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의 역량 부족 탓이다.
물론 다 읽었다고 잘 이해한 건 아닐 것이다.
완전히 오독했을 수 있다. 그냥 초견(앞으로 계속 읽을 예정)한 후 거칠게 쓰는 글이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읽은 상태였고
데리다적인 수행과 반복, 차이는 버틀러의 논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익숙한 상태였다.
(혹시 이 책을 읽을 사람은 프란츠 파농의 저작, <빌러비드>, <암흑의 핵심>(콘래드), <악마의 시>(루슈디) 정도는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 이 책에서 얻은 지점 하나는 '수행성'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논의와 이어지는 부분(버틀러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데리다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이 많다.
권력은 수행한다. 그리고 그 수행을 반복한다. 이 수행의 반복은 일종의 불안함을 내포한다.
매주 콘서트를 하는 가수가 매 공연 같은 음정을 내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 권력이 자연화하고 주장하고, 당연하다고 여긴 이데올로기는 실은
반복을 통해 그런 척하는 것인데, 바바의 논의에는 그런 반복 안에 양가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담론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 파농이 등장한다. 파농의 정신분석적인 글은 피식민 민중의 정신뿐 아니라 식민자의 정신에도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백인성은 정말 그런 것일까? 그것을 실연하는 백인들도 신경증이 있지 않을까? 여하튼 권력의 수행을 이야기하며 바바는 파농을 참조한다. (백인 권력자들이 우리가 왜 여기있는지 말해달라는 일종의 투사적 타자화인 권력의 편집증-paranoia of power-에 대한 부분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실 바바의 글에서 가장 반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시간에 대한 바바의 이해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 우리가 시계로도 보고 달력으로도 보는 그 보는 게 가능한(visible) 시간은 일종의 식민적 시간(관)일 수도 있다는 식의 논의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인다. 또한 past-in-the-present라는 현재에 있지만 과거화하는("지금은 2022년인데 이 나라는 우리나라 50년대를 보는 것 같네"와 같은 특정 문화를 과거의 상징으로 여기는 위계적이고 권력적인 행위) 권력의 행위도 서술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선재한,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남임(alterity) 또는 타자성(otherness)을 도입하는 행위라는 문장도 선형적인 시간관과 피식민 국가를 '과거'로 타자화하려는 식민 담론의 시도와도 맞물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재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어떤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시간성이 교차하는(투사적 과거 projective past라는 개념도 책에 등장)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시대성'은 동시대가 뭔지 해명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또 언표의 현재라는 즉 무언가를 말하는 현재의 가능성을 바바는 지지하는 듯 보인다. 사실 어떤 문화에서도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연예인들이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있다. 일종의 규범화된 언표 체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체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언표의 역설적인 기능 같기도 하다.
모방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은 피식민자들이 맞닥뜨린 권력을 변주하고, 반복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인 것이고, 그래서 작지만 저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서사(narrative)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는데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에서는, 가시적인 서사(우리로 치면 단군 신화, 일제시대 피억압 서사)들이 일종의 응집력 있는 역사성으로서 동종적인 '민족'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내는데 이 서사가 은폐한, 주변화된(여성이나 노예 흑인 등) 존재들이 있다는 것, 서사 자체가 역사가 아니라 역사화된 것이라는 주장하는 듯하다.
"민족의 서사의 한계에 놓인 사람/인민들"(Having placed the people on the limit of the nation's narrative)은 "내가 지금 살펴보려는 민족적 문화의 이접적(disjunctive) 시간성에서 등장한 문화적 정체성 또는 정치적 연대의 형태는,"라고 바바는 쓰는데(그 악명 높은 8장 디세미-네이션) 민족 서사로는 품지 못하는 존재는 그런 서사의 시간성과는 다른 궤에 있는 이접적 시간성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좀 반직관적인데, 민족 문화의 시간성이 있다면 민족 문화가 자연화하지 않았던, 트러블을 일으키는 시간성을 가진 사람들의 등장(등장이라기 보다는 뒤늦은 주목)이-민족을 해체한다거나, 민족에 동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법과 질서의 이율배반 안에 주변성의 역사를 얽어 넣는다는 것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민족-인민(nation-people)의 사회적 상상계의 서사를 구축하려는 시도, 이 시도로서의 쓰기의 특정한 전통들이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의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바바의 문장은 '진정한' 과거를 상기시키려는 시도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듯하다.
9장(후기 식민 그리고 후기 근대)와 10장(빵 하나에 의해)도 흥미로운 부분인데 9장은 헤겔을 떠올리게 한다. '노예제'는 실천에서는 전혀 동종적이지 않고, 단일한 개념도 아니라는 문장을 인용한다. 다소 위험할 수 있지만 상상된 노예제와 실제의 노예제의 역동성은 같지 않다는 주장 같다. 당연히 다원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접근은 아니다. 10장은 인도 세포이 항쟁 때 인도인들의 빵 전달 행위를 다루는데, 외부자(식민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이 일으키는 트러블의 효과에 대해 서술하는데 식민 억압자들의 편집증적인 부분도 느껴지곤 했다.
그나마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주변화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이고 나머지는 비슷하지만 많이 반직관적이고 바바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평범한 이해와는 좀 다르다.
물론 바바의 글 전체적으로 오어법, 모방, 정체화, 의미화, 혼종성, 양가성, 차이화(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차이로 여겨지는 담론의 효과), 문화적 차이의 시간과 공간, 문화 번역의 효과, 쓰기의 가능성 등 쉽게 이해하기도, 정리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등장하지만, 예상했었지만 뚜렷한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다양성과 다원성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미리 주어진 개념을 수긍하지도 않으면서(푸코적인),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상호주체적인 관계성(호헤적이라는 뜻 아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해석하면서도(파농적) 모방과 글쓰기, 수행성과 차이, 반복에 대한 사유가(데리다, 그리고 사후적으로 버틀러) 비늘처럼 엮인다. 다르게 말하면,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이런 책이 그렇듯 푸코나 프레드릭 제임슨, 베네딕트 앤더슨,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들을 구체적으로 알 필요는 없다. (스피박과 버틀러에 대한 언급은 있는데 카메오 수준) 바바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읽으면 된다. 비판 지점도 이들은 한계가 있다 정도고 비판 방식은 전형적이다. 그런데 귀신과 같은 캐릭터가 등장하여 인식가능성과 시간성에 혼란을 야기하는 <빌러비드>, 식민주의에 논의를 진행하면서 저자도 또 이 작품이라고 이야기하는 <암흑의 핵심>, 작품의 구체적인 일화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악마의 시>정도는 읽어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Brot(독일어 빵의 영어 표현)과 pain(프랑스어 빵의 영어 표현)이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만, 의미화의 담론적, 문화적 양태가 서로 갈등한다고 저자도 쓰기도 했고 굳이 번역은 반역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문화 번역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매우 미묘한 경우 그냥 원어(안 좋아하는 표현이지만 그냥 씀)로 읽는 게 낫다고 본다. 그리고 내 아둔한 머리로는 호미 바바를 번역한 그 어떤 책도 읽을 수 없었다.(역자 잘못이라는 거 아님) 물론 아주 시간이 많이 필요하긴 하다. 불어도 종종 등장한다. 어쨌든 내 입장에선 지속적으로 음미할(그렇게 해야만 조금은 붙잡을 수 있는) 텍스트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번역이 불가능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의미, 의미화, 정체성, 정체화, 동일시 등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맥락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나도 읽으면서 오역스러운 부분, 그냥 넘어간 부분 많다.)
덧1) 개인적으로는 오어법이 등장한 부분에 관심이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이나 스피박의 논의를 생각하면(데리다는 몰라서, 미안), 오어법이라는 것은 문법적 오류가 당연히 아니고, 언어 규범을 넘어서려는 창조적인 시도로 보이기에, 개인의 수행적, 실천적, 실용적 측면에서 봤을 때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오어법은 호미 바바식 '모방'과도 연결지어 생각할 부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오어법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인식론적 저항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이해한 오어법으로 바바와 다른 저자의 오어법을 이해했기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서 '편견없는~' 어쩌고로 시작하는 유머들(언니 저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등)을 잘 살펴보면 오어법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오어법은 언어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거 같다. (예시적 정치라고, 바라는 정치적 아젠다가 이미 실현된 듯 산다는 개념에서 생각해 보면 일상 대화의 변화와 이 변화를 뒷받침하는 인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실천으로 보인다.)
덧2) 우리가 식민자까지 신경 써야 하냐는 류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신경은 우쭈주 해주자는 게 아니겠지만, 중대재해법 때문에 우리 죽어요 하는 원청을 이해할 필요가 있냐는 말처럼 느껴진다. 바바가 쓴 것처럼 주체와 대상이 정해진 게 아니고, 상호주체적인, 주체의 귀환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신유물론적으로 사물이나 객체의 행위성을 고려하는 마당을 생각하면, 그냥 그들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그들과 내가 상호연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고려하는 것이지 싶다. '맨박스'나 "트랜스혐오하는 페미니스트들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같은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쌉소리는 당연히 기각하지만 그런 주장과 억견들을 메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으니 권력자를 생각하는 것이 피곤하다는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비정치적이거나 반정치적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정체성 정치의 해악도 사실은 '우리'를 의문시하지 않는 것이 문제기도 하고. 이 책에서 호미 바바도 'we'에 대한 문제도 제기한다. 그림자와 빛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 매개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권력자와 식민자는 무시한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폐제된 것들을 생각하기 위해선 불편스럽지만 권력자를 심도 있게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