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왈가닥 비바리 케이팩션 5
천영미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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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시작이 그렇듯 주변은 온통 어슴프레하고, 고요함을 너머 적막함에 에워싸인 듯하다. 그리고 내 안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불현듯 내 안에 깃든 생명체들을 잘 길러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바다'라 불린다.나는 모든 생명체를 귀히 여기는 존재이자, 생명체 하나마다 깃들어 있는 삶의 의미를 존중하고 돕는 존재이며, 위대한 생명의 근원지다. 그런 나를 인간들이 고작 '바다'라는 명칭으로 부를 뿐이다. 9-10쪽

 

 

"현욱 도령, 있잖아, 슬픔은 돌멩이랑 비슷해."

"돌멩이? 그게 무슨 ......."

"처음에 슬픔은 주머니 속 깊이 감춰 둔 뾰족한 돌멩이 같거든. 그 날카로운 모서리에 여기저기 찍히면 피가 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이란 건 둥글둥글해져. 예전에는 아방(아버지)을 삼켜버린 이 바다가 저주스럽고 무서웠는데, 이젠 괜찮아. 이 바다에 깃들어 사는 내 삶이 꽤 괜찮아지고 있거든."

'이 아이를 이토록 강하게 만드는 힘은 뭘까?'

현욱은 거대한 슬픔조차 이 아이를 삼킬 수 없었던 이유를 궁금해하며, 새까맣게 타버린 생선을 한입 더 베어 물었다. 101쪽

김만덕, 1793년 제주의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2만 섬의 구호 식량을 보내지만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하고 제주의 백성들을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김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쌀을 사서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백성들을 살렸다. 제주의 의녀 義女 김만덕 스토리다. 이러한 그녀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소원을 물어본다. 그녀는 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싶고 금강산도 보고 싶다고 했다. 관의 허락 없이 제주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관행을 깨고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제주, 조선 시대의 제주는 지금의 휴양지가 아니었다. 죄를 지은 양반들의 유배지였고, 탐라 주민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출륙금지령을 국법으로 정하여 탐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감옥 아닌 감옥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가 아는 그녀의 스토리는 [조선의 왈가닥 비바리]로 재탄생했다. 문학박사인 천영미 작가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강사로 일했고 현재 호주 시드니에서 인문학 강사로 활동 중이다. 외국인에게 한국 역사와 문화를 가르친다. 첫 장편 [조선의 등 굽은 정원사]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첫 문장부터 집중하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강한 문장에 매료되었다! '바다'는 왈가닥 비바리의 인생에서 결코 제외할 수 없는 대상이다. 비바리의 삶의 과정과 교차하여 묘사하고 있는 '바다 이야기'는 비바리의 모든 것이다. 사랑하는 아방(아버지)를 삼켜버렸으나 모든 생명체를 품어 기르는 바다는 탐라 주민들을 기르는 고마운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를 '모성'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명체에게 시련은 늘 닥친다. 예외는 없다. 예기치 못한 큰 풍랑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추구하는 단 한 가지 섭리는 바로 그것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의녀이자 상인이었던 김만덕 스토리를 취하고 있으나 많은 옛 문헌과 논문과 단행본 등을 참조하여 탄탄한 역사적 배경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출판사 광고 문구인 "조선시대판 빨강머리 앤, 김만덕의 사랑스럽고 유쾌한 성장소설"라는 표현이 나에게는 조금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따듯한 역사소설'이라는 문구는 맞는다고 생각한다. 천영미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 하에 무거워지고 경건해지는 데서 탈피하고 생동감 있고 매력 있는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읽으면 알게 된다. 왜 굳이 앞에 '왈가닥'을 붙였는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제들도 떠나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된 비바리가 특유의 긍정과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즈넉이엔티 출판사가 새롭게 선보이는 역사 소설 브랜드 케이팩션의 여섯 번째 작품인 [조선의 왈가닥 비바리]. 새로운 소재를 찾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적 소재를 다루어야 한다는 관점 아래 탄생했다. 여러 가지 장르가 혼합되고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져 차별화된 역사소설, 그것이 바로 케이팩션이다.

제목과 광고 문구만 들었을 때는 청소년 대상의 가벼운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또한 천영미 작가의 아름답고 진지한 문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거대한 아픔을 이토록 아름다운 문체로 묘사할 수 있다니!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즈넉이엔티 출판사의 기획 의도도 정말 멋지다.

해당 도서는 고즈넉이엔티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도서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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