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틀릴 수 있음, 오류 있을 수 있음, 개인적인 잡감에 지나지 않음)
제목은 평이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영어본 제목도 '섹스할 권리'가 맞다. 그런데 이건 미국 맥락에서 다소 알려진 아티클을 제목으로 삼은 일종의 표제작(?)을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에서 딱 '섹스할 권리'라고 하니 감이 잡히지 않은 것 같다.
부제는 '21세기 페미니즘'이다. (이것 역시 평이하다)
참 문제적인 글이고 생각할 구절이 많은 책이다.
장(章) 마다 참 관점이 흥미로웠다. 나중에도 보기 위해 장마다 느낀 단상을 쓴다.
1장)
미투와 남성의 성폭력을 다룬 1장은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 갈색 피부 남성과 여성의 관점을 고려한다.
백인 여성에게 접근만 해도 린치를 당하던(당하는) 흑인 남성.
흑인 여성을 착취하는 흑인 남성.
페미니즘을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흑인 남성 등 복잡하지만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다.
성애화되는 갈색 피부(아시안과 아메리칸과는 또 다름)에 대한 이야기는
글로리아 안잘두아 《Boderlands》에서 그토록 제기했던 라틴계 남성의 가부장성과 성폭력과 공명하는 것 같다.
(라틴계에 대한 젠더 표현도 라티나, 라티노 보단 라틴X를 쓰는 것도 보긴 했지만)
중요한 논점은 처벌 혹은 법적 규정보다 더 적실한 무엇을 찾아내는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뭘까?)
이쯤에서 법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사 누스바움이 생각나는데
이 사람 책을 한 두 권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참 권력은 규제하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는 푸코의 이야기만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누스바움도 상상력을 언급하는데 좀 (인문) 고전적인 방향처럼 보였다)
2장)
주제는 포르노그래피다. 캐서린 맥키넌과 같은 규제적 관점이나
게일 루빈 같은 pro 섹스적인 관점이나
장애인-레즈비언 포르노를 비롯한 다른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다소 꿘(?)적인 긍정 보다는
욕망들에 대해 논한다.
사실 폰헙, 온리팬스가 만연한 지금의 포르노그래피 환경을 과거 성전쟁 시기(미국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대치하긴 어렵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규제는 다양한 성적 실천에 대한(사실은 이성애 섹스 말고 전부) 위협일 수밖에 없고,
취향을 규제하는 권력의 '정상성-세우기'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
성적 취향에 대한 위계는 게일 루빈이 언급한 적 있지만, 그런 것 자체가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다.
이런 규제에 당연히 반대하면서도, 지금과 같은 착취적인 방향의 이성애 포르노그래피(그리고 이것을 성교육의 교본으로 삼는 세대의 등장)를
다르게 수행할 수는 없을까라는 문제 의식엔 공감했다.
이성애 자체가 나쁜 걸까? 퀴어한 남성성과 퀴어한 여성성의 관계는 이성애일까?
물론 포르노그래피의 수행 자체가 공격인지 표현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법적 조치가 아닌 의미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말은 어렵지만 수긍할 만한 말로 읽힌다.
물론 2장은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에도,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도 조금은 미적지근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에 가까운 글이 아닌가 싶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현재 포르노그래피적 실천이 규범이 되고 그런 방식 자체가 기준이 되는 것에 당연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3장 ~ 4장)
3장은 일종의 표제작인데 그야말로 섹스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섹스할 권리'란 '왜 안 해줘?'의 점잖은 표현이다.
당신이 원한다고 해서 누가 자줘야 하나?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너 뭐 돼?)
이야기의 시작은 분노한 인셀남의 총기 테러 사건이다.
'섹스할 권리'라는 주제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확장한다.
즉 (그 안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장애인, 흑인, 비만인 등이 안 팔리고 이들을 꼴려하지 않는 것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들의 인기 없음 혹은 섹스하지 못함이 단순히 개인적 자원(외모, 자산, 매너, 능력) 때문일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저자는 말하는 듯 보인다.
(꼴려함, 좋아함, 섹스하고 싶음 등을 유사한 의미로 쓰는 점 양해바랍니다)
즉 분명 누구도 인셀남과 섹스할 의무가 없고, 인셀남은 그럴 권리가 없는 건 맞지만
섹스하지 못하고 섹슈얼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하고 싶고 그럴 의향이 있지만)을 단지 안 팔랄리는 개인을 이유로 삼아야만 할까?
기존의 성적 위계를 뒤집을 뿐 아니라 재의미화하는 것.
욕망을 자연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화된 것으로 간주할 순 없을까?
정신분석적인 용어지만 '페티시'라는 표현도 이 부분에서 고민할 용어이다.
이 안에 이미 섹슈얼리티의 위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페티시라는 표현은 전체가 아닌 부분에 대한 선호라는 개념이 담겨있긴 하다)
지체 장애인(주로 신체 절단)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을 '디보티즘(Devoteeism)'
주로 아시안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옐로우 피버(yellow fever)'같은 개념도 이런 성적 욕망 자체의 특이성을 위계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계를 문제 삼은 게일 루빈의 견해에 공감하지만(게일 루빈의 <일탈> 참고)
선호 자체를 그저 다양할 수 있다는 상대주의로만 이해하는 것에는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게일 루빈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미국 맥락에서 갈색 피부 남성보단 백인 남성을 선호하는 갈색 피부를 가진 여성이 있다면,
여성과 섹스하는 여성인데 트랜스여성과 섹스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어떤 트랜스여성과 섹스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트랜스여성 자체와 섹스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트랜스여성 자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상대주의적으로 이들을 순전한 선호를 가진 것으로, 이런 선호를 선천적인 선호로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갈색 피부를 가진 이성애자 한국인 여성이 한국에서 살았다면, 갈색 피부를 가진 남성들 중에서 상대를 고를거라 생각하면 과도할까?)
참고로, 안드레아 롱 추는 <Wanting Bad Things>에서 마이너리티들이 나쁜 것을 원할 수 있어야 함을 그들이라고 딱히 윤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말하며 스리니바산의 글에 반박한다. 음침한 도덕주의-a kind of moralism that can be really insidious-라고 하면서.
(뚱뚱한 여성은 뚱뚱한 남성을 거부하면 왜 안 되나? 가능성을 축소하는 소수자를 향한 도덕주의)
5장)
5장은 아비탈 로넬과 제인 갤럽을 바로 언급하는 대학 교수와 제자의 섹슈얼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리사 두건은 <완전한 재앙>이라는 글을 통해, 아비탈 로넬의 경우와 그를 옹호하는 편지를 쓴 교수들, 학내 성폭력 처리의 비밀 엄수 등을 같이 다룬다.)
현실에선 성직자, 코치, 감독, 교수 등 가르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제자와 섹슈얼한 관계를 맺는다.
이 장에서 하는 말은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이 제자라는 사람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이를 오인하거나, 착각의 유혹에 빠지는 선생들(대학 교수)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은 글이다.
교수와 제자의 관계에서 강간인지 아닌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은 차별이라는 것이다.
설령 완전한 합의(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가 성립했고, 제자가 원했다고 해도
교수나 선생이 그것을 수용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는 것이다.
(주로) 여제자의 행위 역량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높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제자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교수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소수자가 교수의 위치에 있다면 조금 더 상황은 복잡해지만
(그들의 플러팅이나 섹슈얼리티 실천 자체가 문제시될 상황이 생길 수 있으므로)
교수와 제자의 섹스 '금지'는 제도화거나 관료화된 금지라기 보다는
윤리적인 전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6장)
이 장은 투옥주의와 폐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일반적인 견해들을 다룬다.
성매매를 범죄화 해야 할 것인가?(그렇다면 취약한 성판매 여성은 더 취약해진다)
비범죄화 해야 할 것인가?(그렇다면 무엇이 개선되는가?)
이 지점에서 대량 투옥에 대한 미국 내 (현재도 반복하는) 역사를 되돌아볼만 한데
유색인종의 과잉 투옥(앤젤라 데이비스)과 미국 내 일본계를 향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도 떠오르게 한다.
제도의 확립과 폐지는 중요한 주제지만 그것 이상의 그것이 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듯하다.
국가에 결정권을 위임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취지는 주디스 버틀러가 떠오르는데
국가란 자연적이고 중립적인 기관이 아니고, 박탈하는 권력 행사 기관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강간범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한국 맥락에서는 제대로된 처벌이 아니라 처벌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부분은 논쟁적일 수 있지만 저자는 법적 처벌이 아닌, 인민들이 다른 관계맺기를 수행하도록 요청하는 것 같다.
<다 읽은 감상>
이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텍스트였는데, 저자의 논지는 설득력이 있지만 때론 나이브하게 느껴지기도 해서이다. 교과서적인, 어쩌면 아주 논리적일 수 있는 주장들(욕망에 대한 부분)이 주는 묘한 딱딱함 혹은 불편감도 있었다. 저자의 견해에 반박하며, 나쁜 욕망을 수용하려는 안드레아 롱 추의 이야기에도 공감한다.
(안드레아 롱 추는 외로움이나 관계에 대한 조언-성적 욕망의 측면-은 <섹스할 권리>보다 코스모폴리탄 잡지가 더 낫다고. 실용적인 영역-'practical terrain'-에서 그렇다고도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은 다소 정통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만큼 현재 관점에서 보수적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보수 우파들의 도그마를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퀴어에 대한 라이브러리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면에서 그렇다(일부러 선택적인 활용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지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며 인도의 사례를 들며 인종의 복잡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다른 페미니즘 서적과는 다른 결의 레이어를 제공해 준다(저자의 인종이나 과거를 현재의 작업과 조건 반사적으로 연결 짓는 것은 많은 동양계-옥타비아 버틀러를 비롯한 유색인도- 저자들에게 떠도는 유령 같은 언급일 것이다. 비록 칭찬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좀 다른 맥락이지만, 한국에서 여성 징집 이야기를 할 때 드는 생각은 한국 남성들이란 남성 징집 문제만 해소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란 군입대라는 것.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치워버릴 문제 몇 개만 해결하면 편안해질 기득권 혹은 자원이 많은 사람들이 다수 나온다(당연히 여성도 포함이다). 교차성이라고 언급하기엔 무딘, 상황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발언들과 주장들은 매 순간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지만, 현실의 복잡함을 고려할 때 아주 유의미한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