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정면
윤지이 지음 / 델피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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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나는 본격적인 위태로움을 느꼈다.

적어도 진료실 안에서 나는 의사고 의사로서 할 일이 있지만,

진료실 밖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내.

언제나 한결같은 화풍.

그건 소재 때문이었다. 아내는 매번 지중해를 그렸다.

아내는 지중해 특유의 온화함과 영광, 나른함을 형상해 냈다.

[어둠의 정면]

윤지이, 델피노

 

나.

레지던트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미 수차례 환자를 잃은 바가 있다.

같은 일이 생길 때마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내 안에

각인되었고 나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갔다.

아내.

그녀가 정신과 의사로서 훌륭했다는 걸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상엔 그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결혼 칠 년 차. 우리 중 누구도 아이에 대해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아내가 아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나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소년.

나는 자세히 소년을 살폈다.

소년이 입을 열지 못하자 나는 좀 더 쉬운 질문을 꺼냈다.

"몇 살이죠?"

"열 ......네 살이요."

"저는 야구를 해요."

"그런데 공이 보이지 않아요."

공을 무서워하는 야구선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빈자리.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진료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

소년이 찾아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이 내게 발길을 끊은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람은 많지만

명백히 죽음 쪽에 표를 던진 뒤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완벽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것처럼 보이는 정신과 의사,

그 역시 죽음에 대한 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존재다.

약에 의존하는 정신과 의사,

역시 정신과 의사였으나 환자를 잃고 일을 그만둔 아내,

어린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와 사귀던 미국인 톰,

아내의 소울 메이트 마르코,

치매에 걸린 나의 양부......

작가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욕망'을 쓰고 싶었다고.

그것은 식욕이나 성욕과 다를 바 없는,

삶의 불만이나 좌절, 슬픔 이전에 존재하는

욕구이자 본능이라고.

우리의 삶은 마치 부서지기 쉬운 장난감 같은 것,

타인의 불행한 모습을 알아채주는 섬세한 눈을 가진

그런 상대가 필요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주인공 형기는 자살이 미수에 그치자

자신이 다시 삶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발치한 두 개의 치아를 생각하며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지만

허전하다고,

마음이 공허하다고,

삶이 중단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둘은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 리뷰는 윤지이 작가로부터 직접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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