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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세월호가 묻는 것 




“정상적인 경우라면 세월호 사건은, 우리가 신문 사회면에서 흔하게 접하는 불운한 사고에 그쳤어야 하는 사건이다.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운이 나빠 또는 선원의 어떤 실수로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선원들의 침착한 대처와 해경의 신속한 대응으로 승객들이 모두 무사히 구조되어 집으로 귀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어야 할 사고가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냥 운이 나빠 즐거운 수학여행 날 겪게 된 작은 사고이자 살아가면서 어쩌다 한 번씩 겪는 재수 없는 일이었어야 한다.” 


-진태원,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현실문화, 2015, 137쪽. 


진태원의 말이 맞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났어야 할 일이 발생한 지 1000일이 넘도록 진상규명은커녕 안개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인양이 결정 났고, 다수의 시신이 수습되었으며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은 그새 성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세월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른다고 느낀다. 모르기 때문이다. 왜 사건 시작 후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왜 해경은 다른 기관의 구조 지원을 거절했는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지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인문학협동조합에서 기획해 펴낸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세월호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려는 여러 필자들의 성실한 시도를 담고 있다. 제각각의 시점과 방법론에서 출발한 글들이지만 이 글들은 종국에 하나의 질문에 이른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나는 국가는 어떤 곳인가. 

 

우리를 국민으로 구성하고 구속하고 억압하고 보호하는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는 내가 행한 의무만큼 국가도 내게 의무를 다 하리라는 것이다. 세월호는 이 기대가 헛되었다는 것을, 이 국가는 국민을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도, 달리 말해 재해나 사고로부터도 보호할 의도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내보인 사건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 반 후, 몇 주 동안 열리면서 결국 대통령의 탄핵 가결까지 이끌어 낸 촛불집회에서 터졌던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세월호와 별개로 설명될 수 없다. 아니, 이 정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세월호와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긴밀한 관계에 놓인 두 일, 세월호 참사와 촛불 집회에서 터진 물음은 그러므로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곳은 (어떤) 나라인가. 


국가, 개인, 국민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흔히 떠올리는 만큼 답하기 어렵다. 대신 우리가 국가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을 중심에 놓으며 좀더 구체적인 상상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노명우는 우리가 “국가를 그저 주어진 조건으로, 근원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36쪽) 여긴다고 했고 진태원은 “가장 단단한 현실”(145쪽)이라 일컬었다. 두 논자의 간결한 말은 국가의 외부를 그리는 일이 극히 어려움을 드러낸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할 때 역시 그 ‘세상’이 가리키는 바는 기실 이 국가, 한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는 곧 세상이다. 


지나치게 자주 들리는 ‘국민’이란 말은 이를 방증하는 또 다른 예다. 시민, 인민, 혹은 그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때에도 우리는 국민, 즉 국가의 백성이라는 말을 쓴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이들은 시청자와 같은 잠재적 소비자를 망설임 없이 국민으로 칭한다. 한 케이블 방송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국민 오디션’을 자칭한 것은 그것의 규모를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국민이란 말과 국민으로 지칭되는 것이 아주 친숙하다는 것, 우리는 무의식적이며 일상적인 수준에서도 국가와의 관계로 정의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 오랜 독재가 유물로 남기고 간 국가주의가 모세혈관처럼 개개인의 무의식까지 침투한 결과다. 실질적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며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보안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 또한 국가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에서 국민은 개인을 호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며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비국민을 만들어 내는 국가 


참사 후 정부의 대응 아닌 대응에 절망하며 “나 대한민국 국민 아니에요. 떠날 겁니다. 국가가 내 자식을 버렸으니 나도 국가를 버립니다.” 라고 말한 한 유가족의 반응은 국가의 의무 미이행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동시에,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간주되는 국가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얼마간 충격적이다. 


진태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 참사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던 자연재해가 아니라 책임자들의 의도적 방기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체적인 사건”이었고, 국가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소주체(undersubjectivity)적”(140쪽)이었다. 허경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의 보장”을 “어떤 경우에도 두 번째로 밀릴 수 없는” “항구적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 국가라고 말한다(303쪽). 그러나 세월호 앞에서 국가는 “치안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공백을 초래하는 사건, 사고를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처리하는” 데에만 온 관심을 쏟는 “치안 기계”(142쪽)였음이 밝혀졌다. 한 편에선 안산이 아니라 “강남”의 아이들이 탔던 배였어도 국가가 이처럼 무성의하고 잔인했겠느냐는 탄식이 터져 나왔는데, 김동춘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 편향성”을 띄므로 이는 합리적 의심이라 하겠다. 계급 편향적인 국가는 “공권력을 행사해서 인민을 보조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거대 이익집단 같은 사적 권력이 과도한 힘을 행사하도록 허용”하거나 “부작위 혹은 비행동을 함으로써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자들을 의도적으로나 비의도적으로 방치하고 무시”(164-165쪽)하는데, 이는 세월호 침몰 직후 사설 해양구조업체인 언딘에 해경이 수색과 구조 업무를 맡기고 민간 잠수사의 자발적 구조 활동을 금지한 데서도 드러난다(165쪽). 생명이 위험에 처한, 국가가 가장 필요하던 때에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세월호의 승객들은 여권에 쓰인 국적과 상관없이 그 순간 비국민으로 밀려났다. 권창규의 다음과 같은 요약은 세월호가 어째서 사고에 머무르지 않고 제 역할을 하지 않은 국가가 일으킨 ‘사건’ 혹은 ‘참사’가 되는지 뼈아프게 보여준다: “어느 국가도 경제력의 징후에 이토록 힘들여 봉사한 적이 없었다. 세월호 사고는 자본과 일체를 이루는 공리계에서 태어난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 축적에 방해가 되는 국민들을 사실상 학살한 결과다.”(263쪽) 


애도, 정의, 혐오 


사건 직후, 사회의 지배적 자세는 애도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수학여행을 가던, 아직 충분히 살아보지도 못한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선장이 ‘가만히 있으라’라는 안내방송을 내보내고 혼자 살아 도망쳤다는 사실이 사건의 비극성을 키우며 애도는 당위적 태도로 여겨졌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런 듯했다. 애도에 대한 피로와 혐오가 비어져 나온 것은 유가족과 피해자가 정의를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진 상실을 슬퍼함으로써만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면, 세월호가 그런 일이었다면 유가족은 공감 이상의 무엇, 정의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이는 ‘어쩔 수 없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유가족은 진상규명과 처벌, 달리 말해 ‘정의’를 요구하며 정권과 권력자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180쪽). 


유가족이 국가에 의사자 지정을 요구한다든가 보상금으로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거짓 선동을 일으킨다는 소문부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단식 농성 옆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으며 일베가 벌인 ‘폭식 투쟁’과 같은 사회적 괴롭힘에서 알 수 있듯,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은 ‘다수가 동의한 애도의 시기’가 지난 후에도 정의를 요구하며 굉장한 반동에 부딪쳤다. 일베의 이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는 크게 비난 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비난이 예상되는 가운데에도 이들이 당당히 상징적이며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광장’에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악스럽고 놀라운 일이다. 천정환은 이들의 몰염치한 당당함이 ‘배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천정환이 지목하는 대통령이다.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대통령은 “유가족을 외면하거나 사건을 대충 덮고 무마하는 세력의 수장으로서 계산된 행동”을 했으며 참사에 대한 “비공감과 반애도를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였다. “이를테면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하게 한, 또한 단식을 조롱하며 치킨 따위를 시켜먹는 행위의 ‘배후’”(204쪽)가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 논지에서 일베는 단순한 웹사이트가 아니라 “정권과 새누리당, 보수 언론과 암묵적으로 분업하고 상호작용”(206쪽)하는 정치 단체다. 이 분업과 상호작용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것이든, 주목해야 할 것은 정권과 권력이 자기들을 벌하지 않을 것을 일베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신들의 슬픔이 국가 경제에 해악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어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주류 언론과 기득권 세력들, 그리고 혐오 세력의 명령에 유가족들이 응했다면 한국 사회의 이 같은 비인간성은 노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유족의 요구가 일베의 행동을 불러온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권과 일베 등의 반응은 국민의 요구가 아무리 합당해도 그것이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면 곧장 혐오와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치안기계’로 작동하는 지금의 국가에 중요한 것은 애도도 정의도 아닌 국가의 국민에 대한 폭력적 권력유지 그 자체뿐이다. 


모든 것이 시작될 질문


안산의 ‘촛불 행동’에 대한 정원옥의 글은 드물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애도가 가능하지 않을 때, 대상의 상실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비어 버린 것 같을 때 주체는 우울을 앓는다. 정원옥은 이웃과 함께 촛불을 들고 애도를 표한 안산 시민들에게서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를 ‘애도의 정치’로 명명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애도의 정치’란 무엇인가? (…) 즉 애도의 불가능성에서 우울증의 고통을 동력으로 삼아 애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창출하려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애도의 정치’는 국가의 공식 애도로부터 배제된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도록 국가와 사회에 호소하고 촉구하고 압박함으로써 죽은 자에 대한 충실을 다하려고 하는 남은 자들의 모든 실천적 행동을 함축한다.”(319-320쪽) 


당연한 것인지 다행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베가 사는 세상에도 아직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많다. 사건 발생 직후 가장 먼저 달려가 수십 명을 구조한 인근 주민들, 잊지 않고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 그리고 지금까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바다에서 나오지 못한 사망자를 뒤로 하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라는 말에 피로와 지겨움을 느끼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은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노란 리본을 단다. 


그러나 이것이 안심하고 희망만 가질 이유는 못 된다. 세월호가 가라앉게 내버려 둔 국가는 그대로고, 그 국가를 만든 사람들도 그대로다.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서, 그리고 세월호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질문해야 할지도 모른다. 진태원은 세월호 안에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망각을 종용하고 망자와 유족에게 모욕을 행한 이유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고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세월호 안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기득권 편입은 어려우니 상상적인 방식으로나마 세월호(와 세월호가 상징하는 모든 것들)와 자신의 (감정적인) 거리를 벌림으로써, 국가가 보호하는 ‘그들’의 편에 속한다고 상상함으로써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148-149쪽). 이 같은 태도는 지금의 국가를 변화시킬 수도 넘을 수도 없는 거대한 벽으로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노명우의 말대로 국가와 사회는 같지 않다. 사회가 인간이 둘 이상 모이면 생기는 것으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상호의존 관계(36쪽)라면 국가는 인위적이며 구성적이고 변화를 거듭하는 장치이고,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다시 물어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 이미 많이 늦었다. 이 국가의 수립부터 지금까지 국가의 폭력과 방조로 죽은 이들, 죽고 나서도 제대로 된 애도조차 표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이들은 너무 많다. 빨갱이와 폭도와 간첩과 불법시위대라고 이름 붙여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지금의 국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대신 질문의 대상으로 놓고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국가가 주조한 나, 국가에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나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그 사람이 되려면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팽목항에서 불어 온 바람이 스쳐 가게만 둘 수 없다면 나를 만든 국가를, 국가가 만든 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현실문화에서 서포터즈 잉문예술덕후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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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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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나 용역이나 다를 바 없어요.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니까요.” 

-존슨 너새니얼 포르투, 박광헌 역, <대한민국 무력정치사>, 135쪽, 현실문화, 2016, 용산 참사 피해자의 말 


1. 국민의 죽음 


2015년 11월 14일에 있던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농민 백남기는 물대포를 맞아 쓰러진다. 백농민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농민들은 지금은 직권이 정지된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쌀값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 시위에 나왔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국가의 폭력이었다. 차벽 앞으로 다가가던 백농민이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진 후에도 경찰은 15초 이상 물대포를 멈추지 않았고, 백농민은 곧장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외상성 뇌출혈을 진단받은 후 지난 해 9월 25일 사망했다. 백남기씨가 쓰러진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경찰은 단 한 차례의 공식적 사과도 않은 채 사망 이후엔 부검을 강요하며 망자와 유가족의 존엄성을 훼손하려 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의 공약 미이행에 대해 항의한 국민이 시위에 나갔고,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했다. 요약하자면 국가의 공권력 행사로 국민이 죽은 것이다. 헌법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장하지만 백농민에게 물대포를 쏜 국가는 국민의 권력으로 돌아가는 공동체라기보다 공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의 이름으로 실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국가 행위자’의 의지로 작동되는 장치이며 이 국가 앞에서 국민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다. 더 이상한 것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개인의 죽음 앞에 시민사회가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일까? 


인사동의 노점상 강제 철거에 관한 묘사로 시작하는 존슨 너새니얼 포르투의 책 <대한민국 무력정치사>는 이와 유사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용역들이 대낮에 민간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어째서 민주화와 자본주의화를, 달리 말해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고도의 능력을 갖춘 한국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가? 왜 시민들은 백일하의 폭력 앞에서도 무감하고 국가는 공적 사안에 경찰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2. 중산층의 성장과 민영화되는 공권력: 용역은 어떻게 국가를 비가시화 하는가 


“국가 형성은 정치 엘리트가 정당한 폭력(국가가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폭력)과 부당한 폭력의 경계를 되도록 분명히 규정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과정”(책 24쪽)이고, 이상적 정의에 의하면 국가란 경찰과 군대 등을 통해 폭력을 독점하는 조직으로서 한 국가 내에서 ‘합법적’인 폭력은 국가가 소유하고 행사하는 폭력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를 완벽히 실현하는 국가는 없다. 해방 후 권력이 공동(空洞) 상태였을 때 “국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이”인 국가 행위자와 “국가를 세우려는 이, 또는 국가 행위자가 되려고 힘쓰는 이”인 국가 추구자는 중첩되었고 국가 행위자가 되려던 국가 추구자는 ‘불법적’인 무장 세력과 종종 동맹을 맺었다. ‘정치 깡패’의 탄생이다. 서북청년단 같은 비국가집단이 경찰과 민간인의 충돌로 시작된 제주 4.3 사건에 깊이 개입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포르투에 의하면 국가의 능력이 낮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로, 국민을 통제할 능력을 합법적으로 갖추지 못한 국가(행위자/추구자)는 이렇게 비국가적 집단과 협력한다.


‘범죄자’의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벌을 내리는 것이 국가라는 것을 상기하면 이는 아이러니하지만 비국가적 폭력 집단과 국가는 계약 집행, 분쟁 해결, 재산권 보호 등을 행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둘의 협력은 불법과 합법의 차이를 제하자면 비슷한 일을 하는 두 집단 사이의 상부상조로 볼 수도 있다. 그럼 다시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국가의 능력이 낮았던 해방공간과 같은 혼란한 시기가 아닌,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춘 국가와 범죄 집단의 협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승만 이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이승만의 잔여 세력들을 경계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해야 했고, 71년 이후 박정희는 비국가적 세력보다는 국가적 기구의 이용을 명백히 더 선호한다. 한 경찰의 말대로 그 때는 “경찰이 깡패”(책 161쪽)였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유신헌법 등의 장치로 사실 상의 1인 통치를 정비해 놨으니 굳이 국가 외부에 손을 뻗을 동기가 없었다. 


변화는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 동안에 찾아온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강압적 체제를 유지하던 전두환은 포르투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을 “오해”하고 권위주의적 조치를 조금씩 해제한다. 이와 더불어 경제성장과 도시화로 인한 교육받은 중산층이 증가하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이 국내에서 개최되며 한국의 국가 행위자들은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 내외부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던 도시 중산층은 국가에 압력을 행사할만한 권력으로 국가 행위자의 국민에 대한 자율성(국가가 사회 세력에 대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저하시켰고, 국제 행사의 개최는 외부의 시선을 집중시킴으로써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일종의 감시로 작용한 것이다. 권위주의 철폐라는 목표를 공유한 노동계급, 학생, 중산층의 연대로 전두환은 결국 몰락하고 지금까지도 한국 민주주의의 정수로 상상되는 대통령 직선제 역시 이 시기의 개헌을 통해 정착한다.  


그러나 전두환 이후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됐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이 되어 ‘보통 사람’의 시대를 연 것은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닌 군부 출신의 노태우였다. 또한 87년 6.29선언 이후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은 이전의 연대가 무색하게도 중산층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노동자에겐 과격, 폭력과 같은 오명이 씌워진다. 이는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 안정과 이익에 노동자의 권익 상승이 위협적일 수 있음을 깨달으며 학생-중산층-노동자간의 연대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을 촉진한 요소에는 노동계급의 이해에 반하지만 중산층과 국가행위자의 이익에는 부합하는 도시미화와 재개발 사업이 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행위자와 비국가적 폭력 집단의 협력은 정착, 강화된다. ‘반민주적’인 지난 정권을 환기하는 국가적 폭력 수단의 활용이 어려워지자 국가는 공권력을 ‘민영화’한 것이다. ‘공권력 외주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민영화는 직접적으로 국가의 개입을 환기하지 않으면서도 중산층과 국가행위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실천할 수 있게 하며 언론을 비롯한 외부의 관심을 차단한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입을 비가시화 한다. 2009년 일어난 용산 참사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정당한 보상 없이 쫓겨나야 했던 세입자들의 투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언론과 시민의 관심은 경찰이 투입된 단 하루에 집중되었다.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상대적 관심 수준은 그것의 정치화 수준과 상관관계가 있”(책 143쪽)는 포르투의 주장을 적용하자면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경찰이 개입한 그 날 전까지의 투쟁을 ‘국가적’ 혹은 ‘정치적’이지 않은 일로 여긴 것이다.


3. 중산층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잠깐 용역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한국인에게 이제 용역은 ‘용역 깡패’로 불리기도 하며 강제 철거를 전문으로 하는, 경찰과 비슷한 차림이지만 경찰은 아니며 불법적 폭력을 휘두르고도 크게 벌 받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용역은 “물질적 재화의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일”을 의미하고, 같은 한자를 쓰는 용역경비업은 “국가 중요 시설이나 산업 시설, 공공시절, 주택, 창고, 주차장 따위를 경비하거나, 운반 중에 있는 현금, 유가 증권, 귀금속, 상품 따위의 도난과 화재를 방지하는 일을 대행하여 맡는 영업”이다. 아마 용역의 한 종류인 경비업이 변형된 것이 지금의 용역(깡패)일 것이다. 단어는 언중의 쓰임에 따라 생성, 변화, 소멸을 겪기 마련이니 사람들이 “강제 철거 전문 회사”(책 122쪽)를 용역이라고 계속 부른다면 언젠가는 국어사전에도 그렇게 등재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 용역이라는 말의 쓰임은 이들이 누구에 의해 고용되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법적인 서비스 제공에도 처벌받지 않는 초법성을 가린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백남기 농민은 국가 폭력의 피해자다. 포르투가 책에서 중점적으로 분석한 국가와 비국가적 집단의 협력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의 정수인 경찰에 의한 폭력이 원인이었다. 국가자율성의 감소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민간의 무력 집단과 협력해야 했지만 전두환이 내려간 지 28년 후인 2015년, 국가는 건물주도, 재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지자체도 아닌 중앙 정부, 다시 말해 국가행위자 자체를 겨냥하는 시위에 나온 시민에게 사망에 이르는 폭력을 가했다. 포르투의 분석을 따르자면 박근혜 정권의 권력은 시민의 ‘정치화된’ 죽음 이후에도 최순실과 관련한 일들이 밝혀지기 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국가가 가장 피하려는 중산층과 그 외의 집단의 연대, 즉 “국가가 범죄적 무력 시장에서 민간 행위자와 협력하게 압박하는 바로 그 기제”라는 “중산층 동원의 잠재성”(책 169쪽)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까지 이르러야 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되자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승리, 시민의 승리라며 기뻐했다. 기뻐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에겐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은 사안이 누군가에겐 생과 사를 가를 만한 일이었다. 중산층은 언제 동원되는가? 이에 대해선 포르투가 <대한민국 무력정치사>를 통해 답했다. 사안이 충분히 정치적일 때, 경찰과 같은 ‘국가’의 권력이 개입되고 갈등이 극에 이를 때. 그렇다면 중산층이 움직일 정도로 ‘중대하지 않은’ 사안에서 죽어가는, 죽고도 잊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중산층의 이익에 부합하지만 자기의 이익에는 반하는 일에 항의하는 하층계급의 저항권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이들이 용역 사용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사안을 중산층 동원 없이 정치화 할수 있을까? 포르투의 분석이 멈춘 지점에서 발생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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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는 정신분석 - 노답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우리 시대의 질문 4
김서영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1. ‘헬조선’이라는 명명


등장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헬조선이라는 말이 이렇게 널리 퍼진 것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이 말의 조소와 냉소, 절망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입에도 잘 붙는 이 말은 지옥을 뜻하는 영단어 헬(hell)과 대한민국 이전 한반도에 존재했던 봉건제 국가 조선이 결합돼 만들어졌다. 궁금한 점 하나. 왜 헬대한도 헬민국도 아닌 헬조선일까? 박노자는 이 이유를 현 한국에서 발견되는 봉건성에서 찾는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0657.html).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현실은 신분제가 공고하던 조선이나 형식적 신분제가 폐지된 지 오래인 21세기인 현재가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럴 듯한 해석이다. 그럴 만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 이후 첫 과반 득표로 당선되었던 대통령은 현재 지지율 5%내외를 오가며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권이 정지되었고, 이것도 충분치 않아 사람들은 토요일마다 시위장을 찾아 대통령 구속을 외친다. 이뿐만이 아니다. 매일 같이 언론에 문제로 등장하지만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사안들-청년실업, 물가상승, 지나치게 낮은 최저임금, 존재만으로 돈을 치러야 하는 월세의 상승, 각종 소수자에 대한 멈추지 않는 혐오 등-로 헬조선의 오늘을 사는 것은 힘겹기만 하다. 그러니까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민국가의 이름은 이 땅에는 너무 아까우므로, 헌법에 명시된 것만 지켜져도 현실이 이렇게까지 나쁠 리는 없으므로. 


2. 헬조선에 왜 정신분석이 필요할까


현실문화의 신간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이와 같은 헬조선의 헬스러운 현실을 정신분석으로 진단하며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도다. 의아함을 자아낼 수 있는 제목이다. 정신분석은  개인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증상과 고통 또한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개인이 모여 이뤄진 것이 사회이고,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자기를 만들어 가는 (혹은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 개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분석을 위해선 사회과학이란 학문이 존재하지만 개입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 전체를 기초 단위로 그 안의 현상을 들여다 볼 때 사회 내에 구성원이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히기 십상이다.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둘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 한다. 한국을 주어로 하는 문장, 이를 테면 “한국은 너무 경쟁이 심해서 힘들다”에서 ‘한국’은 결국 한국인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것이고 이 집합적 한국인은 개별적 한국인 한명 한명을 일컫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책의 이 같은 접근은 사회적으로 유용할 정신분석 적용의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정신분석이 개인의 증상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개인이 모인, 그리고 개인의 증상에 원인을 제공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증상, 진단, 처방


책은 아홉명의 필자들이 각자의 관점과 방법론을 통해 열한 개의 소주제에 대해 논한 글로 채워져 있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각각의 글은 현 한국사회에서의 자아, 관계, 욕망, 사회문제로 분류된다. 백상현과 김소연은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통해 자아란 것은 본래 ‘공백의 허무’이며, 이 허무를 직시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무의식을 이해해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소연에 따르면 이 때 필요한 공부가 바로 정신분석적 공부다. 각종 이론에 해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요체가 무의식에 있음을 알고 그 곳에 가 닿기 위해서다. 이성민과 정지은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위아래를 칼 같이 나누는 한국사회에선 일상생활에서 민주적인 관계를 이루기 어렵다. 이성민의 말대로 한국인의 관계가 ‘빈곤’한 이유다. 깊고 의미 있는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사랑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N포 세대’ 담론에서 보듯 양극화와 청년 빈곤의 시대에 사랑은 점점 더 멀어지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개인이 자신의 욕망과 결여를 통해 타인을 만남으로써 주체로 설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이고 본질적인 방법이다. 언급했듯 사회는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다. 때문에 사랑과 관계의 빈곤은 개별자의 빈곤을 넘어 사회적 자원의 감소에까지 이르게 한다. 사랑을 포기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정경훈과 김석은 몸과 돈이라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 욕망의 대상을 다룬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강도 높은 외모적 억압의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적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졌다. 반면 정경훈은 이 억압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입장에 초점을 둔다. 예쁘고 날씬한 외모를 가지라는 메시지는 너나 할 것 없이 받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이 외모에 개인의 환상이 얼마나 깊게 연루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외모 민주주의’ 달성이라는 사회 차원에서의 목표와 더불어 개인에게도 할 일이 주어진다. 바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외모 자아’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돈에 대한 김석의 글도 비슷한 요지다. 짐멜이 <돈의 철학>에서 논했듯 돈은 물질적 관계를 탈인격화하는 도구로 기능하며 우리가 평등한 계약 주체로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긍정적 기능과 동시에 물신화되며 주체를 소외시키는 부정적 기능도 갖는다. 김석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태도이다. 항문기 아이가 똥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돈을 욕심껏 움켜쥘 수도, 타인을 위해 베풀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돈의 통제자가 되는 것만이 소외되지 않는 길이다.


이만우와 홍준기는 반사회적 폭력범죄와 세대갈등 그리고 사회적 국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이만우에 따르면 강력범죄자를 예외적 악마로 취급하고 도덕주의적 비판에 빠지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범죄율을 낮추고 피해가 최소화되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증오에 대한 완충지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피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세계를 파편으로 파악해 타인에게 증오를 쏟는 사람들로 가득 찬 ‘조증 문화(manic cultures)’가 만연하지 않으려면 증오를 건강한 방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홍준기의 사회적 국가론과도 맞물린다. 개인에게만 집중하는 라캉 이론을 비판하며 홍준기는 힘센 아버지들 밑에서 신음하는 젊은 ‘오이디푸스들’의 개별적 저항과 함께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가의 사회성이 진일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유년기에 ‘좋은 엄마’로 대표 되는 좋은 양육자가 필요하듯 사회의 ‘엄마’ 역할은 결국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몰리는 현실을 돌아 보게 한다.

 

김석의 글은 매주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인파가 시위를 위해 거리로 나서는 현 시국과 겹쳐 읽어볼 만하다. 박정희 등의 죽은 아버지를 현재로 끊임없이 소환하는 ‘정치적 아버지 찾기’는 독재자의 자식을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그 대통령은 헌정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를 불러왔다. 김석에 의하면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을 헌법적 기관이 아닌 인격체로 파악하며 감정을 투사하는 한국 특유의 현상은 비어 있는 것이 마땅한 권력의 중심부를 ‘진정한 아버지 혹은 그의 적자’로 채우려는 욕망에서 일정 부분 기인한다. 그러나 이처럼 무서운 아버지나 그의 적통을 이을 아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 모두를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해줄 것을 기대하는 건 반민주적이며 시대착오적이다. 특정 인물을 ‘예외 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주권자로 ‘모실’ 것이 아니라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권력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누구도 중심은 차지할 수 없음을, 비어 있는 중심으로 인해 발생되는 혼란과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수용해야 한다. 이 혼란과 갈등을 야기하고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김석의 언어를 빌리자면 ‘제도적 부정성’을 부인하지 않고 그것이 정치의, 삶의 일부임을 껴안을 때만이 우리는 헌법에서 말하는 진정한 주권자 하나하나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4. 원론의 효용 


‘정신분석’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드러나듯 ‘헬조선’의 증상에 대한 논자들의 해결책은 물질적이지도, 아주 구체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허무’에까지 비견되는 자아의 비어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개개인에게 알맞은 ‘외모 자아’를 찾아야 하며,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주체로 거듭나야 하는 것에 더해, 다 함께 적대성을 일상의 일부로 포용하며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좋은 말이지만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누군 몰라서 안 하나’ 싶은 의문이 피어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빠른 길이 있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과 같은 ‘헬조선’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론적이란 말은 때로 실효성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 즉 뿌리에 다다름을 뜻한다. 표피의 생채기만을 땜질하듯 처치하며 산다면 속은 계속 곪는다. 김서영의 정의처럼 우리는 각자 인생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흡수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동시에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개별적인 존재로 탄생하는 사람,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그 여정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 사람, 즉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할 수 있는 사람”인 전문가는 깊이 행복한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두려움을 딛고 전문가로 서고자 할 때 필자들이 제시하는 ‘원론’은 새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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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선언 -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한우리 기획.번역 / 현실문화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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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은 선언을 이렇게 정의한다. 1.널리 펴서 말함. 또는 그런 내용. 2. 국가나 집단이 자기의 방침, 의견, 주장 따위를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함.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행위는 선언의 내용을 공적 의제로 만들려는 시도이며 선언하는 주체가 선언의 내용을 실행하거나 견지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또한 청자/독자를 전제하는 말/글이라는 점에서 이 선언에 동참해 달라는 요구이고, 동지가 되어 함께 행동하자는 촉구이기도 하다. 한우리의 책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연구, 2016)은 반전운동과 성혁명으로 서구가 시끄러웠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발행된 선언을 번역해 엮었다.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 다시 정리하자면 여기 실린 선언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세계관, 윤리, 이데올로기를 선언자의 방침, 의견, 주장으로 취하며 이를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세상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고유한 개인으로 가부장제가 주는 고통을 겪으며 각기 다른 미래를 꿈꾼다. 이 선언들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결을 지닌다. <드센 년 선언문>(1969)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을 낙인찍는 단어인 ‘드센 년bitch’을 긍정적으로 전유한다. 내가 바로 네가 욕하는 그 드센 년이고, 드세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이 선언은 강하고 아름다운 ‘드센 년’들이 그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상처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함께하며 이 세계에 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강간 반대 선언문>(1971)은 강간을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논리적 결과로 명료하게 정의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대로 둘 이상이 개입되므로 섹스조차 ‘사회 관계’라면(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의지를 묵살하며 그의 존엄 파괴를 목표로 하는 강간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다. 이 시기 페미니즘 운동은 이렇게 개인적인 것, 그러므로 사소한 것이라 경시되어 온 일들이 실은 권력관계의 사회적이며 정치적 효과임을 논증하며 앞으로 진리로 여겨질 구호를 만들어 냈다. 바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1969)”가 그것이다. 이 선언문은 여성이 직면한 문제가 집단적인 문제이므로 해결책 또한 집단적 행동에서만 발견될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이지 않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대목은 특히 새겨 들을 만하다. 그들을 더 잘 조직해 현재의 운동에 활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거대한 운동”, 달리 말하자면 이 ‘거대한 운동’을 불러일으킨 세계에 다 같이 있고, 진정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이들의 '비정치성'에서도 정치적인 것은 발견될 테기 때문이다. 한편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멈춰라!>(1968)는 미스 아메리카 대회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젊고 예쁜 것만이 여성의 가치라는 사회의 메시지가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아주 한정된 종류의 여성상만 등장하는 한국 대중문화를 상기하면 가부장제적 미디어는 그 자체로 ‘미스 아메리카 대회’의 확장판으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1970)은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레즈비언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모든 여성이 폭발 직전까지 응축해놓은 분노”(113쪽)인 레즈비언은 “감히 남성들과 동등해지려는 여성들, 감히 남성의 특권에 도전하는 여성들, 감히 자신의 요구부터 먼저 들어달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을 낙인찍기 위해 남성들이 만들어낸 단어”(115-116쪽)이기도 한 것이다.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 즉 남성에게 순종하며 그의 욕망 충족을 위해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이 되길 거부하는 여성은 ‘여성’일 리가 없으니 이성애 위주의 사회에서 밀려나야 할 동성애자로 ‘격하’된다. 남자들에겐 경악스럽게 들릴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1967)은 한발 더 나아가 모든 남성을 제거하자고 말한다. 책에서 가장 급진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이 글은 남성의 효용과 존재 의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독립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정한 여성이라고 설파한다. 문장의 액면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더 읽어보자. 이 글에서 부정되는 남성은 자기에게만 매몰되어 타인과 진정한 교류를 할 수 없고 체제 내에서 안정과 권력만을 희구하는 자다. 가부장제적 남성성을 체화하고 추구하는 남성인 셈이다. 가부장제적 질서에 순응한다면 여성 역시 비판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빠에게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아빠딸(Daddy's girl)'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며 그러므로 남성거세결사단이 그리는 세계엔 남성과 마찬가지로 설 자리가 없다. 바꿔 말하면 남성거세결사단이 없애려는 '남성'은 구체적 개인이라기보다 가부장제적 남성성, 즉 이기심으로 뭉쳐 남을 사랑할 수 없는 감정적 불모성과 약자를 타자화하고 착취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키우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비인간성을 가리킨다. 이런 면에서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강력한 언어를 통해 페미니즘이 갈 길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사랑하며 사랑받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드러낸 글이다. 페미니즘이 실현되는 “진정한 공동체는 단지 종의 구성원이나 커플이 아닌, 서로의 개성과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개인들,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자유로운 영혼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곳이고, 이런 공동체에서만 “인종 정체성과 성 정체성의 결합이 그들의 전 생애를 결정”(<흑인 페미니스트 선언>, 148쪽)짓고 마는 흑인여성과 같은 피억압주체들이 마음껏 사랑하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탐험하고 발견하고 발명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농담을 던지고 음악을 만”들며, “이 모든 일을 충만한 사랑과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마법 같은 세상을 만”(<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 188쪽)들 수 있을 것이다.


작년의 메갈리아 탄생이나 올해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몇 개의 마일스톤을 거치며 페미니즘 담론은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다. 최근에는 트위터에서 시작된 각계의 성범죄에 대한 폭로가 있었고, 오래 숨겨졌던 성차별적 병폐가 여성들의 용기 덕에 드러났다. 물론 가해자들이 응분한 처벌을 받을지는 미지수고 고발 여성들은 위험과 불안에 떨어야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것 자체가 성과이며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고무적이다. 침묵 대신 고발을 택할 여자들은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코르셋을 벗어던진’ 여성들은 이제 누군가의 좋은 여자친구, 딸, 아내 대신 자기 자신이 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자기 선언을 마친 우리가 약 반 세기 전에 이루어졌던 <페미니즘 선언>을 지금 읽어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의 싸움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기 위해서다. 사적맥락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성으로 사는 것은 여전히 천형으로 느껴지지만 이만큼이나마 온 것은 계보와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하단 사실을 에너지 가득한 언어로 확인하는 것은 도리 없이 감동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유산은 좌절을 주기도 한다. 반세기전의 언어를 아직도 급진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가부장제의 공고함 앞에서 우리는 주저앉거나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선언들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도 전한다. 이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먼 연대다. 하지만 이 연대는 멀어서 깊어질 수 있다. 오래 전 저 먼 곳에서도 이런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우리에게 지금의 자리가 주어졌다는 걸 알게 된 후의 싸움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2016년의 한국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칭하는 우리는 우리보다 넓은 세계와 이어져 과거를 다시 쓰고 미래를 더 나은 길로 이끌어 가는 싸움의 긴 여정에 놓여 있고, 그렇기에 더욱 포기할 수 없다. <페미니즘 선언>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고통 받고 있지만 또 함께 싸우고 있다고. 이 싸움은 “가장 가난한 여성, 가장 악랄하게 착취당한 여성이”(<레드스타킹 선언문>, 46쪽) 최고의 성취를 달성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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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틴케이스 - 빨간 머리 앤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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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댓글에 공감이 네개나 달렸네요 알라딘님 제발 빨간머리앤 재입고시켜주세요 세개를 다 사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두개만으론 부족해요 다같이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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