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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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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에 출간 예정인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 출간 전 원고를 통해 이야기를 좀더 빨리 만날 수 있었다. 그 느낌이란, 실로 감동적이었다. 물론 전에 쓴 <심청>처럼 한 여인의 곡조많은 삶을 매력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마디로 한번 잡으면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약한 자의 삶을, 또한 약한 자가 일어서려는 모습을 참으로 감동적으로 잘 그려내는 듯. 거짓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그 속에는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삶이 자리하기도 하며, 때로는 우리를 대신해서 인물이 꿈을 따러 떠난다. 입맛 당기는 이야기로. 그 실체는 맛을 느끼기엔 씁쓸하지만, 꼭 맛보아야 한다. 쓴게 몸에 이롭다고 하듯, 황석영 작가의 글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롭다.)  

 

"이 집처럼 모두 사이좋게 살면 안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왜 국경 같은 걸 만들었을까?"

 

바리데기를 읽는 동안, 참말로 고운 바리데기의 심성을 보면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나는 따라잡지 못할 선녀같은 마음. 하지만 이런 바리데기의 마음이 하나 둘 모인다면, 세상은 고요해질테지. 서서히.

 

"세상을 구해낼 생명의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걸 얻을 수만 있다면......"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 내가 바리를 통해 느낀 것들이 함축된 대사이다.)

 

바리데기는 이미 우리가 설화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속의 효녀이다. 그런 바리데기가 오늘 날 황석영 작가를 만나면서 탈북소녀로 위치가 바뀌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생명수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며, 누가 가져올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생명수는 있을까? 온갖 고생 후에 생명수를 달랬더니, 장승이가 했다던 말, '우리 늘 밥해 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 약수다.' 그러자 바리가 '헛고생한 거라?' 하니까 할머니가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렇다. 생명수는 서천 서역국 시약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꾸 그 생명수에 욕심과 이기로 물든 온갖 구정물을 타서 오염시킨 결과, 우리가 쉽게 발견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순수한 본연의 욕심없는 마음으로 돌아선다면 생명수를 찾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은 딸부잣집인 바리네의 집안 역사를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바리는 그 중 일곱번째 태어난 딸로, 또 딸이 태어나자 겁먹은 엄마로 부터 버려지게 된다. 이때 다행이도 개 흰둥이가 바리를 물고 집으로 온다. 그렇게 버려졌다해서 바리데기, 바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바리는 죽은 자를 보는 눈과 말 못하는 짐승의 마음을 헤아리는 눈을 갖게 되고, 말 못하는 언니의 심중도 헤아릴 줄 알게 된다. 이러한 바리의 영험한 능력을 눈치 챈 할머니 역시 무당 집안의 씨를 타고 났다.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살 때는 말 그대로 행복한 집이었던 딸부잣집 바리네. 이후 바리네는 점점 기근으로 힘들어져 가는 북한의 상황 속에서 가족끼리 이별을 하게 되고, 이때 바리는 현이와 할머니와 함께 두만강변을 건너서 중국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불법거주자 단속 때문에 산 속으로 숨어들어가 집을 짓고 살면서 처음에는 현이를,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처음에는 충족으로 채워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한번에 와르르 무너져 부재와 결핍으로 바리를 에워싼다. 이 속에서 바리는 외롭다. 이때 흰둥이의 몸에서 일곱째 딸로 태어난 강아지 칠성이가 다시 두만강을 건너 부모를 찾으려는 바라의 뒤를 따른다. 그러나 칠성이 역시 멧돼지의 습격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된 바리.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늘 도움을 주는 미꾸리 아저씨를 만나 안마업소에 취업을 하게 된다. 이때 발마사지 하는 법도 배우게 되고, 안마소를 차린 샹언니 부부와 같이 일도 하게 되지만, 불행은 금세 또 바리를 찾아와서 바리의 삶을 뒤 흔든다. 그렇게 빛을 안고 런던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놓게 된 바리는 인간의 인격을 무시당한 채 온갖 괴로움을 겪으며 간신히 숨을 쉰다. 그 후 런던에서 몸을 파는 곳으로 갈 뻔 하였으나 아직은 어린 몸이라 중국집 종업원으로 가게 되고, 여기서 인정있는 사장을 만나 발마시지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 후 남편 알리도 만나고, 세상을 조금씩 알아간다. 이때 바리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우울한 일들 뿐이다. 불법체류자로 숨어야 하는 삶,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소중한 존재를 잃게 되고...서로 싸우면서 죽이고 또 싸우는 모습 등. 세상은 안정은 뒤로 한 채 불안정의 혼돈 속에서 자꾸 기우뚱 거릴 뿐이다. 그래서 그 위에 서 있는 우리는 마치 과속으로 휘청거리는 위험천만한 버스에 탄 승객마냥 불안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바리는 꿈을 통해 저 세상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현실 속의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발마사지를 할 때 그 사람의 발만 잡아도 그 사람의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바리는 무속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영험함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바리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수를 찾아 떠나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현대적 굿처럼 느껴진다.

 

황석영의 심청은 강한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뒤에는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바리는 심성이 고우며 영혼이 맑은 여인이다. 그러나 바리는 심청처럼 매력적인 몸을 타고 나지 않았다. 가진 것도 많지 않다. 이제 겨우 빚을 갚고 삶을 일으켜 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숨어 살아야 하는 불법 체류자의 삶 속에서는 결핍된 것들이 더 많았고, 이 속에서 빛나는 건 오직 그녀의 영험한 능력과 모든 것을 헤아려 볼 줄 아는 착한 마음씨였다. 

그러고 보니 심청과 바리데기는 효녀였다. 그러나 이들이 걷는 길은 가족이라는 범위를 뛰어넘어 인류를 보듬고 있다. 한마디로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리가 오늘 날, 우리에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바리가 바라는 건 자신만을 위한 거대한 꿈도 아니고, 오직 세상을 구원할 생명수 였다. 물론 생명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너와 내가 좀더 경계없이 하나로 손을 잡는다면 생명수는 존재를 드러낼 것이 분명하다. 또한 누군가 대신 찾아주길 바라기 보다는 너와 내가 같이 찾아야 더 생명수의 영험함을 드러낼 것이다.

 

아무리 지구촌이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외친들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너와 나의 대립과 이기, 경계는 영원할 것 같은 지구를 전쟁으로 소멸 시킬줄도 모른다. 똑같은 생명을 갖고 숨을 쉬고 있는 우리가 왜 약한 자와 강한 자로 나뉘어야 하며, 왜 너는 살고 나는 죽냐며 분함을 호소하고, 왜 끊임없이 너와 나의 다름을, 합쳐질 수 없음을 보며 살아가야 하는 지, 막막할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날카롭게 선 날로 상대를 찌르는 폭력만은 근절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인종 속에서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아래 다채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다른 인종이기에, 종교가 다르기에, 성별이 달라서, 가난하기에 핍박받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하루를 지옥처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을 약자라고 하기도 하고, 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바리데기는 글을 읽다보면 알겠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만 한정되지 않고 먼 런던까지 영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인간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한국문학이라는 굴레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세계를 끌어안으면서 그 곳에 존재하는 문제가 세계인의 피부에 직접 닿도록 만든다. 그것이 바로 황석영 작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우리가 마음 속 욕심의 무게를 덜어내고 이해를 넓혀가면, 이룰 수 있는 일.

마치 작가가 바리도 생명수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바리를 알게 된 여러분들도 생명수를 찾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부탁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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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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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든 상황이든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변화가 찾아온다."

 

리진......

 

삶은 언제나 당연하게 미래를 향해 흘러간다. 과거로 역행하는 삶은 없다. 그런 삶 속에는 언제나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선택은 때론 행복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뼈에 사무치는 후회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리진은 조선의 궁녀로 프랑스 외교관 콜랭의 연인이 되어 프랑스에 가서 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유산의 슬픔도 겪게 되고, 그렇게 타국에서 마음의 상처는 점점 커져만 간다. 이후에는 그녀가 몽유병에 시달리자 콜랭이 그녀를 위해 휴가를 얻어 조선으로 함께 돌아간다. 나중에 리진을 은애한 홍종우의 상소로 결혼은 하지 못했던 리진은 조선의 궁녀로 조선에 남게 되지만, 이때 리진도 콜랭을 따라 다시 프랑스로 갈 생각은 없었다. 결국 콜랭 혼자 다음 부임지로 떠난다. 그리고 서서히 리진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다. 혼자만의 사랑에 지쳤을 테지.

 

리진에게는 네 명의 남자가 있다. 우선은 어린 시절에 만난 말 못하는 강연, 궁녀의 삶에 존재하는 왕, 프랑스 외교관 콜랭, 그리고 홍종우.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외로움으로 끝맺는다. 독이 발라진 책을 먹고 홀로 피흘리며 죽은 그녀. 그녀는 외로운 여자였다. 또한 뒤에 그녀의 무덤 앞에서 얼어 죽은, 손 잘린 강연도 외로운 남자였다.

(강연은 어린 시절 리진과 함께 자랐다. 둘다 부모없는 고아로 서씨의 손에서 자랐는데, 강연은 리진에게 사랑을, 리진은 강연에게 연민을 품었다. 강연은 궁녀가 되어 궁으로 떠난 리진을 따라 장악원에 들어가 대금을 연주했으며, 콜랭을 따라 프랑스로 가는 그녀를 떠나 보낸 후에는 리진에 대한 마음을 서찰에 수없이 담기만 한다. 그 중 단 한통만 보낼 거면서. 그리고 다시 돌아온 리진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나, 홍종우의 상소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바로 궁녀를 사랑한다는 죄로. 말을 할 수 없는 강연에게 대금은 또 다른 언어였다. 하지만 손이 잘린 그는 이제 영원히 말할 수 없다. 이 사실에 리진은 미쳐버릴 것만 같다. 찾지 말라는 강연의 말에도 남장을 한 채 강연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강연. 결국 리진의 무덤 앞에서 죽는 강연. 강연의 사랑은 내 마음을 울리고 말았다.)

 

리진은 서구 열강에게 문을 열기 시작한 조선의 근대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사 소설이지만, 나는 이 책을 역사 소설로 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한 여성의 이야기라고 보고 싶다. 바로 리진의 이야기. 혹은 그녀의 사랑이야기. 여기서 사랑이란, 남자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는 그녀의 뿌리를. 이야기는 콜랭과 리진의 사랑을 따라가고 있지만, 리진의 마음은 언제나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에 머문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그녀는 어떤 존재였던가. 리진은 어린 시절 명성황후를 만난다. 그때 자신에게 배의 속을 숟가락으로 긁어주던 명성황후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진짜 엄마와 닮았다. 그 후 궁녀가 되어서도 딸처럼 명성황후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순간에는 왕비의 죽음을 보다 혼절한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명성황후는 리진에서도 그랬지만 나라의 국모이기 이전에 자신의 안위를 챙겼던 인물로 여겨진다. 왕세자를 위해 돈을 거침없이 쓰면서 민중의 병은 나몰라라 하고, 자신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매서웠던 여자. 더욱 강해져만 갔던 여자. 어쩌면 그녀는 진정 나라를 위해 수많은 날을 고심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녀의 행동은 민심과 나라를 어지럽히기만 했다. 자신에게 대항하면 분노했고, 자신을 노리는 세력때문에 잠을 설쳤다. 방도 바꾸어가며 잤다. 마치 죄진 사람이 발 저린 듯. 그래도 입 다물지 않고 인간 여성으로, 국모로서 당당했던 그녀의 정신은 높이사고 싶다. 비록 그 정신이 늘 그릇된 결과만을 낳았지만.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의 강화는 곧 나라가 강해지는 길이라 여겼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리진은 역사적 서사를 따르고 있지만, 리진은 역시 한 여인의 생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여성의 삶을 말하는 건 아니다. 미약한 조국을 갖고 있고, 한 나라의 궁녀였고, 사랑했으나 외로웠던, 국모를 자신의 어머니라 여겼던, 늘 가질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았던 여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흔치 않은 삶을 살았던. 그런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녀는 이끄는 삶이 아닌, 끌려가는 삶 속에서 자신의 정체찾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의 총명함과 춤을 통해 얻는 자유는 그녀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로서만 기능했고,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선택 된 삶을 따라갈 수만 있었을 뿐이었다.

 

신경숙 작가의 "리진"이 출간 됐다는 말에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런데 그녀가 쓴 글이 역사 속 한 인물을 호출해서 쓴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신경숙 작가도 역사 소설을 쓰는 구나, 했다. 왠지 신경숙 작가와 역사가 잘 매치가 안 됐다. 늘 외로운 삶을, 쓰러져갈 것만같은 인물을 그렸던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작품을 읽고 그 감상의 잔물결에 일상이 잠시 흔들리기도 했었는데...역사이야기라면, 그녀가 강해졌다는 얘기인가, 하고 얼핏 생각도 했다. 아니면 오랜시간 작품을 안 낸 것이 소재가 없어서 그런 거였나, 그래서 역사를 들출 수 밖에 없었나...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역시나 '쓸데없는 걱정' 이었다. 리진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했다. 리진의 삶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쉽게 찾아보던 그녀들이었고, 변한 게 있다면 리진이 좀더 여러 격랑을 거쳤다는 것이다. 리진은 그녀가 그린 여느 인물처럼 삶이라는 거대한 상징 앞에 무모하게 서 있었으며, 그저 흘러가다가 상처받고 쓰러지며 세상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꾸역꾸역 살았다. 그런 인물의 삶을 작가의 문장이 더욱 부추긴다. 나비의 팔랑 거림과 같은, 나비가 읊을 것 같은 가녀린 느낌의 문장으로 말이다. 때에 따라서는 슬픈 느낌을 남기는 여운이 긴 시처럼 응축되기도 하면서, 마음 속에 리진이라는 여인을 한 올 한 올 새기게 만든다.

 

흘러가는 삶 앞에 뚜렷한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뚜렷하게 정해진 게 있다면 사는 것이 너무 재미없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삶이 뚜렷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내게 다가오는 삶의 순간들은 뚜렷한 순간보다는 모호한 순간들이 더 많았다. 명확한 것 보다는 불명확한 것이 더 많아서 주춤거리기도 했다. 선택하는 매 순간 앞에서 '이걸 선택해라!' 하고 계시가 내려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택을 한 후, 뒤따르는 후회를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리진은 매 순간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 선택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쩌면 책을 읽는 동안 그녀가 정말 행복해 보인다고 느끼는 순간은 극히 적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선 땅에서 드레스를 입고 거리를 걸었던 그녀는 조선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이방인으로 존재했다. 잊혀지면 좋을. 누구에게? 자신에게. 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다면서 죽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씨 밑에서 자라다가 서씨의 언니인 서상궁에 의해 궁으로 출입을 하게 된 리진. 그러면서 삶이 자신의 뜻보다는, 타인에 의해 움직였던 리진. 그녀는 죽기 전에 수많은 것들을 후회했다. 그 중에 궁녀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궁녀로 살게 되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기 때문. 그런 그녀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지켜본 나로서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선택한 순간마다 고통을 동반하니, 겉으로는 좋아보일지 모르는 삶이겠으나, 속은 바짝 마른 것과 같다.

리진의 삶을 한 발자국씩 따라 걷다가 남은 것은, 그래서 연민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리진을 넘어서 나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번진다. 좀더 적극적으로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야 겠다.  

 

         

 

리진을 읽으면서 리진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는데, 자꾸 이영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장금에서의 모습과 에어컨 선전에서 파란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그녀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리진에게 다가간 사랑을 보면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본다. 끝내 내 마음을 움직인 건 강연이지만, 나라도 콜랭을 선택했을 것 같다. 둘 다 리진을 사랑했지만, 강연은 그 마음을 숨기는 쪽이었고, 콜랭은 표현하는 쪽이었다. 물론 에필로그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사는 그의 모습에 나쁜놈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어서 작품에 대한 여운을 깨기도 했지만 말이다. 역시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주고 싶게 만드는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행복으로 완결지어지는 것 같다.

덧붙여서 김탁환 작가의 리심도 읽어봐야 겠다. 역사 속의 한 여인을 두고 서로 다른 작가가 어떤 상상을 했을 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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