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p Temporalities (Paperback)
Ellen Samuels / Duke University Press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이 책은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는 SAQ(The South Atlantic Quarterly)에서 크립 시간성을 다룬 판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Eli Clare는 시를 썼고 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는 타로 카드에 대해 썼다. 물론 Leah는 자신이 쓴 《Care Work》라는 책에서 타로 카드와 같은 다소 영적인 활동과 다양한 소수자성을 장애와 함께 갖고 있는 사람들의 대안적인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시론이나 장애 정의(Disability Justice) 관련 아티클을 기대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시나 타로 이야기가 의미 없다는 것이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Sins Invalid라는 집단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면 아티클만이 어떤 대안적인 지식을 주다는 생각도 어쩌면 위계적 생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책은 제호대로 전반부는 Crip Temporalities(크립 시간성이라고 편의대로 부르겠다)에 대한 아티클이 있고 후반부에는 2019년 레바논 반정부 시위 관련 아티클이 있지만, 이 부분은 읽지 않았다.


 크립 시간성은 크립으로 사는 사람들이 겪는 시간성. 시간 규범성. 도시와 자본주의의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크립들의 경험에서 나온 시간성을 의미한다. 비장애인의 보행과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 흰지팡이(Cane)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의 시간은 외관상 같을지라도, 경험적으로 차이가 있다.


 단순히 점점 빨라지는 자본주의의 속도에 '느림'의 미학을 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일부 크립은 느리거나 매우 느린 삶의 속도를 갖지만-비장애인에 비한다면- 일부 정신장애인들에겐 매우 빠른 급격하게 빨라지는 속도에서 살기도 한다). 맞벌이 가정 내에서도 시간의 격차가 있다. 자녀를 돌볼 뿐 아니라, 돌볼 준비를 하고 있는, 이를테면 돌봄 대기조의 시간은 다른 사람과 다른 시간 감각을 갖는다. 크립들은 각종 편의 시설에 대한 요구를 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또한 '정상적인'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에피소드가 너무 심해져서, 혹은 정말로 피곤해서. 만성질환자의 피곤, 자가면역질환자의 급성기 등 다양한 이유로 '일상적인'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출근이란 무엇일까? 시간표와 일과시간과 같은 시간의 레짐안에서 흘러가는 일상생활을 늘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성이란 무엇일까? 이 책에는 이런 시간 규범성과 여러 이유로 종신 교수직도 포기한 크립의 사례도 나온다. 


 예측 가능한 생산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단순히 이야기할 뿐 아니라 이런 담론의 정치성을 이야기한다. 바디 프로필, 헬스나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일종의 자기 돌봄 행위도 정치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상호 도움 없는 사회, 흔히 말하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경쟁 사회에서 개인의 자기 돌봄은 경제적 몰락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무의식적으로 정복하려 몸을 훈육하려는 '유순한 몸'에 대한 욕망은 아닐까? <Reclaim the Radical Politics of Self-Care>라는 장에서는 개인적인 고려 대상으로 치부하며 탈정치화된 돌봄이라는 의제를 정치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생산 노동을 했던 흑인 여성들을 언급하지만 이는 단순히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속속 폐지하고는 있지만, 중동의 일부 국가들은 외국인 가사 노동자(Domestic woker)에 대한 제도인 '카팔라 제도(kafala system)'가 있다. 한국의 고용허가제와 유사한 느낌으로 가사 노동자의 처우와 임금에 대한 권리가 고용주에 있다는 것이다. 레바논의 경우 집을 지을때 가사 노동자의 쪽방도 설계도에 그리기도 한다고 한다(Roser Corella 감독의 다큐멘터리 Room without Window는 레바논에 온 외국인 가사 노동자들을 조명한다. 공간 역시 당연히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가 시간을 들여 돌봄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자기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정치적인 이야기이고 핵심적인 이야기임은 당연하다. (돌봄과 장애를 둘러싼 돌봄 이슈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는 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 《Care Work》참조)


 돌봄 자체가 일부 장애인과 뗄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사실 모든 인간이 그렇지만), 돌봄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자폐증이 있는 트랜스/논바이너리의 시간성 대한 아티클도 있다. 트랜지션 후에 자폐증 혹은 증상이 심해진다면 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트랜스의 chrononormative(연대기적 시간 규범적인? 연대기규범적인?)는 주로 디스포리아를 겪고 자신의 젠더 정체성과 알맞고 가능한 외적 표현을 수행한다는 내러티브인데. 트랜스여성이지만 자폐증이나 다른 질병/장애로 인해 치마가 무릎에 닿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떤가?(물론 트랜스여성이라고 모두 페미닌한 복장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트랜스 시간성 혹은 시간 규범성과는 다른 감각을 갖는 크립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를 드러낸다. (<Autistic Disruptions, Trnas Temporalities>, Jake Pyne)


 자스비르 푸아르와 앨리슨 케이퍼의 글이 대미를 장식하는데, 자스비르 푸아르의 아티클은 여러 번 읽어봐야 할 정도로 복잡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푸아르의 아티클의 제목은 <Spatial Debilities:Slow Life and Carceral Capitalism in Palestine>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공간적 쇠약과 느린 속도의 삶, 그리고 감옥(같은) 자본주의에 대해 논한다. 아마도, 푸아르가 최근 작업 중이라는 《Slow life: Settler Colonialism in Five Parts》와도 이어질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불구로 만드는(maiming) 폭력의 의도성을 추적한다. 이스라엘은 의도적인 공격으로 죽게 두지 않는/죽게 만들지 않는 생명적치적 통치술을 발휘한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이나 외부에서, 시위대와 이들에 대한 테러 공격 그리고 불구의 스펙타클에 주목하는 것에 비해 푸아르는 비가시화된 일상적인 느림을 조명하는데,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호모 사케르가 떠오르는 버림뿐 아니라, 검문소에서의 긴 대기, 대중교통의 교란, 이동성의 손상, 예측불가능한 기다림에서 갖게되는 정신적, 신체적 혼란을 주목한다.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상태, 그것의 식민주의적 조절은 일종의 '시간성의 무기화'라고 할 수 있다. 찬드라 모한티나 호미 바바가 피식민지역의 시간성을 과거로 설정하는 방식의 식민화를 이야기했다면, 푸아르는 느림과 자본주의 그리고 생명정치를 엮어서 설명한다. 


 앨리슨 케이퍼는 다소 개인적인 단문들을 붙여놓은 글을 썼는데 빠름과 느림, 이전과 이후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장애 이전의 삶과 장애 이후의 삶이라는 그런 안정적인 이야기가 가능할까? 장애는 단지 '일어나는' 것인가? 앨리슨 케이퍼는 과거에서 향수를 찾고, 이후의 시간은 상실과 후회의 시간이라는 추정뿐 아니라 장애가 명확하게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는 사건이라는 추정에도 도전한다. 또한, 장애인은 무구하다(innocent)는 모델은 거절하면서 불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답이 명확하지 않은 고민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2021년에 나왔지만 대부분 코로나 이전 혹은 가까운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올 때는 분명히 코로나가 팬데믹임이 분명해진 이후이다.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시간성에 살고 있는 지금, 크립 시간성에 대한 글들은 현재의 시간을 사유하는데 자원이 될 뿐 아니라, 코로나 이후에야 크립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속속 크립 시간성과 유사한 어떤 시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장애 정의를 위해서 혹은 당사자들이 더 살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인식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 책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알라딘으로 사서 한 달 넘게 걸려서 받았지만, 듀크대 출판부 온라인 사이트로 가면 일부 아티클을 구매해서 PDF로 볼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독점 기업 시대에 살고 있다 - 아마존부터 교도소까지, 대기업 권력 시대의 삶
데이비드 데이옌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독과점 기업 병폐의 디테일을 담았다. 독점 기업은 노력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익을 위해 도급, 감축, 담합, 로비, M&A 등의 과정을 거친다. 도덕적 지탄이나 불매(소비자운동), 소송으로 이들을 바꿀 수 있을까? 모빌리티, e커머스, 반도체, 종자산업 등 한국에도 독점(과두) 기업들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건에서 말로, 말에서 글로, 글이 소설로 옮겨오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죽은 사람 혹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 죽음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노력들.. 4.3뿐 아니라, 사건, 사고, 범죄, 폭력, 학살 뒤에 남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 베이징에서 마주친 젊은 저항자들
홍명교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내 젊은 좌파 운동가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탄압을 받는다. 훗날을 기약할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아포리아적인 상황. 초착취적인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어떻게 저항해야 안전할 수 있을지, 이 말은 모순인지 생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프리즘 총서 11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체주의적인 글쓰기는 일단 직관적 이해가 어렵다. 적어도 과문한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하나의 제스처로서-확답은 하지 않으며- 응답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변적이거나 아카데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체성 정치라는 전 지구적 자매애 같은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본질주의를 반대한다고 해도, 해체주의적인 스피박의 이야기는 오롯히 납득이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현은 현재적이고 문제적인 이슈다. 누군가를 위해 말하는 것, 누군가를 묘사하는 것 모두 재현에 담긴 뜻이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이 재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다소 단정적으로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런 단정은 수사일 뿐 스피박의 진의는 아닌듯하다. '서발턴'은 어떤 방식으로든 말을 하고 있지만 듣는 이들의 가청범위가 낮은 탓이다. "유효한 제도적 배경"이 없이 말하는 '서발턴'의 말(문맥에서는 '저항')은 들릴 수 없다고 스피박은 말한다.


 여기서 (여성)서발턴은 여러 겹의 억압을 받은 여성, 애도되지 않은 여성, 여전히 통계상 암수로 남은 일종의 '수동적인' 여성만을 뜻하진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고, 시도를 했지만 그것이 저항이나 목소리로 인식되지 않고 죽은 이들도 서발턴의 한 사례이다. 스피박이 제시한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는 하층 계급 여성이 아니다. 다시 말해, 중간 계급의 민족주의 투사 여성도 어떠한 조건 하에서는 서발턴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가부장적 민족주의 간의 대립 모델의 사이에서. 혹은, 제국주의적 코드화로 토착민들을 코드화하는 전략과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의 사례로 제시할 수 있는, 사티(과부 화살)를 칭송하는 민족주의적이면서 가부장적 해석들(영국의 식민권력은 사티를 법으로 금지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맥락에선, 제1세계 제국주의와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지식인 '주체'들, 제3세계에서 이에 호응하는 토착민 지식인(스피박의 표현을 빌리면 '토착 정보원'), 사티(과부 화살)를 "여성들이 죽고 싶어 했다"라며 순전한 선택으로 치부하며 칭송하는 뻔뻔한 토착주의적 진술들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이 이질적인 여성 서발턴들의 어떤 저항들은 저항들로 기록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스피박의 문제 인식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서발턴을 감별하려는 시도보다는, 서발턴을 형성하는 그 조건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지 자신의 위치(메트로폴리탄의 시민이면서 제3세계 출신이며 엘리트이며 교수인 여성)에서 할 수 있는 응답 능력 혹은 다가가는 제스처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지식인의 윤리적인 방어이기도 하지만, '서발턴'에 응답하거나 다가가길 요청하는 글로 읽혔다. 예상 독자는 '서발턴' 보다는 이에 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논하는 사람들은 '서발턴' 자신들은 아닐 것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스피박은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에서 서구 지식인 '주체'라는 자신의 입지를 무시하는 분석을 비판하는데, 스피박도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지식인-서발턴을 단순하게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식장에서 벌어지는 담론에 대한 비판들이 액티비스트적 글쓰기를 포함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 안에 한계나 결여는 없을까? 서발턴에 대해 쓰는 '지식인' 스피박의 욕망은 무엇일까?)


 지구적 환경 위기, 제1세계(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의 독과점 등 달라진 자본주의의 상황 안에서, 이제는 소비주의가 더욱 자연적인 경향으로 여겨지고, 변모하는 국제 노동 분업으로 제1세계 안에서도 이질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충분히 많은 사람을 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쓰이는 '퀴어'라는 용어와 에이블리즘과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반대 등 다양한 의제들과 관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서발턴>을 어떻게 다시 읽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서발턴이라고 부르거나 재현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며, 서발턴이 누구인지 보다는 서발터니티를 곱씹으며 어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이런 글을 읽으며 곱씹는 지식인 혹은 식자층들의 한계는 어떤 점인지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로 이 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저자들의 조금은 다른 관점과 맥락을 담은 이야기들도 다양한 고민거리를 제공한다. 젠더화나 서발터니티. 서발터니티와 죽음의 드러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라에스와리 순데르 라잔(3부 <죽음과 서발턴>이나 푸코적인 생명정치라는 관점으로 서발턴을 이야기하는 펭 치아(4부 <생명권력과 새로운 국제 재생산 노동 분업>). 가정의 재생산 업종에서의 국제적인 하청과 이들과 관련 있는 생명정치는 한국의 결혼 입국과 체류 자격 연장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성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미러링에 가까운 말속에 어떤 인식론적 폭력이 담길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지영 2024-08-17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준 높은 리뷰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부터 고민하던 책인데 꼭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