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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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가 뭘까 궁금해서 사전에서 찾아본 정의는 (원피스 따위의) 간단한 여름용 여자 양장. '아, 그렇구나'하고 책의 첫 장을 넘겼는데, 그곳에 적힌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 더 찾아보니 작업복처럼 단순하고 싸게 만든 옷, 쉽게 벗기거나 세탁하기 쉬운 옷으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여성들을 군의 관리 대상처럼 취급하기 위한 복장이었고, 그들의 인권과 존엄을 짓밟는 상징이었다고 해요. 아… 마음이 순식간에 무거워졌어요. 책 표지를 다시 봤어요.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커다란 노란 꽃의 조화가 이쁘게만 보였는데, 잘 보니 꽃에 간단후쿠가 숨어 있어요. 하얀색이 구름이 아니라 간단후쿠를 입고 있는 영혼처럼 느껴져요.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10대 어린 소녀들. 여자라서, 가난해서 돈을 벌기 위해 머나먼 만주 땅에 왔지만, 실제 그녀들이 간 곳은 일본군이 전쟁터 곳곳에 설치한 위안소. 일본 제국주의 시기(특히 1930년대 후반~1945년 일본의 패전까지) 많은 여성이 속임수(공장 취업, 간호일 등으로 유인), 인신매매, 강제 연행 등의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갔어요. 사람인데, 사람 취급받지 못해 차라리 자신을 간단후쿠라고 여기는 어린 소녀들의 고달픈 삶이 책 전반적으로 펼쳐져 있어요.


군인들을 데리고 자는 공장에서 10대 소녀들은 군인들과 돌림노래를 불러요.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했고, 폭력이 일상적이었으며, 임신과 질병,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요.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는 곳. 그녀들을 지켜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강에서 간단후쿠를 빨고 철조망에 널면서 어쩌면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간단후쿠라도 저 멀리 날아가기를. 하지만 철조망에 걸린 채 나풀거리기만 하는 간단후쿠. 꼭 본인 같아요. 쉽게 입고 쉽게 벗길 수 있는 옷. 인격을 상실한 채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삶을 사는 그녀들. 도망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설령 도망가더라도 죽을 확률이 높고, 남은 이들에게 빚이 더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


작중 화자인 요코는 이름이 네 개 있어요.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 개나리, 이곳에서 지어 준 이름 요코, 교코, 아이코. 그래서 그녀의 몸에는 영혼 네 개가 모여 살아요. 하나의 영혼도 감당하기에 벅찬데 네 개의 영혼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일까요? 가끔 '나를 잊어버리는 병'에 걸려요.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였는지, 누구인지, 이름도 나이도 잊어버리는. 어쩌면 진짜 자기를 놓아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정신으로 살기 힘드니 나를 놓아야 그나마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끝내 놓지 않아요. 나를 지키고자 해요.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면 보내주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면서요.


요코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강물에 써요. 구구절절한 사연은 생략하고 '답장은 마세요.'라고만.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함을 알아서였을까요. 실제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피해자들은 사회적 낙인, 가난,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때문에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어요. 요코의 편지에 저자는 답장해요. 이 책으로써요. 말할 수 없는 고통, 기록되지 못했던 기억을 남김으로써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최초 공개적으로 증언하면서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졌어요. 그녀의 용기가 계기가 되어, 다른 피해자들이 잇따라 증언하기 시작했어요. 일본 정부는 국가 간 공식 협정과 기금 지원으로 일정 조치를 해왔지만, 피해자 측이 요구하는 완전한 사죄·법적 책임·배상 측면에서는 아직 피해자·한국 사회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예요.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현재 생존자는 6명이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기억을 이어가는 일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 되었어요. 이 문제는 단순히 한·일 간의 외교 현안이 아니라, 전시 성폭력, 여성 인권, 정의, 평화의 문제니까요.


읽기 어려운 책이 있어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같은.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 무거운 돌멩이 하나가 가슴을 계속 짓누르는 느낌. 그 무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같은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그런 책이요. 이 책 또한 그랬어요. 빨리 읽을 수도, 낭독할 수도 없었어요. 몇 번을 덮었다 다시 폈다 했어요. 이 먹먹함과 무거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읽어야 했어요.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요. 그래야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요.


작가는 이 책을 쓰는 데 십 년이 걸렸다고 해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살아오신 분들은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셨어요. 그 세월의 무게를 단 며칠 만에 소화하려니 힘든 거겠죠. 부끄럽기도 했어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언론에 나올 때나 반짝 관심을 가졌으니까요. 읽으면서 그분들은 어떻게 그런 삶을 견디셨을까 싶었어요. 저는 아마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용기 있게 그때의 상황을 알렸기에 숨겨져 있던 게 드러났는데, 그런 용기도 어디서 나왔을까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 자신의 의지라곤 전혀 없는 삶,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던 삶, 자신을 잊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던 삶. 고유한 자아가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자기들 멋대로 사고팔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그 폭력성에 치가 떨려요. 간단후쿠가 지금은 없을까요?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끊이지 않는 전쟁, 폭력, 학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잊지 않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글로 남아서 더 다행이에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알면 보이는 게, 행동하는 게 달라질 테니까요.


누구든 한 번은 읽어봤으면 하는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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