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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제목만 봐서는 일단 이 책은 펠리시아라는 여성이 여행길에 겪는 경험이 담긴 책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포인트는 ‘보인다’라는 점이다.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는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요란한 물 갈퀴질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정이란 단어는 오디세이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이래 많은 문학의 전범이 된 귀환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 펠리시아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서사는 영국으로 떠난 연인을 찾아 나선 펠리시아라는 아일랜드 소녀의 여정을 담보한다. 그 여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전개될 지에 대해서는 오롯하게 작가의 몫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예를 따르기 위해 펠리시아가 갖추어야할 것들은 차고 넘치는 반면, 반대의 경우는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작동한다.
아무래도 더 가능성이 짙은 불행한 결말의 경우, 우선 펠리시아는 자신이 향하는 잉글랜드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조니 라이서트 말고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구하거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낯선 곳에 머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금도 넉넉한 편이 아니다. 영국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고향 아일랜드 억양도 또 다른 장애물이다.
그렇다면 펠리시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불문가지의 일일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저자는 그런 펠리시아를 위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을 한 명 선정해서 배치했다. 그의 이름은 힐디치. 퉁퉁하니 넉넉한 살집을 자랑하는 50대 구내식당 매니저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속에 더 무서운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해보지 않았을까?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해 보이는 바다 속에 무서운 백상어가 노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포스트 대처 시대에 낯선 영국 땅에서 미래의 아이 아빠인 조니 라이서트를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설정이겠지만, 유사 애인이 준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그를 추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방면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펠리시아는 교활한 힐디치처럼 조니의 소재를 찾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힐디치는 자신이 얻은 귀중한 정보를 펠리시아에게 전달한 의사가 전혀 없었다. 참, 영국군에 자원입대한 조니 라이서트는 펠리시아의 아버지 같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을 저버린 배신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펠리시아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더 좋은 남자들이 많다고 말했던 것일까.
윌리엄 트레버는 시시각각 힐디치라는 양의 탈을 쓴 인물이 조성해내는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위험에 대한 경고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준다. 어느 순간 우리는 그가 잔혹한 시리얼 킬러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아, 펠리시아 위험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마다 주인공 펠리시아는 위기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나간다. 하지만 이제 슬슬 악당으로서의 가면을 벗기 시작한 힐디치는 용의주도하고. 완벽한 알리바이라는 그물로 펠리시아를 유인해서 포획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윌리엄 트레버는 펠리시아의 주변에 힐디치라는 가장 위험한 인물을 배치한 뒤에도, 이상한 종교집단의 포교자들과 노숙자들을 이야기에 투입하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조니의 아이를 가진 펠리시아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신의 가정(과연 그럴까?)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수난을 겪을 정도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영국에서 그녀가 경험하게 된 고생들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녀 자신이 선택한 일련의 삶의 오류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말일까.
결국 소설에서 펠리시아는 조니를 찾아내는데 실패했다. 그들이 만난 아일랜드에서 조니는 실체를 가진 존재였지만, 그들이 뿌리를 잃은 영국 땅에서 조니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말해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찾는 펠리시아의 여정은 처음부터 실패로 귀결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절박한 펠리시아에게 조니는 일종의 구원을 상징했지만, 어쩌면 조니라는 존재 자체가 구원이 아닌 허상이 아니었을까.
조니를 구체화할 수 있는 정보는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나마 펠리시아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정보조차 불분명했다. 그나마 조니의 엄마에게 아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조니의 엄마는 아들에 대한 정보를 주기 거부했다. 심지어 펠리시아가 조니에게 전해 달라고 건넨 편지는 족족 태워 버렸다. 이런 불확실성과 비협조가 난무하는 가운데 무턱대고 영국으로 건너간 펠리시아가 조니를 찾을 수 있었다면 그건 기적이었으리라.
너무 이야기를 펠리시아에게 집중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한 힐디치에 대한 소개가 상대적으로 적어진 느낌이다. 아톰 에고이안이 연출한 영화에서 힐디치에게 희생당한 과거의 피해자들이 차례로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조용한 공포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전달되는 소년 시절 이래 힐디치가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을 거쳐 사회에서 유리된 사이코패스의 탄생은 그의 평범해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오싹한 공포를 자아냈다.
내가 생각하는 펠리시아의 여정은 결국 구원을 향한 길이었다. 그 여정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무던해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 진실로 위험한 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