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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젠더 관계로 세상을 본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인식의 틀로서의 젠더는 획기적이고 유용하다. 그렇지만 젠더 관계가 사회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 환원론(젠더 본질주의)을 피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차별을 당하는 것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라는 발화가 가능하다. 순전히 여성인 인간은 없다. 인종, 계급, 성별 등 중층적 정체성이 한 인간을 구성한다. 허나 같은 논리로, 남성역시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은 정합성을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전쟁 강간은 '남성 연대'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여성은 2등 시민으로서 사회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남성을 통해야 한다"와 같은 언술은 자가당착이다. 남성은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남성은 "사적인 영역의 공적 침입을 막고" "사적인 영역에 여성을 가두는" 그리고 "전쟁을 벌이고"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전제하는" 동질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남성성'을 가진 동질적인 이들의 집합인 '남성 연대'가 전쟁도 벌이고 여자도 죽이고 가정 폭력도 벌인다고 말하는 셈이다.(슈퍼빌런?) 성판매 여성조차 '남성 연대' 혹은 가부장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은 실로 실소가 나온다. "명령한 자는 명령한 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한 자는 실행 자의 책임이 있다"라는 글이 이 책에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성판매 여성의 책임은 나오지 않는다. 즉, 자신이 비판하는 젠더 본질주의에 다가가고 있다. 남성은 '몸' 여성은 '성'으로 소비하는 것이 가부장제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성 판매 여성'을 만들었다는 말까지 수긍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강력한 가부장제 안에서 '성 판매 여성'이 되지 않은 여성은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일까? 같은 빈곤계층(혹은 기회 박탈 계층) 안에서 누군 '성 판매'를 하고 누군가는 하지 않고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성끼리의 질적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비해 크다고는 말하지만 정작 성판매 여성에 대해 말할 때는 이런 논의는 실종된다.
꽃뱀-무고죄에 대한 이야기 또한 이와 유사하다. 무고죄를 주장하는 남성에게는 재판이나 조사 과정에서의 안전할 권리 즉 절차적 권리로서의 인권만 인정한다. 반면 가부장 사회에서 스스로 욕먹을 각오하고 문제 삼는 여성에겐 인권이 더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인식론적 특권'을 가졌다고 우위의 인권을 가져야 하는가? (물론 본인은 남성의 인권을 제한하자는 것은 아니라 강변한다) 더군다나 무고죄는 남성의 억압이며 이는 어차피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고 그 수가 소수이기 때문에 놔둬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그럼 수가 적거나 놔둬도 괜찮으면 조치를 취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억압이기 때문에? 실제로 무고를 당했다면 어차피 나라가 알아서 해줄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걸까? 이 지점에선 애매모호한 말로 빠져나간다.
그뿐만 아니다. 군대에 대한 내용은 너무나 오류가 많아 실로 취재를 한 것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군대는 안 갈 수 있다면 가지 마라", "병사의 주적은 간부다"라는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는 소개조차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군대는 '남성 연대'이고, '초 남성성'을 키워야 할 동질적인 존재로 전제되어야 하니까. 남성은 그저 군대를 가고 특권을 얻으며 군대에 오지 않은(가지 못하는) 이들을 타자화하는 존재로만 소개된다. 군대 가면 사람 된다는 말은 군대에 갔다 와야 시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제를 체화한 장기말이 된다는 이야기다. 남성들은 이를 거부하기도 한다. 더욱 급진적인 남성은 군대 대신 감옥에도 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처벌이 두려워 입영한다. 남성의 목소리도 이렇게 다르다. 이는 병역면탈 브로커의 존재와 각종 병역면제 비리, 기피, 양심적 병역거부 등 다양한 방식의 탈병역 남성이 있다는 것 만으로 알 수 있다. 군대가 1등 시민을 길러내고 이 사회의 만능키라면 피할 이유가 없다.
또한, 남성이 벌인 전쟁으로 여성이 피해를 입는다고 한다. 하지만 '남성들의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남성'이다. (애초에 '남성-만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성립 가능한가?) 군사주의는 여성의 보살핌 노동으로 유지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반쪽자리 진술이다. 남성만 징병하고 전장과 사지로 몰아넣는 이 물리적 공방의 세계에서 여성이 보살핌 노동을 해왔던 것이다. 전쟁이란 효율을 극단으로 높이는 자가 승리하는 것인데 물리적-자연적 신체의 우위는 남성들의 몫이었다.(생물학적 환원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여성의 역할 배제는 사회의 선택과 효율성을 위한 선택의 중첩이다. 이걸 '남성'의 의도적 선택이라고 혹은 남성 이데올로기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다른 목소리를 말하는 소박한 견해를 담았다는 초입과 남성을 절대화된 악 혹은 선형적인 세력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본문은 배치된다. 그럼에도 젠더 관계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예리하다. 그래서 읽어볼 만하다. 딱 한 번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