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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다는 말 - 진화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익숙한 세계
이수지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자연스럽다”는 말처럼 일상적으로 쓰이면서도,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단어가 또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 성별, 역할, 그리고 사회적 갈등까지도 너무 쉽게 ‘자연’을 기준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수지 박사의 『자연스럽다는 말』은 이 익숙한 언어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권력을 숨기고 있는지를 치밀하게 파헤친다.
책은 자연을 둘러싼 우리의 믿음이 실제 자연의 복잡성과 무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여자라서 그렇다,” “남자라서 그렇다,” “본능이라 어쩔 수 없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다”와 같은 문장들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의 언어라는 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저자는 자연을 사실의 영역으로, 윤리를 당연한 영역으로 묶어버리는 사고를 “자연주의 오류”라 지칭하며, 그 오류가 어떻게 성 역할, 모성 신화, 인구 담론, 저출산 문제, 사회적 갈등까지 다양한 분야에 스며들어 왔는지 추적한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모성 본능’에 대한 재해석이다. 인간이 높은 번식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친모의 본능이 아니라 여러 구성원이 함께 아이를 돌보는 협동 육아 구조 덕분이라는 진화 인류학적 통찰이다. 이 지점에서 “낳아 보지 않으면 모른다”라는 사회적 통념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성별과 본성을 자연에 끼워 넣어 설명하는 방식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 자연은 고정된 역할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 깊다.
마지막 장에서 다윈의 사례를 소환하는 방식은 이 책의 핵심을 정교하게 마무리한다. 자연을 관찰한 위대한 과학자조차 자신의 시대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연이 ‘정답’을 주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을 강한 설득력으로 끌어올린다. 자연은 침묵하고, 말하는 것은 해석하는 인간이라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남는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자연을 새롭게 배우는 책이 아니라, 자연을 근거로 삼던 우리의 사고를 다시 배우게 하는 책이다. 읽는 동안 불편해지는 순간이 많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에 기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제공하는 질문들 앞에서 한 번쯤 멈춰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