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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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다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교보문고에서였는데, 우연히 만난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읽게 됐다.

 

이번에 새로 나온 문병일기를 읽으면서 예전에 만난 <단순한 열정> 생각이 났다. 치매로 정신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문병하면서 오토픽션의 대가 아니 에르노는 외국인 연하의 유부남과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졌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혼 준비도 했다지 아마.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는 치매를 앓으시면서도 바람난 딸의 행동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결국 아닌 것으로 판정이 났지만.

 

소설의 초반부터 등장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언급은 작가가 경험한 사랑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예고했다. 젊은 육신에서 발산되는 쾌락의 늪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평소에는 듣지 않던 유행가 가사 하나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모든 삶은 오로지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기다림으로 집중된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이어질 그와의 뜨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꼭 사랑이 어떠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평생 살면서 이런 불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싶다. 작가는 두 아들에게도 자신이 사랑에 빠진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보통의 경우, 아이들이 부모의 파트너들에게 적대적 경향을 보인다고 하던데 작가의 아들들은 어느 정도 자라서 그런진 몰라도 이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네 정서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랄까.

 

문학교수님이자 작가답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내연남에게 수도 없이 편지도 쓰고 그랬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아 보진 못했다. 이유는 유부남다운 신중함 때문이었다고 작가는 분석한다. 아니 그렇다면 이 선수는 작가와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그녀가 빠진 A라는 남자는 동구권 출신으로 실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추정할 만한 단서들을 작가는 극도로 신중하게 배제한다.

 

나는 또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가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않은 A와의 의사소통 문제였다. 같은 말을 구사하면서도 발생하는 숱한 오해와 왜곡들을 작가에 따르면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은 A가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었을까? 오로지 육체적 쾌락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마 그런 부분에 대해 더 이상 나가면 A의 실체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했나 싶기도 하다. 그런 부분이 이 오토픽션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인용 부분이 눈길을 끈다.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그로스만의 그 책을 몰랐기에 그냥 넘겨 버렸지만, 이제 그로스만과 그의 책이 존재하는 걸 알게 되니 좀 더 다른 느낌이랄까.

 

어쨌든 예의 A를 사랑했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니 에르노의 패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불륜과 그것을 살아있는 소설의 텍스트로 삼은 것에 대한 작가의 변명은 1도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팩트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결국 A는 작가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바스러뜨리듯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관계도 소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로 보지 않으면 잊을 수 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결국 시간이 기억도 파괴해 버린다. 내가 보기에 작가가 아무리 당의(糖衣)로 자신의 불륜을 포장했어도, 그것은 열정에 사로잡힌 지나친 집착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사의 균형을 위해서는 A의 목소리가 필요한데,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A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사유들은 너무 디테일하게 알 수 있는 반면, 열정의 또다른 실행자였던 A의 생각들은 전혀 알 수가 없고 너무나 파편적이다. 사랑에 대한 열정이 지나가고 나면, 가치로 변하게 되는 걸까? 허리케인 같은 사랑이 지나가고 나니 한 사람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사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등장한다.

 

간만에 다시 읽으니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신 다시 한 번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열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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