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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평점 :
이 책은 1950년 11월 26일부터 1951년 5월 27일까지 이어지는 일기다. 일기의 주인공인 '발레리아'는 마흔세 살로 마흔아홉 살인 남편 '미켈레'와 대학생인 아들 '리카르'도, 열아홉 살인 딸 '미렐라'와 함께 살고 있다.
책에는 처음 '금지된'일기장을 사는 것부터 이 일기장을 어디에 숨겨야 할지, 가족들이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를 상상하며 걱정하는 모습 같은 세세한 심리묘사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고 있다.
책의 배경은 1950년이다. 그래서 지금으로선 당연한 모습과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들이 보인다.
먼저 발레리아가 일기는 쓰기 위해 공책을 산다는 것부터 몰래 사야 했으며, 일기를 쓴 권리가 있다는 걸 밝혔을 때 가족들은 웃었다. 무슨 이야길 쓸 거냐며 말이다. 그리고 미국 영화에서 남편이 아내가 설거지하는 것을 돕는 모습이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여자'라는 한 사람의 '권리'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과는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들도 보였다.
남편은 은행에서 일하지만 발레리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꿈을 찾아을 거라고 말하며 가족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길 바라는 가부장적 인물이다. 아내인 발레리아는 스무 살이 안됐을 때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키우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자신도 일을 하는, 당시에는 드문 진취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일과 집안일을 모두 자신이 하고, 주현절(지금의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정성스레 챙기는 슈퍼우먼이다. 따라서 잠시도 쉴 틈이 없고, 가족들은 그녀의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인 '발레리아'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 남편마저 '엄마'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잘 시간을 쪼개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에 일기를 쓰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학생인 아들 '리카르'는 자신은 부모의 세대와 다르다며,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하고, 딸인 '미렐라'는 돈이 많고 나이도 많은(서른 중반) 남자와 연애하며 "엄마처럼 가난하게 살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자신은 미렐라의 나이에 그러지 않았다며 요즘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물론, 발레리아의 엄마는 발레리아도 미렐라의 나이에 똑같이 그랬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자신도. 미렐라도 말이다.
발레리아는 좋은 엄마다. 일과 집안일의 노예라고 생각하지만 주현절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그런 발레리아를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는 남편에 맞서서 말이다. 그리고 반항하는 딸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아버지는 실패자이고, 똑똑한 엄마를 인생에 끌어들여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자신까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말하는 미렐라에게 말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전혀 다른 메릴라의 두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생각하다, 문득 딸이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애가 집에서 맡은 역할과 밖에서 맡은 역할 자체가 다른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 중 까탈스러운 쪽이 가족에게 배당된 것뿐이다. 23P."
책엔 발레리아의 '엄마'로서의 고단한 삶과 솔직한 욕망이 담겨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 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49~50p."
"일기장의 새하얀 백지는 나를 매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혼자 거리를 거닐 때처럼 말이다. 93p."
"내게도 일기를 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날 밤에 그랬듯 애정 어린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깊은 사유 없이 어떻게 올바른 기준에 맞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107p."
그 욕망들을 글로 써 내려가며 발레리아는 혼란스러워한다.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를 생각하며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장 때문이라며 일기장을 없애려까지 한다. 하지만 일기는 계속된다.
발레리아는 친구들의 모임에서 자신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다른 언어를 하는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친구들은 모두 가정주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보다 모두 여유 있었다. 발레리아는 일과 가정에서 완벽한 슈퍼우먼이 되고자 했지만 가족들은 그녀의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며 쫓아다니는 생각을 하며 일탈을 하기도 하지만 늘 같은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 나간다. 하지만 그 뒤에 발레리아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점점 더 솔직해지는 발레리아의 모습이 더욱더 궁금해진다. 가제본 서평이라 115페이지로 아주 얇았다. 하지만 글은 흡입력이 있어서 책을 들 고 한 번에 후딱 읽어버렸다. 뒤 내용이 없어서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일이야말로 정말 재밌는 일 아닌가!
그런데, 2024년의 나의 모습도 발레리아와 많이 다르지 않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의 '삶'과 나의 '이름'은 없어졌다. 끊임없이 어지르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다만 나는 금고가 있어서 일기장을 그곳에 보관해 두고 있다. 그리고 일기를 쓰고, 이 책을 읽기 위해,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내 잠을 줄여서 내 시간을 갖는다. 1950년대와 달라진 점이 없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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