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아우또노미아총서 80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갈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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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나 '존재론적 안무ontological choreography'(스스로 만든 말은 아님), '반려종, '사이보그' 등 새로운 어휘를 사용하는 독창적인 SF적(Science Fiction뿐 아니라 speculative fabulation, string figure, speculative feminism의 두음) 작가다.


값진 논의를 하는 책이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해러웨이는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확증편향의 논리를 선호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런 이해 또한 해러웨이가 반기는 반응이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자신의 반려견들과의 세속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반려종'으로서의 견해를 피력한다. 물질-기호적 세계에서 이미 얽혀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중 인간은(비인간 동물과 동등하지도 않고, 동등할 수 없는 위치성을 가진 존재로서) 비인간 동물에게 응답하고 돌봄을 수행할 의무가 있고, 이런 돌봄과 응답의 의무를 지식과 연결하여 세상을 좀 더 비인간 동물이 고통을 겪지 않고 더 잘 살 수 있는(Livable life) 상황을 만들자고 이야기하는듯 하다. 물론,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이 깔끔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작용(캐런 바라드의 용어)하는 관계 중 서로를 형성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2부는 일종의 스포츠 기자 출신이자 장애를 가진, 해러웨이적으로 표현하면 휠체어와 목발과 연결된 사이보그적인 존재인 아버지에게 바치는 오비추어리처럼 느껴졌다. 경계적인 접촉지대에서 만들어지는 지식과 인식(어질리티의 접촉지대가 촉발한 사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샌드라 하딩의 입장론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의뭉스럽게 회피하는 해러웨이가 사실은 맑스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스러웠던 과거 면모를 언뜻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3부는 종의 얽힘과 테크노사이언스 기술들을 연결한다. 동물 몸에 부착하는 캠을 통해 동물의 시선에 우회적으로 접근한다거나, 치킨과 산업적인 네트워크들, 자신이 적을 둔 UCSC(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교수진들의 식사에 얽힌 복잡다단한 입장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무리한다. 


책의 내용은 딱히 흠잡을 데 없고, 해러웨이의 뛰어난 인식론(상대주의를 주장하지 않음)과 놀이에 가까운 사유 과정을 보여준다. 번역도 공들여 했다고 생각한다. 존재론적 안무에 함께하는 댄서로서 반려종과 함께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어질리티 스포츠 참여 경험에서 반려종 개와 소통하고 놀고 불통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유익했다.


다만, 내가 이 책에 갸웃했던 이유는, 해러웨이의 견해엔 여전히 충만한 인간 중심성이 놓여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해러웨이는 동물권 논의와 육식에 대해 미리 결정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이야기는 도덕적 상대주의로 현 상황을 옹호하거나 방관하자는 것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들이 노동을 하기에, 그들이 단지 대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별의 '세속적' 상황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무료급식에 육식이 나올 때, 대체 채식 제공이 충분히 가능한 경제적 여건에 지역에 사는 사람 등 상황적인 측면은 다양하다). 나는 이런 부분도 수긍했다. 하지만, 동물들에게 인간이 없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것은 엮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방식으로 엮일 수는 없을까란 질문이다.


동물을 자연에 방목하자는 루소(?)적 견해를 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과 불화하는 동물. 반려종이길 거부하는 '반려종'을 고려할 수는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인류학자 라디카 고빈다라잔(Radhika Govindarajan)은 《동물 친밀성》(Animal Intimacies)에서 인간의 우리를 도망친 돼지, 그 후에 민가를 습격한 (구)가축 돼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길거리 동물, 소문이긴 하지만 곰과 교접하는 여성 등 동물과의 섹슈얼리티 관계에 대한 해석 등 동물들의 다양한 행위성('반사회적'으로 읽히는)을 논한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본 책에는 부재한듯하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마치 동물의 섹슈얼리티는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혹은 동물과 동물끼리의 섹슈얼리티만 상상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인간이 '인간'이라는 대분류로 묶기가 어렵듯 동물 역시도 아주 다양한 층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과 다른 책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 카옌과 키스를 통한 타액의 얽힘과 과학적 층위에서의 상호엮임을 논하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아니다. 


또한, '반려종'이라는 표현과 어질리티 '스포츠'도 다분히 인간적인 어법이다. 인간이 없다면 동물들이(데리다는 동물말-animot-이라는 표현으로 '동물들'의 복수성을 단수형으로 표현하고자 했음. 데리다의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참고 ) 어질리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해러웨이는 강아지들이 어질리티를 좋아한다고 즐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난 아직도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다분히 가축화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이 관계가 돌봄 의무에 응답하는 중산층 반려종이 있는 관계라고 해도 그렇다. 집에 있는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domestic not domesticated) 동물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다.


해러웨이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동물들의 아나키적 가능성을 논하는 책은 Jack Halberstam(잭 핼버스탬)의 《Wild Things》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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