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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는데도 비참한 시간 속에 강제로 던져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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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과 내면이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에 도착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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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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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가족 중 청년 한 명은 일본군에 징집 또는 징용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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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으로 태어난 최영우는 장남 대신 포로감시원 채용에 지원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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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한 이들은 1942년 6월부터 두 달간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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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부산항을 출발해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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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기 계약직으로 50엔 정도의 봉급을 받는 일본군 소속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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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군속'의 신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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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지 공무원일 뿐일거라는 예상은 빗나갔고 최말단 대우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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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못 되어 전세가 역전되면서 일본군 소속인 이들 포로감시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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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 위태롭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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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연합군 포로들은 비행장이나 다리를 건설하는 다양한 강제 노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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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되었고 이들을 감시, 감독하는 역할을 한 것이 포로감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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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노동, 부실한 급식, 열대 풍토병 등으로 대량 사상자가 발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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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전범이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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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근무 기간은 지켜지지 않았고 봉급도 제때 주지 않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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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도 시키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적 항복을 발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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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마음에 얼마나 들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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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연합국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룬 일본군에게 반드시 책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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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야 한다고 판단, 이 과정에서 포로감시원들이 전범 혐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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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용의자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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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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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명이 BC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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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 받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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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바랜 원고지 속에 담겨져 있던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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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이 없는 포로감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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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그토록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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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우, 그는 이미 고국을 떠나기 전 그 젊은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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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부정부패와 부조리 가득한 한국의 상황은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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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무력감을 주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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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냥개로 불리던 젊은이의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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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최영우의 친필 원고는 수용소 생활을 마지막으로 끝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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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최양현은 질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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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포로감시원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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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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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희생자, 희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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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말 소심한 사람이건 나약한 사람이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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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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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지지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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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의 영원한 할아버지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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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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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토록 혼란했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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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이길래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의 청춘을 앗아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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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무엇이길래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을 좌절하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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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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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역시 한국 전쟁 당시 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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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할아버지들, 전쟁을 몸소 경험하고 좌절하고 극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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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할머니들,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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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우리의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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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바쳤는지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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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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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시간 속에 강제로 던져진 이가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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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피투되어 온몸과 내면이 만신창이가 된 채 고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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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그, 그가 젊은 시절 꾸었던 꿈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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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는 효형출판사의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도서제공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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