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는 정신분석 - 노답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우리 시대의 질문 4
김서영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1. ‘헬조선’이라는 명명


등장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헬조선이라는 말이 이렇게 널리 퍼진 것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이 말의 조소와 냉소, 절망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입에도 잘 붙는 이 말은 지옥을 뜻하는 영단어 헬(hell)과 대한민국 이전 한반도에 존재했던 봉건제 국가 조선이 결합돼 만들어졌다. 궁금한 점 하나. 왜 헬대한도 헬민국도 아닌 헬조선일까? 박노자는 이 이유를 현 한국에서 발견되는 봉건성에서 찾는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0657.html).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현실은 신분제가 공고하던 조선이나 형식적 신분제가 폐지된 지 오래인 21세기인 현재가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럴 듯한 해석이다. 그럴 만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 이후 첫 과반 득표로 당선되었던 대통령은 현재 지지율 5%내외를 오가며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권이 정지되었고, 이것도 충분치 않아 사람들은 토요일마다 시위장을 찾아 대통령 구속을 외친다. 이뿐만이 아니다. 매일 같이 언론에 문제로 등장하지만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사안들-청년실업, 물가상승, 지나치게 낮은 최저임금, 존재만으로 돈을 치러야 하는 월세의 상승, 각종 소수자에 대한 멈추지 않는 혐오 등-로 헬조선의 오늘을 사는 것은 힘겹기만 하다. 그러니까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민국가의 이름은 이 땅에는 너무 아까우므로, 헌법에 명시된 것만 지켜져도 현실이 이렇게까지 나쁠 리는 없으므로. 


2. 헬조선에 왜 정신분석이 필요할까


현실문화의 신간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이와 같은 헬조선의 헬스러운 현실을 정신분석으로 진단하며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도다. 의아함을 자아낼 수 있는 제목이다. 정신분석은  개인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증상과 고통 또한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개인이 모여 이뤄진 것이 사회이고,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자기를 만들어 가는 (혹은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 개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분석을 위해선 사회과학이란 학문이 존재하지만 개입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 전체를 기초 단위로 그 안의 현상을 들여다 볼 때 사회 내에 구성원이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히기 십상이다.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둘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 한다. 한국을 주어로 하는 문장, 이를 테면 “한국은 너무 경쟁이 심해서 힘들다”에서 ‘한국’은 결국 한국인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것이고 이 집합적 한국인은 개별적 한국인 한명 한명을 일컫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책의 이 같은 접근은 사회적으로 유용할 정신분석 적용의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정신분석이 개인의 증상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개인이 모인, 그리고 개인의 증상에 원인을 제공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증상, 진단, 처방


책은 아홉명의 필자들이 각자의 관점과 방법론을 통해 열한 개의 소주제에 대해 논한 글로 채워져 있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각각의 글은 현 한국사회에서의 자아, 관계, 욕망, 사회문제로 분류된다. 백상현과 김소연은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통해 자아란 것은 본래 ‘공백의 허무’이며, 이 허무를 직시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무의식을 이해해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소연에 따르면 이 때 필요한 공부가 바로 정신분석적 공부다. 각종 이론에 해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요체가 무의식에 있음을 알고 그 곳에 가 닿기 위해서다. 이성민과 정지은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위아래를 칼 같이 나누는 한국사회에선 일상생활에서 민주적인 관계를 이루기 어렵다. 이성민의 말대로 한국인의 관계가 ‘빈곤’한 이유다. 깊고 의미 있는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사랑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N포 세대’ 담론에서 보듯 양극화와 청년 빈곤의 시대에 사랑은 점점 더 멀어지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개인이 자신의 욕망과 결여를 통해 타인을 만남으로써 주체로 설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이고 본질적인 방법이다. 언급했듯 사회는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다. 때문에 사랑과 관계의 빈곤은 개별자의 빈곤을 넘어 사회적 자원의 감소에까지 이르게 한다. 사랑을 포기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정경훈과 김석은 몸과 돈이라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 욕망의 대상을 다룬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강도 높은 외모적 억압의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적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졌다. 반면 정경훈은 이 억압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입장에 초점을 둔다. 예쁘고 날씬한 외모를 가지라는 메시지는 너나 할 것 없이 받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이 외모에 개인의 환상이 얼마나 깊게 연루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외모 민주주의’ 달성이라는 사회 차원에서의 목표와 더불어 개인에게도 할 일이 주어진다. 바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외모 자아’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돈에 대한 김석의 글도 비슷한 요지다. 짐멜이 <돈의 철학>에서 논했듯 돈은 물질적 관계를 탈인격화하는 도구로 기능하며 우리가 평등한 계약 주체로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긍정적 기능과 동시에 물신화되며 주체를 소외시키는 부정적 기능도 갖는다. 김석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태도이다. 항문기 아이가 똥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돈을 욕심껏 움켜쥘 수도, 타인을 위해 베풀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돈의 통제자가 되는 것만이 소외되지 않는 길이다.


이만우와 홍준기는 반사회적 폭력범죄와 세대갈등 그리고 사회적 국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이만우에 따르면 강력범죄자를 예외적 악마로 취급하고 도덕주의적 비판에 빠지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범죄율을 낮추고 피해가 최소화되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증오에 대한 완충지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피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세계를 파편으로 파악해 타인에게 증오를 쏟는 사람들로 가득 찬 ‘조증 문화(manic cultures)’가 만연하지 않으려면 증오를 건강한 방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홍준기의 사회적 국가론과도 맞물린다. 개인에게만 집중하는 라캉 이론을 비판하며 홍준기는 힘센 아버지들 밑에서 신음하는 젊은 ‘오이디푸스들’의 개별적 저항과 함께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가의 사회성이 진일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유년기에 ‘좋은 엄마’로 대표 되는 좋은 양육자가 필요하듯 사회의 ‘엄마’ 역할은 결국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몰리는 현실을 돌아 보게 한다.

 

김석의 글은 매주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인파가 시위를 위해 거리로 나서는 현 시국과 겹쳐 읽어볼 만하다. 박정희 등의 죽은 아버지를 현재로 끊임없이 소환하는 ‘정치적 아버지 찾기’는 독재자의 자식을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그 대통령은 헌정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를 불러왔다. 김석에 의하면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을 헌법적 기관이 아닌 인격체로 파악하며 감정을 투사하는 한국 특유의 현상은 비어 있는 것이 마땅한 권력의 중심부를 ‘진정한 아버지 혹은 그의 적자’로 채우려는 욕망에서 일정 부분 기인한다. 그러나 이처럼 무서운 아버지나 그의 적통을 이을 아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 모두를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해줄 것을 기대하는 건 반민주적이며 시대착오적이다. 특정 인물을 ‘예외 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주권자로 ‘모실’ 것이 아니라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권력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누구도 중심은 차지할 수 없음을, 비어 있는 중심으로 인해 발생되는 혼란과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수용해야 한다. 이 혼란과 갈등을 야기하고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김석의 언어를 빌리자면 ‘제도적 부정성’을 부인하지 않고 그것이 정치의, 삶의 일부임을 껴안을 때만이 우리는 헌법에서 말하는 진정한 주권자 하나하나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4. 원론의 효용 


‘정신분석’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드러나듯 ‘헬조선’의 증상에 대한 논자들의 해결책은 물질적이지도, 아주 구체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허무’에까지 비견되는 자아의 비어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개개인에게 알맞은 ‘외모 자아’를 찾아야 하며,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주체로 거듭나야 하는 것에 더해, 다 함께 적대성을 일상의 일부로 포용하며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좋은 말이지만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누군 몰라서 안 하나’ 싶은 의문이 피어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빠른 길이 있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과 같은 ‘헬조선’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론적이란 말은 때로 실효성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 즉 뿌리에 다다름을 뜻한다. 표피의 생채기만을 땜질하듯 처치하며 산다면 속은 계속 곪는다. 김서영의 정의처럼 우리는 각자 인생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흡수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동시에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개별적인 존재로 탄생하는 사람,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그 여정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 사람, 즉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할 수 있는 사람”인 전문가는 깊이 행복한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두려움을 딛고 전문가로 서고자 할 때 필자들이 제시하는 ‘원론’은 새롭게 보일 것이다. 











현실문화에서 서포터즈 잉문예술덕후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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