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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이 책을 집어든 건 세간의 화젯거리 '나는 솔로' 16기 정주행을 마친 시점이었다. 연애프로그램 본연의 매력보다 인간 본성을 보여준다는 점, 특히 이번 기수는 시청자에게 엄청난 도파민을 준다는 점이 소문을 탔다. 실로 그랬다.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억측과 편견, 자기불신과 군중심리로 가득찼다는 것만큼 자극적인 전개는 없으니 말이다.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을 집어든 나는 찬찬하고 고른 문장들을 헤매이다가 문득 '나는 솔로'를 떠올렸다. 참 몹쓸 짓이다. 분명 이 소설은 매스미디어의 고자극과 대척점에 있을 법한 스위스 중견 소설가의, 현존재에 대한 고찰이 담긴 작품이다. 그럼에도 두 대상을 비교하게 하는 것은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논리에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 크리스토퍼는 우연히 마주친 크리스로 인해 자기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에 인생을 저당잡힌다. 소설 집필을 그만두고 크리스를 쫓아다니던 화자는 타지에서 평안을 얻어보려고 들지만, 결국 크리스는 물론 그의 연인이자, 자신의 과거 연인을 연상시키는 레나까지 만나러 간다.
이러한 플롯은 마치 도플갱어 키워드를 중심에 둔 연정소설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상 소설쓰는 남자 주인공이 감정에 휘둘러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이야기만큼 진부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혹적인 문장과 구성은 플롯에서 인생에 대한 질문을 뽑아내고, 독자를 서서히 자신의 타임라인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소설의 시간 구조는 외피와 내피가 이어진 클라인의 병처럼 오묘하다. 어둑한 스톡홀름 시내를 걷는 크리스토퍼와 레나의 이야기 속에서 14년간의 간극은 밀푀유의 겹처럼 치밀해지고, 그 속의 크림처럼 질척해져 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독자는 크리스토퍼의 불안의 정체와 마주하게 된다. 그의 불안의 외피는 크리스의 존재에 있는 듯하지만 실상 그가 레나를 만나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의 이러저러한 진정성이다.
그러니 크리스에서 나솔 16기 '광수'를 떠올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것이다.
그가 맞이한 감정과 일련의 결말까지도 말이다.
레나의 마지막 태도는 소설의 제목처럼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가깝다. 사실 나는 내가 제목이 시사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토퍼에게 정말로 지금 필요한 것이 그러한 무관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크리스토퍼 뿐만 아니라 관계에서 배반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과 선택은 오로지 그 자신이 해치워야 할 몫이며 뒤를 자꾸만 돌아볼수록 앞으로 걸어나가지 못한다는, 확고함이 필요하다.
그것을 알고 또 바라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나솔 16기에 몰입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브라운관 밖의 수많은 눈이자 하나의 세상으로써, 무관심을 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다.(나를 포함해서.)
*) 여담으로, 크리스토퍼와 레나가 걷는 차가운 도시의 정경은 마치 독자가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만큼 섬세한 단어와 구조로 조각되어 있다. 춥고 서먹한 도시를 걷는 기분이 필요하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