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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ㅣ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세월호가 묻는 것
“정상적인 경우라면 세월호 사건은, 우리가 신문 사회면에서 흔하게 접하는 불운한 사고에 그쳤어야 하는 사건이다.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운이 나빠 또는 선원의 어떤 실수로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선원들의 침착한 대처와 해경의 신속한 대응으로 승객들이 모두 무사히 구조되어 집으로 귀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어야 할 사고가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냥 운이 나빠 즐거운 수학여행 날 겪게 된 작은 사고이자 살아가면서 어쩌다 한 번씩 겪는 재수 없는 일이었어야 한다.”
-진태원,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현실문화, 2015, 137쪽.
진태원의 말이 맞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났어야 할 일이 발생한 지 1000일이 넘도록 진상규명은커녕 안개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인양이 결정 났고, 다수의 시신이 수습되었으며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은 그새 성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세월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른다고 느낀다. 모르기 때문이다. 왜 사건 시작 후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왜 해경은 다른 기관의 구조 지원을 거절했는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지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인문학협동조합에서 기획해 펴낸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세월호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려는 여러 필자들의 성실한 시도를 담고 있다. 제각각의 시점과 방법론에서 출발한 글들이지만 이 글들은 종국에 하나의 질문에 이른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나는 국가는 어떤 곳인가.
우리를 국민으로 구성하고 구속하고 억압하고 보호하는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는 내가 행한 의무만큼 국가도 내게 의무를 다 하리라는 것이다. 세월호는 이 기대가 헛되었다는 것을, 이 국가는 국민을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도, 달리 말해 재해나 사고로부터도 보호할 의도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내보인 사건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 반 후, 몇 주 동안 열리면서 결국 대통령의 탄핵 가결까지 이끌어 낸 촛불집회에서 터졌던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세월호와 별개로 설명될 수 없다. 아니, 이 정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세월호와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긴밀한 관계에 놓인 두 일, 세월호 참사와 촛불 집회에서 터진 물음은 그러므로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곳은 (어떤) 나라인가.
국가, 개인, 국민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흔히 떠올리는 만큼 답하기 어렵다. 대신 우리가 국가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을 중심에 놓으며 좀더 구체적인 상상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노명우는 우리가 “국가를 그저 주어진 조건으로, 근원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36쪽) 여긴다고 했고 진태원은 “가장 단단한 현실”(145쪽)이라 일컬었다. 두 논자의 간결한 말은 국가의 외부를 그리는 일이 극히 어려움을 드러낸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할 때 역시 그 ‘세상’이 가리키는 바는 기실 이 국가, 한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는 곧 세상이다.
지나치게 자주 들리는 ‘국민’이란 말은 이를 방증하는 또 다른 예다. 시민, 인민, 혹은 그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때에도 우리는 국민, 즉 국가의 백성이라는 말을 쓴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이들은 시청자와 같은 잠재적 소비자를 망설임 없이 국민으로 칭한다. 한 케이블 방송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국민 오디션’을 자칭한 것은 그것의 규모를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국민이란 말과 국민으로 지칭되는 것이 아주 친숙하다는 것, 우리는 무의식적이며 일상적인 수준에서도 국가와의 관계로 정의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 오랜 독재가 유물로 남기고 간 국가주의가 모세혈관처럼 개개인의 무의식까지 침투한 결과다. 실질적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며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보안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 또한 국가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에서 국민은 개인을 호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며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비국민을 만들어 내는 국가
참사 후 정부의 대응 아닌 대응에 절망하며 “나 대한민국 국민 아니에요. 떠날 겁니다. 국가가 내 자식을 버렸으니 나도 국가를 버립니다.” 라고 말한 한 유가족의 반응은 국가의 의무 미이행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동시에,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간주되는 국가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얼마간 충격적이다.
진태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 참사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던 자연재해가 아니라 책임자들의 의도적 방기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체적인 사건”이었고, 국가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소주체(undersubjectivity)적”(140쪽)이었다. 허경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의 보장”을 “어떤 경우에도 두 번째로 밀릴 수 없는” “항구적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 국가라고 말한다(303쪽). 그러나 세월호 앞에서 국가는 “치안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공백을 초래하는 사건, 사고를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처리하는” 데에만 온 관심을 쏟는 “치안 기계”(142쪽)였음이 밝혀졌다. 한 편에선 안산이 아니라 “강남”의 아이들이 탔던 배였어도 국가가 이처럼 무성의하고 잔인했겠느냐는 탄식이 터져 나왔는데, 김동춘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 편향성”을 띄므로 이는 합리적 의심이라 하겠다. 계급 편향적인 국가는 “공권력을 행사해서 인민을 보조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거대 이익집단 같은 사적 권력이 과도한 힘을 행사하도록 허용”하거나 “부작위 혹은 비행동을 함으로써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자들을 의도적으로나 비의도적으로 방치하고 무시”(164-165쪽)하는데, 이는 세월호 침몰 직후 사설 해양구조업체인 언딘에 해경이 수색과 구조 업무를 맡기고 민간 잠수사의 자발적 구조 활동을 금지한 데서도 드러난다(165쪽). 생명이 위험에 처한, 국가가 가장 필요하던 때에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세월호의 승객들은 여권에 쓰인 국적과 상관없이 그 순간 비국민으로 밀려났다. 권창규의 다음과 같은 요약은 세월호가 어째서 사고에 머무르지 않고 제 역할을 하지 않은 국가가 일으킨 ‘사건’ 혹은 ‘참사’가 되는지 뼈아프게 보여준다: “어느 국가도 경제력의 징후에 이토록 힘들여 봉사한 적이 없었다. 세월호 사고는 자본과 일체를 이루는 공리계에서 태어난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 축적에 방해가 되는 국민들을 사실상 학살한 결과다.”(263쪽)
애도, 정의, 혐오
사건 직후, 사회의 지배적 자세는 애도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수학여행을 가던, 아직 충분히 살아보지도 못한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선장이 ‘가만히 있으라’라는 안내방송을 내보내고 혼자 살아 도망쳤다는 사실이 사건의 비극성을 키우며 애도는 당위적 태도로 여겨졌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런 듯했다. 애도에 대한 피로와 혐오가 비어져 나온 것은 유가족과 피해자가 정의를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진 상실을 슬퍼함으로써만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면, 세월호가 그런 일이었다면 유가족은 공감 이상의 무엇, 정의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이는 ‘어쩔 수 없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유가족은 진상규명과 처벌, 달리 말해 ‘정의’를 요구하며 정권과 권력자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180쪽).
유가족이 국가에 의사자 지정을 요구한다든가 보상금으로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거짓 선동을 일으킨다는 소문부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단식 농성 옆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으며 일베가 벌인 ‘폭식 투쟁’과 같은 사회적 괴롭힘에서 알 수 있듯,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은 ‘다수가 동의한 애도의 시기’가 지난 후에도 정의를 요구하며 굉장한 반동에 부딪쳤다. 일베의 이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는 크게 비난 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비난이 예상되는 가운데에도 이들이 당당히 상징적이며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광장’에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악스럽고 놀라운 일이다. 천정환은 이들의 몰염치한 당당함이 ‘배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천정환이 지목하는 대통령이다.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대통령은 “유가족을 외면하거나 사건을 대충 덮고 무마하는 세력의 수장으로서 계산된 행동”을 했으며 참사에 대한 “비공감과 반애도를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였다. “이를테면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하게 한, 또한 단식을 조롱하며 치킨 따위를 시켜먹는 행위의 ‘배후’”(204쪽)가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 논지에서 일베는 단순한 웹사이트가 아니라 “정권과 새누리당, 보수 언론과 암묵적으로 분업하고 상호작용”(206쪽)하는 정치 단체다. 이 분업과 상호작용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것이든, 주목해야 할 것은 정권과 권력이 자기들을 벌하지 않을 것을 일베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신들의 슬픔이 국가 경제에 해악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어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주류 언론과 기득권 세력들, 그리고 혐오 세력의 명령에 유가족들이 응했다면 한국 사회의 이 같은 비인간성은 노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유족의 요구가 일베의 행동을 불러온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권과 일베 등의 반응은 국민의 요구가 아무리 합당해도 그것이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면 곧장 혐오와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치안기계’로 작동하는 지금의 국가에 중요한 것은 애도도 정의도 아닌 국가의 국민에 대한 폭력적 권력유지 그 자체뿐이다.
모든 것이 시작될 질문
안산의 ‘촛불 행동’에 대한 정원옥의 글은 드물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애도가 가능하지 않을 때, 대상의 상실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비어 버린 것 같을 때 주체는 우울을 앓는다. 정원옥은 이웃과 함께 촛불을 들고 애도를 표한 안산 시민들에게서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를 ‘애도의 정치’로 명명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애도의 정치’란 무엇인가? (…) 즉 애도의 불가능성에서 우울증의 고통을 동력으로 삼아 애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창출하려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애도의 정치’는 국가의 공식 애도로부터 배제된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도록 국가와 사회에 호소하고 촉구하고 압박함으로써 죽은 자에 대한 충실을 다하려고 하는 남은 자들의 모든 실천적 행동을 함축한다.”(319-320쪽)
당연한 것인지 다행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베가 사는 세상에도 아직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많다. 사건 발생 직후 가장 먼저 달려가 수십 명을 구조한 인근 주민들, 잊지 않고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 그리고 지금까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바다에서 나오지 못한 사망자를 뒤로 하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라는 말에 피로와 지겨움을 느끼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은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노란 리본을 단다.
그러나 이것이 안심하고 희망만 가질 이유는 못 된다. 세월호가 가라앉게 내버려 둔 국가는 그대로고, 그 국가를 만든 사람들도 그대로다.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서, 그리고 세월호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질문해야 할지도 모른다. 진태원은 세월호 안에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망각을 종용하고 망자와 유족에게 모욕을 행한 이유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고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세월호 안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기득권 편입은 어려우니 상상적인 방식으로나마 세월호(와 세월호가 상징하는 모든 것들)와 자신의 (감정적인) 거리를 벌림으로써, 국가가 보호하는 ‘그들’의 편에 속한다고 상상함으로써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148-149쪽). 이 같은 태도는 지금의 국가를 변화시킬 수도 넘을 수도 없는 거대한 벽으로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노명우의 말대로 국가와 사회는 같지 않다. 사회가 인간이 둘 이상 모이면 생기는 것으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상호의존 관계(36쪽)라면 국가는 인위적이며 구성적이고 변화를 거듭하는 장치이고,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다시 물어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 이미 많이 늦었다. 이 국가의 수립부터 지금까지 국가의 폭력과 방조로 죽은 이들, 죽고 나서도 제대로 된 애도조차 표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이들은 너무 많다. 빨갱이와 폭도와 간첩과 불법시위대라고 이름 붙여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지금의 국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대신 질문의 대상으로 놓고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국가가 주조한 나, 국가에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나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그 사람이 되려면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팽목항에서 불어 온 바람이 스쳐 가게만 둘 수 없다면 나를 만든 국가를, 국가가 만든 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현실문화에서 서포터즈 잉문예술덕후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