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lrb.co.uk/the-paper/v45/n20/judith-butler/the-compass-of-mourning
출처 : 런던 리뷰 오브 북스 vol 45(2023년 10월)
최근 하마스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처음에 이 아티클을 번역해볼까 싶어 중간 정도 했는데, 무익한 일이다 싶어서 접었다. 대신 간단한 요약과 생각을 써보기로 했다. 내가 이해한 바 대로 버틀러의 문장을 정리해보려 한다. * 표시가 붙은 괄호는 내가 생각을 쓴 것이다.
- 공공의 논의가 가장 필요한 문제들은 현재의 프레임워크에서는 논의하기 어렵다.
- 하마스에 의한 폭력은 끔찍했고 이를 승인하는 것 없이 비난(condemn)해보려 한다.
- 비난에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는 (하마스의) 폭력을 상대화하고 맥락화하는 것인가?
-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가자, 서안)에 자행한 폭력(포격, 살해, 영토 박탈, 상시적 검문, 체포, 고문)은 끔찍한 것이 맞지만 그것이 하마스의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 하마스의 폭력을 하마스가 아닌 이스라엘에게로 돌리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 조차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행위의 자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
- 어떤 종류의 도덕성과 실천이 이런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하마스식의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맥락화를 하는 것은 비난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 맥락도 있다. 맥락화를 하는 상황과 맥락화를 하여 비난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행위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 유대인으로서 세대를 초월하는 트라우와 함께 살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잔혹행위가 벌어졌지만, 또한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people not like me)에게도 같은 행위가 벌어졌다.
- 문제는 단순히 공감의 실패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이 정체화가 성취되는 프레임워크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 지배적인 프레임이 어떤 삶은 더 애도가능한 삶으로 여기고, 어떤 상실들의 집합은 다른 상실들의 집합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동물'로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인 요아브 갈란트-Yoav Gallant-는 "we af fighting against human animals"라고 발언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the Jewish people)이라고 부를 때(바이든이 불렀다, 유대 디아스포라를 이스라엘로 환원시키는 반동적인 반응) 이 장면-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는 동물들간의 '전쟁'의 장면-에서 유일하게 애도가능한 사람은 이스라엘인들이다.
- 가자 사람들의 죽음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죽음을 상대주의나 동치성의 논쟁에 빠지지 않고 애도할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남녀 갈등, 흑백 갈등, 노사 갈등이라는 언설은 두 관계가 상대적으로 동위적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 이스라엘군과 정착민들은 서안 지구와 가자지구의 거의 3800명의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최근의 행위들은 시작하기도 전인 2008년부터 죽였다. 이들을 애도할 수 있는 세상은 어디일까?
- 나는 비-폭력의 정치학을 옹호하는데(defend) 이 지식은 모든 경우에 적용 가능하지도, 작동하지도 않는다.
- 폭력의 종료 없인 진정한 평화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평화'는 불평등의 구조를 유지하고, 인종차별주의와 권리없음을 의미하는 규범화를 위한 완곡 어법이 아니다.
- 진정한 평화의 미래는 이름 부를 자유(*사람을 호명하며 애도할 수 있는 자유), 검열-범죄화-반유대주의 혐의로 제기되는 것의 두려움 없이 모든 폭력을 서술하고 반대하는 것 없이는 올 수 없다.
- 이런(버틀러가 서술한 비-폭력의 미래) 희망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이브해 보이고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일부는 반드시 이런 견해를 견지해야 한다. 지금 존재하는 구조가 나중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시인들과 우리의 몽상가들(dreamers), 길들여지지 않은 바보들, (*비-폭력의 수행을 하려는 사람들의 집단을) 어떻게 조직하는 지 아는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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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전쟁의 프레임-현재 우리가 전쟁을 알고, 보고, 시청하고 읽고 듣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라는 매체가 경유시켜 준 프레임-으로는 전쟁을 이해할 수도, 죽어 가는 사람들을 인식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버틀러가 《Frames of War》에서 제기한 주장이다.
이 전쟁 이야기에서 애도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스라엘 뿐 아니라 하마스에 의한 폭력마저도 궁극적으로는 폐기돼야 함을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은 피해로 하마스의 폭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단호한 비-폭력과 도덕적 비난으로 폭력의 생산과 재생산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버틀러는 말하는 듯 하다.
물론, 당연히 철학적인 이야기고 사변적인 이야기기도 하다. 아주 관찰자적인 이야기기도 하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진 않다. 또한, 하마스의 폭력을 옹호하는 그리고 이스라엘의 레짐을 비난하는 이분법을 많은 사람들이 옹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와 구호를 옹호하면서도 폭력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행위가 아닐 수 있고 그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행위기도 하지만 그들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 하면서도 일상의 폭력(비-폭력)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일상에서의 폭력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이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에 대해한 유용한 논의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마스의 폭력이 단순히 하마스의 행위일 뿐 아니라 역내 권력 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