었다.

 


수치심. 칼라지와의 만남 이후 가 가장 진지하게 느낀 정서는 바로 수치심일 것이다. 칼라지를 부끄러워하면서,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유대인으로서의 간교함이라 여기는 내면의 꿍꿍이를 부끄러워하면서, 칼라지가 떠난 세상의 홀가분함을 상상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마지막 순간 비겁하게, 영혼의 친구와의 작별조차 피해버린 자신의 저열함을 끝없는 후회 속에 부끄러워한다. 또 와히다에게, 예카테라나에게, 린다에게, 자신에게 마음을 준 모든 여자들에게 진심이 아니었음을 부끄러워한다. 앨리슨마저도, 앨리슨이야말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싶은 유일한 여자였음에도 그녀의 상류층 부모와 칵테일 파티 후 느낀 것은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덩어리였다. 또는 자격지심, 또는 빈털터리에 외국인으로서 그들에게 내쳐질까봐 두려워 먼저 문을 닫아버리는 과도한 자의식.

우리 모두 그와 같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77년 여름, 케임브리지에서의 처럼, 삶의 위기와 우울감에 시달릴 때마다 영혼의 닮은꼴인 친구를 찾으러 카페 알제로 뛰어가던 기억, 거기서 칼라지를 만나 경멸하는 이들에 대한 험담을 실컷 하고 난 후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기억, 하지만 정작 그와의 친분을 숨기고 싶어하던 기억. 누구에게나 그런 똑같은 기억, 부끄러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유려한 심리 묘사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인 아름다운 장면은 월든 호수에서 보낸 하루였다. 꿈같은 여름 휴가, 그날의 기억은 와 칼라지의 마음 속 깊이 각인되어 평생의 강력한 아스피린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굵은 글씨로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프랑스어들 - ‘와 칼라지가 상상 속 프랑스로의 여행을 떠나며 유쾌하게 나누는 이 나오는 장면마다 미소가 지어진다. 칼라지의 명함과도 같은 본 수아레라는 인사는 이 책을 덮은 독자들이 자기 마음 속 그리움의 대상에게 한 번쯤 던져보게 되지 않을까.

월든 호수와 프랑스. 이 두 존재는 평생 의 마음 속에 그리움의 대명사로 남게 된다. 또한 그리움의 힘 때문에, ‘, ‘의 공모자인 우리 모두는, 버거운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고 겨우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이면 우리는 누구나 칼라지와 같은 이가 내게 다가와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유쾌하게 욕을 퍼부으며,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눈으로 속 시원히 자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향해 주먹질과 발길질로 복수해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싸구려 와인을 나누며, 내가 괜찮을 때 사라져주고, 그러다 어느 새벽 복통으로 쓰러져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면 체커 택시를 타고 달려와 기꺼이 응급실로 데려다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 우린 누구에게나, 이렇게 칼라지같은 친구가, 너무나 사랑하지만 한편으론 숨기고픈 비밀스러운, 자신을 닮은 이방인 친구가 필요하다. 왜냐고? 도시 속의 우린 모두 마음에 날카로운 이빨 하나를 숨기고 사는 이기주의자이며 사람들의 섬 사이에 혼자 고립된 가여운 타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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