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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어느 순간, 달리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띄어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저도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마음과 달리 몸은 잠깐 뛰어도 헉헉대지만요. 한때 저도 마라톤을 했어요. 15년 전쯤 들어간 직장 마라톤 동호회에서, 4년간 총 7번 10km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었거든요. 당시 달리기에 진심도 아니었고, 기록 단축에도 별 관심이 없었어요. 10km가 제 한계라 느꼈기에 하프, 풀 코스는 시도하지도 않았고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는데 이 책을 통해 다시 달리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작가이자 러너로 잘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 매일 4~5시간씩 글을 쓰는 루틴으로도 유명하죠. 매년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는 그가 궁금했어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의 소설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달리기를 축으로 한 그의 문학과 인생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만약 묘비명에 문구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렇게 써놓고 싶다는 저자. 이 짧은 문구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드러나는 것 같아요. 작가 못지않게 러너로서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꾸준히 끝까지 가겠다는 마음이요.
30살이었던,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저자. 야구 구장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을 때,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들으면서였어요.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하루키는 그것을 확실히 받아들였다고 해요. 그런 확실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기에 부럽기도 하고 신기했어요. 이전까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만년필 한 자루 없었다는 그는, 서점에 들러 원고용지 한 뭉치와 1,000엔 정도의 세일러 만년필을 샀어요. 조촐한 자본 투자로 봄에 시작해서 가을에 완성된 작품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예요. 첫 작품으로 신인상을 타면서 신진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하루키. 어쩌면 숨겨져 있던 재능이 그제야 드러났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전까지 카페를 운영하면서 글을 쓴 저자는 세 번째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이 호평을 받고 나서야 전업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어요.
저자가 매일 달리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어요. 긴 인생을 소설가로 살아갈 작정이었기에, 체력을 지키면서 체중을 적절히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언제 어디서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달리기였어요. 달리는 것이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었다는 저자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고 해요. 달리고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이야기해요.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P. 45)
2007년 8월까지 울트라 마라톤과 철인 삼종 경기를 비롯해 풀 마라톤을 25회 완주한 저자. 100킬로를 11시간 42분에 골인한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서 저자는 자신은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 없이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타일렀다고 해요. 주변에 걷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자는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었다고 해요. 그것이 자신이 정한 규칙이라면서요.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다시 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요.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고 해요.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저자. 그런데 울트라 마라톤의 체험 후 정신적 허탈감을 느껴 러너스 블루를 경험했어요. '달리고 싶다'라는 의욕이 이전처럼 명확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요. 그렇다고 마라톤을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요. 이전만큼의 기록도 나오지 않자, 흥미의 중심을 트라이애슬론에 대한 도전으로 옮겨 달리는 것과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저자. 그때부터 추운 시기에는 마라톤 레이스를 하고 여름철에는 트라이애슬론에 참가하는 것이 생활의 사이클이 되었다고 해요.
소설가, 러너로 꾸준히 자신을 증명하고 있는 하루키. 그는 어떤 직업이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능 못지않게 집중력과 지구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계속하는 것-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자신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해 가려 하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어떤 것을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의 20대 시절을 함께한 작가 중 한 사람이에요. 작품 특유의 우울한 감성이 저를 둘러쌌는데, 그게 멋있고 좋아 보였어요. 무슨 내용인지 깊이도 제대로 모른 채요. 30대가 되면서 소설을 멀리하면서 하루키의 작품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어요. 자신만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곳에 이르기 위해 꾸준히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고 있는 사람. 저도 한때 10km지만 마라톤을 했는데 저자와는 참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왕 하는 것 제대로 즐기면서 해봤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이 아쉬움이 걷기부터 시작해 저를 다시 달리게 할 수도 있겠죠? 저도 하루키처럼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하면서도, 멀리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