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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 교양의 탄생 -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H.O.T 같은 대중음악을 듣던 나에게 POP을 듣던 또래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아니라고는 말못하겠지만 서양 문화에 대한 나의사대주의는 꽤나 심각했던 것 같다.
각 개인이 소비하는 문화상품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고급이라고 간주되는 문화상품을 소비하려 한다. 결국 음악•미술•체육 등 각 분야의 문화상품은 고급과 저급으로 분류된다. 한 예로 아이돌 음악은 대중적(사실 의문이지만 그나마 대중적이다.)이나 클래식보다 저급으로 간주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문화적 성향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도 그렇게 다른진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문학에서 그런 성향이 뚜렷했다. 이 책에서 나오는 근대 한국 작가들이 애호했던 문학작품이 조선보다는 세계문학(사실상 서구문학)이라는 것은 좋게 말하면 신선하고 나쁘게 말하면 충격적이다. 비록 친일파이긴 하나 그래도 대표적인 조선 작가인 춘원 이광수가 <레 미제라블>을 애호했다는 사실은 참 생소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저자는 당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적’이라고 대변되는 보편적 가치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이, 중앙과 주변을 분리하는 식민주의와 결합하여, 조선문학보다는 세계문학을 애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조선문학은 뒤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지식인이라고 대변되는 식민지 시대 조선 작가의 스승은 전통적 한국문학이라기 보다는 세계 문학이 되었다. 즉 근대의 국문학사는 전통과의 단절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책을 읽다가 열이 받을만도 할테지만, 식민지 시대 조선작가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건 당시 일어났던 근대화(Modernization) 때문이다.
우선, 근대화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추구이다. 나는 식민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구 문학에 대한 애호는 정도만 덜할 뿐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형식, 문학이 담아내는 가치 등에 대해 끊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추구를 하다보면 전통문학에서보다는 서구 문학에서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화가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가치인 민주주의•자본주의도 식민지 시대 조선작가들의 세계 문학 애호를 부추겼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해방을 소중히 여기는 자유주의에서 비롯되는데, 비록 민주주의는 당시 식민지 시대에 없었지만 자유주의(예 - 남녀해방)의 물결이 희미하게 보이던 식민지 시대에서, 유교적 가치를 담던 조선문학은 그 당시 식민지 시대 지식인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서양 근대문학이 근대화의 가치를 더 담고 있었던 이상 지식인의 서구 문학 애호는 필연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자본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물화(物化)하기 때문이다. 문화도 일종의 문화자본이 되고 마는데 이 문화자본을 많이 가지는 사람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고, 활동으로 수익을 얻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좀 더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문화자본인 서구 문학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결국 이 책은 일본에 의한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을 고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근대화라는 무기를 가진 서양에 의한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이 미친 영향 역시 고발하고 있다. 동시에 저자는 근대화로 인한 속물 교양의 함양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들과 감응하며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와 부합하는 교양을 함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책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는 현대 사회가 지닌 한계 때문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경시되는 지식이 ‘누구나 아는 지식’이다. 상품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전문화와 분업화는 숙명이다. 이런 가운데 공동체적 가치와 어울리는 교양함양은 유토피아 건설을 부르짖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 같다. 내가 너무 냉소적이긴 하지만.
이 책은 1장에서 3장까지는 당시 조선 지식인의 세계 문학에 대한 맹목적인 애호를, 그리고 그런 가운데 4장에서는 세계 문학에서 벗어나 조선 문학을 대중에게 보급시키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책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국문학사를 다루다보니 사람에 따라 지루한게 단점이다. 읽다보면 근대 국어의 모습, 여러 가지 삽화 등 흥미로운 요소도 발견할 수 있으니 참고 읽어보자. 역사학도보다는 국문학도에게 맞는 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