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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평점 :
품절
'가녀장의 시대' 낯설고 독특한 제목. 무표정한 표정에 머리에는 신문(?) 왕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전자 담배를 무심하게 쥔 듯한 표지를 장식한 한 여성. 그녀의 꼿꼿한 자세에서 자신감이 느껴지지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에서는 책임감과 약간의 외로움마저 엿보여요. <일간 이슬아>로 유명한 이슬아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가녀장의 시대>에서 작가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이것은 제가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입니다. 늠름한 아가씨와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지 궁금했습니다. 실수와 만회 속에서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TV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길고 뿌리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P. 311 작가의 말 중에서)
30세 여사장 슬아와 55세 부부 직원인 복희와 웅이가 일하는 낮잠 출판사. 정규 월급, 보너스는 물론 직원 복지까지 갖춘 어엿한 회사예요. 이곳은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는 수직적인 관계의 직장이에요. 슬아는 원고를 쓰고, 글쓰기 강의, 북토크, 인터뷰, 출판사 업무, 온라인 회의 등 사장의 역할을 하고, 복희는 음식을 담당하는 정규직 직원, 웅이는 청소, 사장님 운전기사, 기타 잡일을 담당하는 비정규직 직원이에요. 집안일에 정당한 페이를 지급하는 첫 회사인 셈이죠. 출판사에서 존댓말을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끔 부모와 자식의 자아가 튀어나와 반말이 나오기도 하는 곳이죠.
슬아는 새벽에 일어나 요가부터 시작하고 하루 일정을 빽빽하게 소화하느라 바빠요. 그런 사장을 본 직원들은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저래서 사장하나 봐. 우리는 테레비나 보자."라며 혀를 내둘러요. 가끔 그들끼리 소곤소곤 "쟤 바보 아냐? 가끔 보면 좀 모자란 것 같아. 은근 게을러.” 등 사장님 뒷담화도 하면서요. 아주 바쁜 와중에도 데이트해야겠다며 데이팅 앱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슬아를 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웅이와 복희. 웅이가 양쪽 팔에 청소기와 대걸레로 문신하는 장면, 이불 위에서 과자를 먹으며 부스러기를 흘려도 자기 일이 아니라 상관하지 않는 복희의 모습 등 절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요.
꼿꼿하게 바른 자세로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마감과 싸우는 슬아,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은 슬아가 일할 수 있게 뒷받침해 주는 두 직원. 그들 덕에 슬아는 낮잠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책을 10편이나 낼 수 있었을 거예요. 가녀장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슬아를 묵묵히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응원해 주는 직원들이 있기에 살가운 표현을 하지 못하는 슬아는 그들을 은근히 챙겨요. 서로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들의 관계가 낯설지만 좋게 느껴졌어요. 가족이라 하면 끈끈하게 얽혀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조금 벗어나려 하면 그것을 서운해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에요. 처음 보는 가족관계여서 산뜻하게 느껴졌어요.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복희는 음식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번다." (P. 40)
참 많이 와닿았던 구절이에요. 집안일은 같이 사는 사람 모두 함께해야 하는 일임을 어려서부터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녀 구분 짓지 말고요.
"명강사 이슬아의 지론에 따르면 글쓰기에 관해 천재가 아닌 아이는 없었다. 동시에 계속해서 천재인 아이 역시 없었다. 꾸준히 쓰지 않는 이상 말이다. 반복하지 않으면 재능도 빛을 잃을 뿐. 즐기면서 계속 쓰라! 그는 아이들에게 탁월함과 성실함 그리고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주입식으로 교육하며 수많은 십대 작가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P. 55)
최근에 읽은 '그릿' 책이 생각났어요. 역시 뭐든 꾸준히 해야 하는 거네요. 즐기면서 계속 쓰라!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거였어요.
책을 다 읽고 '신선하다! 재밌다! 어떻게 이런 소재로 소설을 썼을까?' 생각했어요. 본명이 그대로 나오는 소설이라니! 참 용감하고 감출 것이 없는 사람이구나 느끼기도 했어요. 왜 사람들이 이슬아 작가에 대해 많이 언급하는지 이 책 한 권만으로 알 수 있겠더라고요. 모부와 함께 살면서 직장 상사인 딸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가 낯선 것 같으면서도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TV 등에서 흔하게 보던 식상한 가족드라마가 아니라 새로운 가족드라마를 보면서 흥미진진하고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제 무의식에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족 이야기, 가족으로부터 훌훌 해방되는 이야기 또한 꿈꾸고 있다니 벌써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기도 하네요. 가부장, 가녀장이라는 말은 권위도 느껴지지만, 책임감 또한 막중하다는 생각하기에 그런 말 자체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봐요. 가족의 형태 등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음도 알았어요. 저는 그런 편견의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나 다시 한번 점검해보게 되네요.
이슬아 작가만의 가족드라마가 궁금하신 분께 추천해 드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