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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ㅣ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평점 :
우리는 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내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어지는 건 아닐까. 아름다움의 정수를 깨닫게 되는 순간, 다른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련을 덜게 되는 것. 반대로 그만큼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집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움에 미친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코 아키타였다. 승려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처럼 승려나 당대 사회 지배계급인 무사가 되길 원했으나, 자식은 언제나 그렇듯 부모의 뜻을 거스른다. 대신 17세 소년은 하이쿠에 혼을 빼앗긴다. 그리고 스스로를 눈의 시인으로 부른다.
사실 일본 문화 정수 중의 하나라는 하이쿠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아마 이건 정말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되는 그런 미지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한자 문화권 작가도 아닌 무려 프랑스 작가인 막상스 페르민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압축과 정형이라는 틀을 작가는 정확하게 이해하고서 이런 탐미적인 서사를 이끌어 내었단 말인가. 그런데 또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이런 가치전복적인 시도야말로 문학의 본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시도 말이다.
열일곱 음절 하이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소년은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유코의 무모할 정도의 패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에 끝이 있었던가? 그동안 소설 혹은 문학에서 만난 아름다움의 극한에는 자기파멸이 도사리고 있지 않았던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코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수 있다. 유코의 하이쿠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름다움이란 결국 주관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는 걸까.
유코를 찾아온 메이지 궁정 시인은 눈[雪]과 무채색에 몰두하는 젊은 시인에게 화가 소세키에게 색을 배워 보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라는 말이었을까. 소세키를 찾아 가는 길에, 유코는 얼음에 갇힌 미녀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는 구원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성의 희생을 통한 구원 서사라는 조금은 불편한 신화를 마주하게 된다. 막상스 페르민 작가의 인스타를 염탐해 보니, 정말 그는 눈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눈의 고장 알베르빌 출신이라 그런 걸까. 얼음이라는 감옥에 네에주(나중에 그녀가 누구인지 밝혀진다)를 박제한 막상스 페르민은 “숭고한” 이미지로 포장해서 청년 하이쿠 시인에게 구원을 선사한다. 그것도 영혼의 구원이 아닌 생사의 경계에서 삶이라는 물리적 구원을. 이게 최선이었을까.
페르민 작가의 다음 작품인 <검은 바이올린>에서처럼 <눈>에서도 소설 속의 새로운 소설이라는 방식의 전개가 펼쳐진다. 서사의 축이, 유코에서 소세키 선생과 프랑스 출신 곡예사 네에주(neige, 눈)와의 사랑으로 이동한다. 메이지 시대 제국의 무사였던 소세키가 외국에서 건너온 “공중에서 길을 잃은 금빛 새”와 만나 사랑에 빠져 버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에도/메이지 시대에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와 외국 여성의 혼인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언어의 장벽이나 관습이나 통념 따위는 어떻게 돌파했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마법이 있다는 표현으로 갈음할 수 있을까.
그런 현실적 질문들 대신 막상스 페르민 작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추구하는 탐미적 서사를 극한으로 밀어 붙인다. 결국 숱한 고민 끝에 자신이 사랑한 네에주의 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소세키. 유코는 그의 죽음을 아니, 자신이 눈 속에서 잃은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애도한다.
막상스 페르민의 색채 3부작의 신호탄인 <눈>을 다 읽고 난 다음의 기분은 스산함이었다. 꿀벌의 황금색, 저주 받은 바이올린의 검은색 그리고 죽음으로 종결되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애절함으로 눈이 부시게 흰 눈[雪]으로 이어지는 3부작 서사의 끝에는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 버린 그런 니힐리즘의 잔영만이 남았다. 하이쿠에 비친 투명한 아름다움과 왠지 모를 불편함의 혼재 때문인지 양가적 감정이 들끓는다. 아무래도 아름다움은 집착이지 싶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