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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이론 -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 ㅣ 앳(at) 시리즈 6
로런 포니에 지음, 양효실 외 옮김 / 마티 / 2025년 4월
평점 :
이 책은 아주 흥미롭다. 자기이론을 옹호하는 단순한 책은 아니다. 자기이론을 신체화한 텍스트(문학, 에세이, 미술 작업 등)를 살펴보며 자기이론의 안과 밖에 있는 지점들을 연결한다. 처음에는 자기이론을 신체화(embodiment)하는 작업들. 메스티자 인식론을 주장한 글로리아 안잘두아처럼 지역적, 상황적 경험의 아카이브에서 나온 자기이론들을 살펴본다. '아이러브딕', '아르고호의 선원들'이 주로 언급된다. 상호텍스트적 친밀성도 인용의 전략이 불러오는 효과도 언급하는데 흥미롭다.
자기 경험을 해석할 이론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혹할 이야기가 많다. 다만 나는 무엇이 '이론'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회고록과 포스트회고록, 픽션과 오토픽션을 구분하는 방식도 내게는 분명하지 않다. 레슬리 파인버그의 '스톤 부치 블루스'는 자기이론일까? '스톤 부치 블루스'와 상호 텍스성이 있는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은 자기이론일까? 오드리 로드의 '자미'가 어떤 이론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했다. 이론과 이론 아닌 것의 차이, 이론이 필요한 이유를 아직은 분명하게 납득하지 못했다. 내게 이론은 알튀세르나 마르크스가 말하는 빡빡한 이야기들로만 보인다. 라캉의 이론과 벨 훅스의 자기 이야기는 둘 다 '이론' 인가? 나는 답을 내리기 어렵다. 과문한 탓이다.
이론을 인식 혹은 관점으로 바꿔 쓸 수 있다면 조금은 이해 가능하다. '내 등이라 불리는 다리'라는 고전을 프로세싱 한 예술에서, 프란츠 파농의 책 표지를 다르게 드로잉 한 작품에서 인식을 신체화하고 공간화하는 예술가들의 의지가 보였다.
읽다 보니, '이런 책'을 발견하고 번역해 출간한 출판사에 먼저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페미니즘, 퀴어, 예술 담론에 꽤나 익숙해야 충실한 번역이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옮긴이 주석도 유용했지만, 기존 주석의 서지 사항이나 레퍼런스도 잘 정리했다(왜 어떤 역서에는 한국어 번역본에 대한 서지 사항에 누락되어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서지 사항을 기록하는데 돈이 드나? 아니면 어차피 나 같은 사람만 본다는 걸 아는 걸까?). 출판 번역 서지 사항 뿐 아니라 블로그 번역본인 리타(이연숙)의 번역도 주석에 써놓았다(아비탈 로넬을 옹호하는 리사 더건의 글을 번역한 블로그 글).
물론 나는 재밌게 읽었다. 맥락을 웬만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와 일군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아비탈 로넬 옹호한 사건이나 리오 벌사니와 리 에델만의 퀴어 부정성 등등은 나도 관심이 있는 이슈이자 주제였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권 예술가의 당사자성 있는 이야기들은 내가 들을 수 없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같은' 판 안에서 '동지'에 더 적대적인 경우도 보였다. '레즈비언'이라는 용어가 죽게 되는 상황이나 같은 '퀴어'라는 말이 도저히 불가능한 세대간 차이도 보였다(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서술은 너무나 버틀러적으로 아름다웠다).
이 책은 물질성, 신체성, 장소성을 고려하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많이 분석한다. 이들의 '특수성'이 백인 남성 예술가들의 '이론'과 불화하면서도 이 '이론'을 갱신하고 생명을 연장시킨다. 여전히 이론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고 감이 잡히지 않지만, 물질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장소 특정적이고 맥락 의존적이고 지역의 유산이나 내가 살아온 삶의 아카이브를 신체화하는 작업들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이 모든 더미들을 살펴본 나는 그러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 더 고심하게 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일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민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는 점이 내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