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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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인간이 마치, 진공에 사는 듯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식물과 동물 혹은 돌과 기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이 인간 없이 사는 듯 이야기를 한다."(2011년 인터뷰 중 애나 칭의 발언)


이 책의 주장은 간결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는 사례들은 다소 지엽적이다. 사실, 이런 지엽성은 정보 제공의 목적보다는, 성실한 인류학자로서 애나 칭이 관찰하고, 경험하고, 발견한 것들을 번역한 것이기에 납득 가능하다.


일단 이 책에 나오는 버섯은 송이버섯이다. 한국에 있는 양송이버섯과 새송이버섯과는 속(Genus, 屬)부터 다르다. 그리고 송이버섯의 '송'은 소나무 송(松)을 쓴다. 한국적 맥락에서 보아도, 소나무와의 관계가 드러난다. 송이버섯의 역사를 그려내는 이 책은, 송이버섯이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맥락들 그리고 비결정적인 순간들에 주목한다.


송이버섯 자체는 혼자서 성장할 수 없고, 소나무와 같은 숙주 나무가 필요한데 숙주와 연결되는 방식뿐 아니라, 토양의 상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송이버섯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과학적으로' 추적하긴 어렵다. 송이버섯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다중적인 마찰들, 의도치 않은 행위들, 개입들은 우리에게 어떤 앎을 제공할까?


먼저, 자본주의와 주변자본주의를 생각하게 한다. 자본주의의 회로에선 채집과 선별, 가공 그리고 판매의 과정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송이버섯의 생성 과정에는 자본화(상품화) 과정에서 빗겨난 비인간 행위자들의 협력과 경쟁 과정뿐 아니라, 이윤 동기와 함께하는 개인적 가치와 개인적 동기와 같은 자본주의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 맥락들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과정을 '상품화'를 통해 자본화하는데(마크르스적으로 말하면 착취하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구제 축적'을 초과하는 이야기들과 역사들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불안전성(precarity)-달리 번역하자면 비결정성과 위태로움-은 송이버섯이 연결시켜주는 레이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단일한 결과를 향한 과정을 말하는 진보 서사, 자연을 사람이 살지 않는 태곳적인 장소거나 자연 자원을 착취하는 선주민이 산다는 식으로만 보려는 제국주의적 서사로는 담지 못하는 측면을 버섯의 레이어들은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이 애나 칭의 이전 저작과는 좀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전 저작들에 비해 다중의 지역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여왕의 영역에서》나 《마찰》은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의 칼리만탄의 메라투스 다약 지역에서 수행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하나의 지역에(정확하게 표현하면 차이가 있는 여러 구역이 있는 지방에) 글로벌 자본주의가 이미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류학 서술이었다면, 이 책은 다양한 지역의 송이버섯 공급망과 그곳에 접속한 인간 행위자들과 비인간 행위자들을 등장시켜-마치 해러웨이의 장황한 SF적 글쓰기처럼- 이들간의 복잡한 관계 맺음을 보여준다.


《마찰》에서는 숲을 이해하는 거주민들의 방식과 숲을 지도로 표현하여 이해하려는 외부자들의 방식(제임스 스콧 식으로 말하면 '가독성'). 글로벌(미국) 환경주의의 영향을 받은 환경주의자들과 목재 기업들과 화전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거주민들의 경합하는 관계성이 잘 드러났다면, 이 책은 송이버섯이라는 식물도 동물도 아닌 지위의 비인간 행위자에 좀 더 집중한 모습이었다. (이 역시 해러웨이의 다소간의 변모가 떠오르는데, Gender라는 어휘의 번역 가능성을 고민하던 입장에서 촉수적인 사고와 쑬루세를 이야기하는 -물론 변모라고 표현한 전후가 상이하다는 것은 아님-모습이 떠오른다)


이 책이 주는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폐허에서 사는 것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가능성들이 잠재해 있다고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상된 행성 안에서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 송이버섯이 자랄 수 있게 만든 목재 시장의 침체. 우리가 끝이라고,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인간 행위자가 고려하지 못하고, 고려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송이버섯처럼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가능성 앞에서 절망의 확신은 섣부른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살만한 삶, 거주가능한 지구의 가능성은 좁아지고 있다지만, 이 좁은 영역에서도 아직은 결정되지 않고, 불안정하지만, 불쑥 튀어나와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자신을 선보이는 이 가능성들을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과 동시에, 인간에겐 치명적이지만 다른 비인간 행위자들에겐 치명적이지 않은, 혹은 모두가 치명적인, 혹은 알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인간종으로서의 불안도 품게한다.



P.S 번역 작업은 아주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문한 제가 읽어본 바로는, 애나 칭은 자신만의 독특한 어휘법를 자주 사용합니다. 기존의 용법과 좀 안 맞거나 어색한 표현을 쓰는데,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이 책은 과학적 혹은 식물학적 개념, 일본어 서적 혹은 인명 등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도 등장하기에 번역이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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