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 일상이 괴로워진 당신을 위한 의존과 돌봄의 심리학
도하타 가이토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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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뭉클하고, 유익한 책. 돌봄하고 돌봄받는 일의 구체성이 드러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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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사람의집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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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라는 표현이 남용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트라우마가 삶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트라우마의 복잡한 맥락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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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그의 사유, 그의 인격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리시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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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푸코를 다룬 책이지만, 시간 순서에 따라 일별하는 책은 아니다.

푸코가 지성계(라는 게 있다면)에 던진 '담론'이라는 폭탄을 탐구하는 책이다.

푸코의 용법에서 담론은 주제나 의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지의 어항 안 물고기처럼, 어항같은 것을 담론이라고 했다.


푸코가 말하는 담론이 급진적인 이유는 주어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화'(될 화 化)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역시 푸코의 이 논의를 이어받는데

버틀러는 섹스는 젠더라고 이야기하면서 섹스 자체가 있는 게 아니라 섹스화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성별이 아니라 성별이라고 이름 불리고 담론 안에서 인식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별은 우연적인 것이다.


내가 푸코의 저작을 읽었을 때 푸코는 시기마다 조금은 다른 개념을 갖는 것 같았다. 

이 책에도 등장한, 담론을 이야기할 때의 '진실'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담론 하의 진실을 말한다.

반면 80년대 이후 푸코가 말한 파레시아에서의 진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를 말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믿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실인 것을 말한다는 것). 


어떤 면에서는 죽음 직전의 푸코에 대해서 다루기는 하지만 높은 비중을 두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담론이라는 이야기를 한 푸코도 중요하지만, 예속화에서 주체화로 관심을 옮긴 후반기 푸코에 대해서도 큰 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벤느의 논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독자인 나의 생각이다. 


나는 푸코의《주체의 해석학》(이 책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임) 이후 두 권의 한국어로 미번역된 강의록이 아주 중요하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돌봄과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논하는 푸코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주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이 시기의 작업은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미공개 선집 시리즈 참고).


푸코는 멋있다. 그의 회의주의적인 관점, 자기의 행위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침묵. 반드시 이론과 동일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용기. 지나간 자신의 작업과 발언을 도그마로 삼지 않길 바라는 성상파괴적인 사유까지. 더군다나 언제나 신뢰할 수밖에 없는 역자인 이상길 선생님의 번역과 개정판 후기(〈푸코를 불태워야 하는가?〉)는 가장 최신의 그러면서도 푸코와 그에게 놓인 맥락을 충실히 이해하는 학자의 푸코론인데, 푸코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아주 필요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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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그의 사유, 그의 인격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리시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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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던진 ‘담론‘이라는 폭탄을 다룬 책이다. 푸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화(化)‘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화한 것이 있다는 것. 벤느는 푸코의 맥락과 상황을 보여주며 그의 주장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특히, 기대한 대로 역자의 개정판 후기는 아주 값진 푸코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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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lrb.co.uk/the-paper/v45/n20/judith-butler/the-compass-of-mourning


출처 : 런던 리뷰 오브 북스 vol 45(2023년 10월)



최근 하마스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처음에 이 아티클을 번역해볼까 싶어 중간 정도 했는데, 무익한 일이다 싶어서 접었다. 대신 간단한 요약과 생각을 써보기로 했다. 내가 이해한 바 대로 버틀러의 문장을 정리해보려 한다. * 표시가 붙은 괄호는 내가 생각을 쓴 것이다.




- 공공의 논의가 가장 필요한 문제들은 현재의 프레임워크에서는 논의하기 어렵다.


- 하마스에 의한 폭력은 끔찍했고 이를 승인하는 것 없이 비난(condemn)해보려 한다.


- 비난에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는 (하마스의) 폭력을 상대화하고 맥락화하는 것인가?


-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가자, 서안)에 자행한 폭력(포격, 살해, 영토 박탈, 상시적 검문, 체포, 고문)은 끔찍한 것이 맞지만 그것이 하마스의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 하마스의 폭력을 하마스가 아닌 이스라엘에게로 돌리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 조차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행위의 자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


- 어떤 종류의 도덕성과 실천이 이런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하마스식의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맥락화를 하는 것은 비난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 맥락도 있다. 맥락화를 하는 상황과 맥락화를 하여 비난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행위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 유대인으로서 세대를 초월하는 트라우와 함께 살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잔혹행위가 벌어졌지만, 또한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people not like me)에게도 같은 행위가 벌어졌다.


- 문제는 단순히 공감의 실패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이 정체화가 성취되는 프레임워크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 지배적인 프레임이 어떤 삶은 더 애도가능한 삶으로 여기고, 어떤 상실들의 집합은 다른 상실들의 집합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동물'로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인 요아브 갈란트-Yoav Gallant-는 "we af fighting against human animals"라고 발언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the Jewish people)이라고 부를 때(바이든이 불렀다, 유대 디아스포라를 이스라엘로 환원시키는 반동적인 반응) 이 장면-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는 동물들간의 '전쟁'의 장면-에서 유일하게 애도가능한 사람은 이스라엘인들이다.


- 가자 사람들의 죽음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죽음을 상대주의나 동치성의 논쟁에 빠지지 않고 애도할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남녀 갈등, 흑백 갈등, 노사 갈등이라는 언설은 두 관계가 상대적으로 동위적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 이스라엘군과 정착민들은 서안 지구와 가자지구의 거의 3800명의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최근의 행위들은 시작하기도 전인 2008년부터 죽였다. 이들을 애도할 수 있는 세상은 어디일까? 


- 나는 비-폭력의 정치학을 옹호하는데(defend) 이 지식은 모든 경우에 적용 가능하지도, 작동하지도 않는다. 


- 폭력의 종료 없인 진정한 평화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평화'는 불평등의 구조를 유지하고, 인종차별주의와 권리없음을 의미하는 규범화를 위한 완곡 어법이 아니다.


- 진정한 평화의 미래는 이름 부를 자유(*사람을 호명하며 애도할 수 있는 자유), 검열-범죄화-반유대주의 혐의로 제기되는 것의 두려움 없이 모든 폭력을 서술하고 반대하는 것 없이는 올 수 없다.


-  이런(버틀러가 서술한 비-폭력의 미래) 희망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이브해 보이고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일부는 반드시 이런 견해를 견지해야 한다. 지금 존재하는 구조가 나중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시인들과 우리의 몽상가들(dreamers), 길들여지지 않은 바보들, (*비-폭력의 수행을 하려는 사람들의 집단을) 어떻게 조직하는 지 아는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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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전쟁의 프레임-현재 우리가 전쟁을 알고, 보고, 시청하고 읽고 듣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라는 매체가 경유시켜 준 프레임-으로는 전쟁을 이해할 수도, 죽어 가는 사람들을 인식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버틀러가 《Frames of War》에서 제기한 주장이다. 


이 전쟁 이야기에서 애도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스라엘 뿐 아니라 하마스에 의한 폭력마저도 궁극적으로는 폐기돼야 함을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은 피해로 하마스의 폭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단호한 비-폭력과 도덕적 비난으로 폭력의 생산과 재생산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버틀러는 말하는 듯 하다.


물론, 당연히 철학적인 이야기고 사변적인 이야기기도 하다. 아주 관찰자적인 이야기기도 하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진 않다. 또한, 하마스의 폭력을 옹호하는 그리고 이스라엘의 레짐을 비난하는 이분법을 많은 사람들이 옹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와 구호를 옹호하면서도 폭력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행위가 아닐 수 있고 그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행위기도 하지만 그들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 하면서도 일상의 폭력(비-폭력)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일상에서의 폭력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이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에 대해한 유용한 논의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마스의 폭력이 단순히 하마스의 행위일 뿐 아니라 역내 권력 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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