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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 어느 시골 의사와 환자 이야기
폴리 몰랜드 지음, 이다희 옮김, 리처드 베이커 사진 / 바다출판사 / 2024년 5월
평점 :
2024년 한국은 의료 대란의 조짐이 보인다.
전공의 없이 맞이하는 추석 연휴는 어떻게 될까.
의료인의 의료윤리와 경제적 욕망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기에
영국의 한 골짜기에서 마을 주민들을 진료하는 일반의(GP)를 조망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분명한 레퍼런스가 있다. 역시 영국의 작가 존 버거의 《행운아》다. 존 버거가 쓰고 장 모르가 찍은 사진이 있는 책이다. 책장 뒤편에 쓰러져 있는 《행운아》를 발견한 일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렇게 발견한 책을 훑어보는 데 배경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책에는 '존 사샬'로 불리는 일반의가 마을 사람들을 진료한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 활동하는 '후임' 의사를 찾아보고 연락하고 관찰을 시작한다.
의사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의사'다. 의사의 성별은 여성이다. 존 버거의 《행운아》의 영어본 제목이 《Fortunate Man》인데 그래서《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의 영어본 제목은 《Fortunate Woman》이다. 존 버거 책의 제목이 '행운아' 혹은 '행운남'이라면 이 책은 '행운녀'에 가깝다. 나는 Fortunate가 아니라 Lucky일까 생각했는데 Fortunate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의사'는 다양한 사람을 오래, 깊게 아는 행운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 앎이라는 자산(fortune)을 가진 사람이면서 그런 운명(역시 fortune)을 받아들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의사를 관찰한다. 의사가 만난 사람, 의사가 하는 진료, 의사가 사는 방식. 골짜기 마을과 자연과 사람들과 얽혀있는 의사의 삶은 의사를 직업 아니라 배역처럼 보이게 했다. 의사는 20년 넘게 한 지역에서 일반의로 일하며 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배경과 역사를 알면서 진료했다. 그래서 다른 진료가 가능했다. 당연히 새벽에 찾아오거나 길에서 마주쳐 의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적인 노동관으로는 혹은 경제관으로는 '민폐'거나 '부불노동'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의사가 자신과 얽히는 모든 이야기들 역시 자신의 일이자 혹은 자신의 관계 맺음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람을 알아서 더 정확하고 필요한 처치를 할 수 있었다. 의사들이 낙도에서 일하면 수억짜리 연봉을 준다는 자리를 마다한다는 기사에 나는 납득했다. 24시간 근무라고 할 수 있는 온콜은 상상도 괴롭다. 그래서 나는 수입 보다 관계의 질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사실상 마지막 세대의 의사를 관찰하는 글로 이 책을 읽었다. 의료 수가 문제와 전공의 복귀 기사들에서 공권력도 어찌할 수 없는 합리적인 플레이어인 의사들이 보였다. '비합리적인' 일반의와 합리적인 의사들. 나는 어느 쪽이 옳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관계의 축소가 유일한 안전법이라는 사실을 느낄 뿐이다. 의료인들은 소송 이슈를 두려워하고 실제로 소송을 당한다. 그들이 전문직이고 고소득자지만 일상을 침해받기 보다 관계를 축소하는 일을 합리적으로 보는 이유다.
그래서 마음 품이 넉넉한 의사가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또는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의사 몫 이상을 할 수 없었던 모습 같은 다채로운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휴머니즘이라고 해야 할까.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었고 본 '의사'는 마을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았다. 이사가고 이사오거나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전세대란으로 드나듬이 잦은 곳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정주하는 마을이라 가능한 이야기기도 하다.
영국 언론에서는 GP를 만나려면 오래 대기해야 한다고 한다. NHS 데이터가 그렇단다. 20명 중 한 명은 최대 4주는 기다려야 한다고 영국 언론 가디언 기사 제목은 말한다. '더 좋은 서비스를 받으려면 더 지불해야 한다'는 경제적인 말을 수긍해야 할까?(영국 GP는 무료다.) 사실 얽혀있는 관계에서 사람을 아는 일은 경제적으로 이득인 일은 아니다. 질적 측면을 안다는 기쁨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데이터화할 수 없는 몸에 새겨지는 일이다. 그런 기쁨을 강제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는 팬데믹 이후 의료 현실에서 이 책의 관계 맺음을 흘러간 옛이야기로만 이해하며 휴머니즘에 젖으면 되는 일일까? 나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울퉁불퉁한 관계 맺음을 생각했다. 기쁠때도 슬플때도 아플때도 있지만 관계 안에 있어서 가능한 감정들을 배우는 일이 나는 좋았는데 의료인들에게 바라긴 미안한 노릇이다. 물론 3분 진료와 비급여 치료 권유는 머리로만 납득한다. 어쨌든 이 책은 관계를 삶의 키워드로 생각하는 일반의 이야기지만 나는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맺음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으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