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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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내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어지는 건 아닐까. 아름다움의 정수를 깨닫게 되는 순간, 다른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련을 덜게 되는 것. 반대로 그만큼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집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움에 미친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코 아키타였다. 승려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처럼 승려나 당대 사회 지배계급인 무사가 되길 원했으나, 자식은 언제나 그렇듯 부모의 뜻을 거스른다. 대신 17세 소년은 하이쿠에 혼을 빼앗긴다. 그리고 스스로를 눈의 시인으로 부른다.

 

사실 일본 문화 정수 중의 하나라는 하이쿠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아마 이건 정말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되는 그런 미지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한자 문화권 작가도 아닌 무려 프랑스 작가인 막상스 페르민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압축과 정형이라는 틀을 작가는 정확하게 이해하고서 이런 탐미적인 서사를 이끌어 내었단 말인가. 그런데 또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이런 가치전복적인 시도야말로 문학의 본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시도 말이다.

 

열일곱 음절 하이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소년은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유코의 무모할 정도의 패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에 끝이 있었던가? 그동안 소설 혹은 문학에서 만난 아름다움의 극한에는 자기파멸이 도사리고 있지 않았던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코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수 있다. 유코의 하이쿠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름다움이란 결국 주관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는 걸까.

 

유코를 찾아온 메이지 궁정 시인은 눈[]과 무채색에 몰두하는 젊은 시인에게 화가 소세키에게 색을 배워 보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라는 말이었을까. 소세키를 찾아 가는 길에, 유코는 얼음에 갇힌 미녀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는 구원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성의 희생을 통한 구원 서사라는 조금은 불편한 신화를 마주하게 된다. 막상스 페르민 작가의 인스타를 염탐해 보니, 정말 그는 눈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눈의 고장 알베르빌 출신이라 그런 걸까. 얼음이라는 감옥에 네에주(나중에 그녀가 누구인지 밝혀진다)를 박제한 막상스 페르민은 숭고한이미지로 포장해서 청년 하이쿠 시인에게 구원을 선사한다. 그것도 영혼의 구원이 아닌 생사의 경계에서 삶이라는 물리적 구원을. 이게 최선이었을까.

 

페르민 작가의 다음 작품인 <검은 바이올린>에서처럼 <>에서도 소설 속의 새로운 소설이라는 방식의 전개가 펼쳐진다. 서사의 축이, 유코에서 소세키 선생과 프랑스 출신 곡예사 네에주(neige, )와의 사랑으로 이동한다. 메이지 시대 제국의 무사였던 소세키가 외국에서 건너온 공중에서 길을 잃은 금빛 새와 만나 사랑에 빠져 버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에도/메이지 시대에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와 외국 여성의 혼인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언어의 장벽이나 관습이나 통념 따위는 어떻게 돌파했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마법이 있다는 표현으로 갈음할 수 있을까.

 

그런 현실적 질문들 대신 막상스 페르민 작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추구하는 탐미적 서사를 극한으로 밀어 붙인다. 결국 숱한 고민 끝에 자신이 사랑한 네에주의 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소세키. 유코는 그의 죽음을 아니, 자신이 눈 속에서 잃은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애도한다.

 

막상스 페르민의 색채 3부작의 신호탄인 <>을 다 읽고 난 다음의 기분은 스산함이었다. 꿀벌의 황금색, 저주 받은 바이올린의 검은색 그리고 죽음으로 종결되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애절함으로 눈이 부시게 흰 눈[]으로 이어지는 3부작 서사의 끝에는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 버린 그런 니힐리즘의 잔영만이 남았다. 하이쿠에 비친 투명한 아름다움과 왠지 모를 불편함의 혼재 때문인지 양가적 감정이 들끓는다. 아무래도 아름다움은 집착이지 싶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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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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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다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교보문고에서였는데, 우연히 만난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읽게 됐다.

 

이번에 새로 나온 문병일기를 읽으면서 예전에 만난 <단순한 열정> 생각이 났다. 치매로 정신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문병하면서 오토픽션의 대가 아니 에르노는 외국인 연하의 유부남과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졌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혼 준비도 했다지 아마.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는 치매를 앓으시면서도 바람난 딸의 행동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결국 아닌 것으로 판정이 났지만.

 

소설의 초반부터 등장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언급은 작가가 경험한 사랑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예고했다. 젊은 육신에서 발산되는 쾌락의 늪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평소에는 듣지 않던 유행가 가사 하나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모든 삶은 오로지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기다림으로 집중된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이어질 그와의 뜨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꼭 사랑이 어떠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평생 살면서 이런 불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싶다. 작가는 두 아들에게도 자신이 사랑에 빠진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보통의 경우, 아이들이 부모의 파트너들에게 적대적 경향을 보인다고 하던데 작가의 아들들은 어느 정도 자라서 그런진 몰라도 이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네 정서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랄까.

 

문학교수님이자 작가답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내연남에게 수도 없이 편지도 쓰고 그랬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아 보진 못했다. 이유는 유부남다운 신중함 때문이었다고 작가는 분석한다. 아니 그렇다면 이 선수는 작가와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그녀가 빠진 A라는 남자는 동구권 출신으로 실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추정할 만한 단서들을 작가는 극도로 신중하게 배제한다.

 

나는 또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가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않은 A와의 의사소통 문제였다. 같은 말을 구사하면서도 발생하는 숱한 오해와 왜곡들을 작가에 따르면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은 A가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었을까? 오로지 육체적 쾌락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마 그런 부분에 대해 더 이상 나가면 A의 실체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했나 싶기도 하다. 그런 부분이 이 오토픽션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인용 부분이 눈길을 끈다.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그로스만의 그 책을 몰랐기에 그냥 넘겨 버렸지만, 이제 그로스만과 그의 책이 존재하는 걸 알게 되니 좀 더 다른 느낌이랄까.

 

어쨌든 예의 A를 사랑했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니 에르노의 패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불륜과 그것을 살아있는 소설의 텍스트로 삼은 것에 대한 작가의 변명은 1도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팩트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결국 A는 작가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바스러뜨리듯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관계도 소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로 보지 않으면 잊을 수 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결국 시간이 기억도 파괴해 버린다. 내가 보기에 작가가 아무리 당의(糖衣)로 자신의 불륜을 포장했어도, 그것은 열정에 사로잡힌 지나친 집착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사의 균형을 위해서는 A의 목소리가 필요한데,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A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사유들은 너무 디테일하게 알 수 있는 반면, 열정의 또다른 실행자였던 A의 생각들은 전혀 알 수가 없고 너무나 파편적이다. 사랑에 대한 열정이 지나가고 나면, 가치로 변하게 되는 걸까? 허리케인 같은 사랑이 지나가고 나니 한 사람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사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등장한다.

 

간만에 다시 읽으니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신 다시 한 번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열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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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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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서는 일단 이 책은 펠리시아라는 여성이 여행길에 겪는 경험이 담긴 책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포인트는 보인다라는 점이다.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는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요란한 물 갈퀴질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정이란 단어는 오디세이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이래 많은 문학의 전범이 된 귀환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 펠리시아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서사는 영국으로 떠난 연인을 찾아 나선 펠리시아라는 아일랜드 소녀의 여정을 담보한다. 그 여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전개될 지에 대해서는 오롯하게 작가의 몫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예를 따르기 위해 펠리시아가 갖추어야할 것들은 차고 넘치는 반면, 반대의 경우는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작동한다.

 

아무래도 더 가능성이 짙은 불행한 결말의 경우, 우선 펠리시아는 자신이 향하는 잉글랜드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조니 라이서트 말고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구하거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낯선 곳에 머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금도 넉넉한 편이 아니다. 영국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고향 아일랜드 억양도 또 다른 장애물이다.

 

그렇다면 펠리시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불문가지의 일일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저자는 그런 펠리시아를 위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을 한 명 선정해서 배치했다. 그의 이름은 힐디치. 퉁퉁하니 넉넉한 살집을 자랑하는 50대 구내식당 매니저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속에 더 무서운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해보지 않았을까?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해 보이는 바다 속에 무서운 백상어가 노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포스트 대처 시대에 낯선 영국 땅에서 미래의 아이 아빠인 조니 라이서트를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설정이겠지만, 유사 애인이 준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그를 추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방면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펠리시아는 교활한 힐디치처럼 조니의 소재를 찾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힐디치는 자신이 얻은 귀중한 정보를 펠리시아에게 전달한 의사가 전혀 없었다. , 영국군에 자원입대한 조니 라이서트는 펠리시아의 아버지 같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을 저버린 배신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펠리시아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더 좋은 남자들이 많다고 말했던 것일까.

 

윌리엄 트레버는 시시각각 힐디치라는 양의 탈을 쓴 인물이 조성해내는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위험에 대한 경고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준다. 어느 순간 우리는 그가 잔혹한 시리얼 킬러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 펠리시아 위험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마다 주인공 펠리시아는 위기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나간다. 하지만 이제 슬슬 악당으로서의 가면을 벗기 시작한 힐디치는 용의주도하고. 완벽한 알리바이라는 그물로 펠리시아를 유인해서 포획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윌리엄 트레버는 펠리시아의 주변에 힐디치라는 가장 위험한 인물을 배치한 뒤에도, 이상한 종교집단의 포교자들과 노숙자들을 이야기에 투입하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조니의 아이를 가진 펠리시아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신의 가정(과연 그럴까?)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수난을 겪을 정도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영국에서 그녀가 경험하게 된 고생들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녀 자신이 선택한 일련의 삶의 오류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말일까.

 

결국 소설에서 펠리시아는 조니를 찾아내는데 실패했다. 그들이 만난 아일랜드에서 조니는 실체를 가진 존재였지만, 그들이 뿌리를 잃은 영국 땅에서 조니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말해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찾는 펠리시아의 여정은 처음부터 실패로 귀결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절박한 펠리시아에게 조니는 일종의 구원을 상징했지만, 어쩌면 조니라는 존재 자체가 구원이 아닌 허상이 아니었을까.

 

조니를 구체화할 수 있는 정보는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나마 펠리시아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정보조차 불분명했다. 그나마 조니의 엄마에게 아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조니의 엄마는 아들에 대한 정보를 주기 거부했다. 심지어 펠리시아가 조니에게 전해 달라고 건넨 편지는 족족 태워 버렸다. 이런 불확실성과 비협조가 난무하는 가운데 무턱대고 영국으로 건너간 펠리시아가 조니를 찾을 수 있었다면 그건 기적이었으리라.

 

너무 이야기를 펠리시아에게 집중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한 힐디치에 대한 소개가 상대적으로 적어진 느낌이다. 아톰 에고이안이 연출한 영화에서 힐디치에게 희생당한 과거의 피해자들이 차례로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조용한 공포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전달되는 소년 시절 이래 힐디치가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을 거쳐 사회에서 유리된 사이코패스의 탄생은 그의 평범해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오싹한 공포를 자아냈다.

 

내가 생각하는 펠리시아의 여정은 결국 구원을 향한 길이었다. 그 여정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무던해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 진실로 위험한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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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매장 일산점 오픈

 

 

3년 전 종로에 온라인 서점인 알라딘이 중고서점을 연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찾은 적이 있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정말 인산인해였다. 평소에도 온라인 알라딘 중고서점을 자주 이용해서 알라딘이 관리하는 중고서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 후 3년간 전국에 모두 16개의 알라딘 중고서점이 들어섰다고 한다. 주로 수도권에 있는 알라딘 지점은 거의 모두 가본 것 같다. 종로점을 필두로 해서 신촌점, 강남점, 분당점, 산본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제 일산점에 들렀다.

 

 

 

 

예전 <민들레 영토>가 있던 장소인데, 멋지게 리모델링을 마치고 최근 오픈했다고 한다. 항상 각종 행사가 끊이지 않는 미관광장이 내려다 보인다. 몇주전에는 막걸리 행사를 했는데 이번 주에는 소녀시대 코스프레를 한 꼬마들이 <!>에 맞춰 열띤 춤을 선보이고 있었다.

 

일산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웨스턴돔과 라페스타 입구에 위치한 알라딘 일산점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읽은 후 되파세요란 문구가 마음에 든다. 책쟁이들은 수많은 책과 만나지만, 어떤 책의 경우에는 다 읽고 난 뒤 이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동네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지인에게 선물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의 선순환이라는 점에서 알라딘을 통한 헌책 사고팔기는 가장 선호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책이 누군가에는 정말 꼭 필요한 책일 수 있지 않겠는가.

 

 

 

 

알라딘 일산점에 입장하자마자 바로 탄성이 절로 솟는다. 누군가 지금까지 오픈한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 중에 최고의 비주얼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역시나 명불허전이다. 넓직한 공간을 가득 메운 책들이 반갑다. 곳곳에 둥지를 틀고 앉아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하루가 다르게 책 읽는 공간과 서점이 사라져 가는 마당에 알라딘처럼 세련된 중고서점이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까. 예전의 구식 헌책방과는 전혀 다른 신개념의 전략이 멋지다.

 

 

사실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 그리고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도 가봤지만, 너무 비좁은 공간에 거의 책이 진열되었다기 보단 쌓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고, 더욱이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반면, 알라딘에서는 직원분들이 수시로 단말기를 들고 다니면서 책의 재고와 위치를 제공해준다. 컴퓨터 자판에 앞에서 타다닥 몇 번의 수고만 곁들이면 바로 원하는 책의 재고 유무를 알 수가 있다.

 

 

 

 

정말 화창한 날, 중고서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라페스타 부근이 워낙 번잡해서 주차하느라 거진 20분 가량을 헤매고 돌아 다녔다 보다. 원래 가져간 몇 권의 책도 팔려고 했으나 무거워서 패스~ 대신 집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재고 유무를 파악한 몇 권의 책을 사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리 책쟁이라지만 그렇게 많은 책을 사다 보면 책 사는데 드는 비용이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도 중고서점은 착한 가격으로 상태가 양호한 책을 제공한다. 최상급의 신간 책은 그만큼 가격이 나간다. 아마 매입 과정에서 좋은 가격을 쳐줘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 나의 일산 책사냥 1호가 드디어 등장했다. 폴 하딩의 <팅커스>. 지난주 노벨문학상 검색을 하다가, 문득 왜 우리나라에서는 퓰리처상 수상작이 인기가 없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고 역대 퓰리처상 수상작을 찾기 시작했다. 더 흥미로웠던 건, 도대체 누가 후보에 올랐는지 며느리도 모르는 노벨문학상과는 달리 퓰리처상은 최종 후보 3명과 각각 작가에 해당하는 작품이 발표가 된다. 덤으로 수상작 뿐만 아니라, 역시 수상해도 무방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담보로 한 후보작 작가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메릴린 로빈슨, 한국계 미국 작가인 이창래 교수, 제인 정 트렌카 그리고 조너선 프랜즌 등등의 작가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초판만 찍고 품절 절판의 운명에 처하는 책이 많은 우리나라 도서 출판계의 특성상 5년 전에 나온 책들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중고서점의 경쟁력을 높이 사줄만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문학 취향을 가진 이가 내가 마음 속으로 찜해둔 책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서 종이에 적어온 목록과 위치를 신속하게 파악하며 나의 장바구니를 채워간다. 이달 말 독서 모임 책으로 정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도 있었다. 검색대에서 ! 있다라는 어느 애서가의 외침을 들으며 나와 비슷한 과의 사람이 여기에도 있군 하는 생각으로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지금도 계속 수집 중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눈에 띄었다. <모래그릇> 같은 최근간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책을 이 시리즈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된 점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마 노벨문학상이 아니었다면 요사 선생의 책은 여전히 출간되지 않았으리라.

 

 

 

 

일단 목표한 책사냥이 끝나자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 아래층을 살펴 보기 시작한다. 끌어안다시피한 철제 장바구니는 가득한 책들로 무겁지만, 마음은 이렇게 여유가 있구나.

 

알라딘 일산점은 아무래도 새로 오픈한 탓인지 셀렉션이 풍부하고 다양했다. 그리고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일산 사람들이 책의 선순환에 많이 기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처음에 알라딘에서 책을 사기만 하는게 아니라 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다가 몇 번 출입을 하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들을 여행가방에 수북하게 담아 가지고 판매에 나서는 장면을 보지 않았던가.

 

 

 

어제 일산점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품절/절판 도서 때문이 아니었던가. 위에서도 언급한 이창래 선생(내년부터 연세대 교수직을 맡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의 절판된 <가족>이 있다는 소식이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던가. 기왕이면 신간인 <생존자>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책과의 인연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대신 제인 정 트렌카의 <덧없는 환영들>이 있어서 냉큼 그 책을 집어왔다.

 

 

 

 

일산점에는 곳곳에서 자리를 펴고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책이 <서양 철학사>라니. 아이들이 보는 서양 철학사의 내용은 어떤 건지 궁금하다. 과연 저렇게 어려서 책을 읽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린 꼬맹이들도 엉금엉금 기어서 책장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그 사진도 찍고 싶었으나, 초상권 문제로 패스 -

 

 

 

 

 

 

 

개인적으로 알라딘 일산점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이 고풍스러운 계단이었다. 마치 서양의 오래된 어느 서점을 떠올리게 하는 나선형 계단이야말로 스타일은 현대식이지만 역시 고풍스러운 중고서점 로망의 완성이 아닐까.

 

이 넓은 공간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나도 잠시 앉아서 고른 책도 보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주말이라 그런지 아쉽게도 자리가 있는 의자에는 빽빽하게 사람들이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 책을 사기고 하고 또 읽기도 하는 공간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왠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공간에 가서 그렇게 뻗대고 책을 읽으면 좀 미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또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야말로 알라딘 중고서점의 장점이 아닐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전히 미숙한 우리의 시민 의식이었다. 음료대가 버젓이 입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시던 커피를 그냥 놔두고 떠나 버리다니. 설마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책이 물과는 상극이라는 점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는 사고를 좀 이해할 수가 없다. 열심히 일하시는 직원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매너 없는 행동은 좀 삼가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나의 첫 번째 알라딘 일산점 방문은 이렇게 주섬주섬 장바구니에 담은 7권의 책과 함께 끝났다. 그동안 숱하게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지만 어제처럼 많은 책을 구입한 것도 처음이. 많이도 샀네 그래. 언제 다 읽으려고. 하긴 아예 모두 살 작정을 하고 갔으니 너무 당연한 결과일까.

 

오래 전에 영화를 볼 적에 배우를 보고 영화를 보다가 그 다음에는 감독을 보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책도 비슷한 궤적을 쫓는가 보다. 처음에는 그저 재밌는 책을 골라 보다가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니 이제는 재밌는 책도 좋지만, 작가를 보고 책을 읽게 됐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고민할 없이 일단 사고 본다. 이렇게라도 스스로 위로하고 정당화하지 않으면 어제 너무 많이 샀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짧았지만 나름 알차고 보람 있었던 나의 첫 번째 알라딘 일산점 방문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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