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그림 수업 - 그림 선생과 제주 할망의 해방일지
최소연 지음 / 김영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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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그림이라는 단어의 조합, 어떤가요? 긴 세월 동안 자식들을 위해 인생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이제라도 자신을 찾기 위한 작은 여정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이라는 것은 누구나, 어떤 재료든 상관없이 자기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흥미로운 수단 같아요. 비록 잘 그리려는 욕심이 선뜻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지만요. 처음에는 내가 뭘 이런 것을 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호기심이 생기고 조금씩 들여다보고 해보면 재미를 느끼면서 나만의 작품을 완성하는 거겠죠. 많은 시간을 보내온 할머니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림과 이야기는 어떤 색을 담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미술가이자 예술감독인 최소연 저자는 2021년 제주 선흘 마을로 이사 갔어요. 마을 산책을 하다 '마을 할머니들의 창고를 예술 창고로 바꿔보면 어떨까?'라는 생각과 함께 '할머니의 예술 창고' 프로젝트를 시작해요. 마을 할머니들에게 그림을 권하고 가르치게 되면서 서로 마음과 우정,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관계가 돼요. 이 책은 저자와 여덟 분의 할머니들이 함께한 많은 이야기와 그림이 있는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어요.


저자가 선흘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모두 80대 후반인데다 집에 혼자 사세요. 대문은 항상 열어놓으시고요. 저자가 "삼춘!"하고 부르면서 들어가면 이것저것 챙겨 주시면서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숨겨둔 그림을 보여줘요. "종이가 경(여기) 있으니까 호끔 기렸지(그렸지)"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저자가 빈 이젤, 빈 종이, 목탄이 잘 보이도록 한쪽에 놔두고 청소년들과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홍태옥 할머니가 이것저것 물으시고 "나도 기려보까?"라는 말을 시작으로 그림의 세계로 접어드세요. 할머니는 요즘 "이게 그림이 될까?"라는 물음을 자주 하신다고 해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그림을 그리는 인류가 던지는 '될까?'라는 물음에는 '되게 만들어야 할 텐데!'라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요.


할머니들께 그림을 알려드리며 종종 "그리고 싶은 대상에서 눈을 떼지 말고 눈으로 그림을 그려보세요"라는 주문하곤 한다는 저자. "눈으로 계속 따라가면, 손이 저절로 그걸 그리게 돼요. 본다는 건 기억하는 거고 기억한다는 건 사랑하는 거예요." 할머니들은 대상을 오래 응시하며 손을 움직이면서 그려요. 다양한 종이에 연습하시면서 이것도 그림이 되냐고 물어보면, 저자는 "삼춘, 이게 진짜 그림이다. 이 모든 연습도 그림이에요."라고 말해요.


"뭔가를 마음먹고 표현하고자 할 때,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지면 그것을 형상화하려는 노력, 언어화하려는 노력이 어떤 찰나의 순간에 결과물이 되어 램프 속 지니가 나오듯 탁 하고 새로 나오는 거죠." (P. 146)


책에는 할머니들의 그림과 글이 다수 소개되어 있어요. 강희선 할머니의 <인주 팬티>는 여름 되면 시원해서 찾게 되는 할머니의 팬티 그림을, 오른손이 떨려서 이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고 선언했으면서 집에서 혼자 연습하신 부희순 할머니는 <늙어 둔틀락둔틀락> 오이 그림을, 오가자 할머니의 <고함지르잰 하니까> 그림은 벗과 엄마를 그리워하는 새를 나타냈어요.


할머니들은 그저 담담히 오늘의 할 일을 하세요. 저자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며 내일보다는 오늘을 살게 되었다고 해요. '그저 제가 발걸음 할 수 있는 곳을 느슨하게 찾아가면서요.'라고 말하면서요. 밤 산책을 하다 보면 할머니들의 오래된 불면증을 만나게 된다고 해요. "혼자 사는 일이 결코 괜찮은 일이 아닌데, 어떻게든 살아내시는 거죠. 괜찮지 않음을 견디면서요."



<할머니의 그립 수업>은 '너도나도 해방 찾기 사용 설명서'라고 표현하는 저널리스트 안희경. "행복도 해방도 본질은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욕망에 다다르는 목표까지 품는 것이라면 해방은 온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점을 짚는다. 선생과 제자의 해방 여정은 강력했다. (중략) 자! 이제 우리 차례다. 당신의 해방 여행을 떠나자. 선흘의 할망들처럼 아무거나 그려제껴 보는 거다. 빈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면 충분하다. 용기를 내보자. 그 길에서 웅크린 아이가 고개 들어 눈을 맞춘다면 팔 벌려 안아주면 된다. 다 괜찮다."


저자가 1살 때부터 함께 지냈다는 유모 할머니의 존재로 저자는 할머니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줌으로써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되었을 거예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친정엄마와 시어머님이 떠올랐어요. 70대이신 두 분은 여전히 바쁘게 생활하세요. 이제는 그만 쉬셔도 될 것 같은데 쉬면 몸이 더 아프다고 말씀하시면서요. 그런 마음으로 자식들을 키우셨고, 이제는 손주들 용돈이라도 챙겨 주려고 쉼을 허락하지 않으세요. 저도 저자처럼 슬며시 그림 도구를 챙겨서 가져가 볼까 봐요. 적적할 때 한번 그려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자식들, 손주들 챙기느라 본인들 인생은 항상 뒷전이셨기에, 조금이라도 자기 삶을 앞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요. 뭐, 마음이 내키지 않으실 수도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한다면 조금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림이라는 것은 자기가 표현하기 나름이니까요. 저도 올해 초반 아크릴화를 잠깐 배우고 쉬고 있는데 잠깐씩이라도 한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 여덟 분과 저자의 이야기가 제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그림에 관한 욕구도 일깨우고 마음속이 따스해짐도 경험하게 했어요.


할머니들의 그림 수업을 통해 따스함을 느끼고 싶은 분께 추천해 드려요. 감사합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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