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선언 -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한우리 기획.번역 / 현실문화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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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은 선언을 이렇게 정의한다. 1.널리 펴서 말함. 또는 그런 내용. 2. 국가나 집단이 자기의 방침, 의견, 주장 따위를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함.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행위는 선언의 내용을 공적 의제로 만들려는 시도이며 선언하는 주체가 선언의 내용을 실행하거나 견지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또한 청자/독자를 전제하는 말/글이라는 점에서 이 선언에 동참해 달라는 요구이고, 동지가 되어 함께 행동하자는 촉구이기도 하다. 한우리의 책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연구, 2016)은 반전운동과 성혁명으로 서구가 시끄러웠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발행된 선언을 번역해 엮었다.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 다시 정리하자면 여기 실린 선언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세계관, 윤리, 이데올로기를 선언자의 방침, 의견, 주장으로 취하며 이를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세상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고유한 개인으로 가부장제가 주는 고통을 겪으며 각기 다른 미래를 꿈꾼다. 이 선언들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결을 지닌다. <드센 년 선언문>(1969)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을 낙인찍는 단어인 ‘드센 년bitch’을 긍정적으로 전유한다. 내가 바로 네가 욕하는 그 드센 년이고, 드세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이 선언은 강하고 아름다운 ‘드센 년’들이 그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상처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함께하며 이 세계에 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강간 반대 선언문>(1971)은 강간을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논리적 결과로 명료하게 정의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대로 둘 이상이 개입되므로 섹스조차 ‘사회 관계’라면(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의지를 묵살하며 그의 존엄 파괴를 목표로 하는 강간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다. 이 시기 페미니즘 운동은 이렇게 개인적인 것, 그러므로 사소한 것이라 경시되어 온 일들이 실은 권력관계의 사회적이며 정치적 효과임을 논증하며 앞으로 진리로 여겨질 구호를 만들어 냈다. 바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1969)”가 그것이다. 이 선언문은 여성이 직면한 문제가 집단적인 문제이므로 해결책 또한 집단적 행동에서만 발견될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이지 않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대목은 특히 새겨 들을 만하다. 그들을 더 잘 조직해 현재의 운동에 활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거대한 운동”, 달리 말하자면 이 ‘거대한 운동’을 불러일으킨 세계에 다 같이 있고, 진정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이들의 '비정치성'에서도 정치적인 것은 발견될 테기 때문이다. 한편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멈춰라!>(1968)는 미스 아메리카 대회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젊고 예쁜 것만이 여성의 가치라는 사회의 메시지가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아주 한정된 종류의 여성상만 등장하는 한국 대중문화를 상기하면 가부장제적 미디어는 그 자체로 ‘미스 아메리카 대회’의 확장판으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1970)은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레즈비언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모든 여성이 폭발 직전까지 응축해놓은 분노”(113쪽)인 레즈비언은 “감히 남성들과 동등해지려는 여성들, 감히 남성의 특권에 도전하는 여성들, 감히 자신의 요구부터 먼저 들어달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을 낙인찍기 위해 남성들이 만들어낸 단어”(115-116쪽)이기도 한 것이다.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 즉 남성에게 순종하며 그의 욕망 충족을 위해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이 되길 거부하는 여성은 ‘여성’일 리가 없으니 이성애 위주의 사회에서 밀려나야 할 동성애자로 ‘격하’된다. 남자들에겐 경악스럽게 들릴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1967)은 한발 더 나아가 모든 남성을 제거하자고 말한다. 책에서 가장 급진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이 글은 남성의 효용과 존재 의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독립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정한 여성이라고 설파한다. 문장의 액면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더 읽어보자. 이 글에서 부정되는 남성은 자기에게만 매몰되어 타인과 진정한 교류를 할 수 없고 체제 내에서 안정과 권력만을 희구하는 자다. 가부장제적 남성성을 체화하고 추구하는 남성인 셈이다. 가부장제적 질서에 순응한다면 여성 역시 비판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빠에게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아빠딸(Daddy's girl)'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며 그러므로 남성거세결사단이 그리는 세계엔 남성과 마찬가지로 설 자리가 없다. 바꿔 말하면 남성거세결사단이 없애려는 '남성'은 구체적 개인이라기보다 가부장제적 남성성, 즉 이기심으로 뭉쳐 남을 사랑할 수 없는 감정적 불모성과 약자를 타자화하고 착취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키우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비인간성을 가리킨다. 이런 면에서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강력한 언어를 통해 페미니즘이 갈 길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사랑하며 사랑받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드러낸 글이다. 페미니즘이 실현되는 “진정한 공동체는 단지 종의 구성원이나 커플이 아닌, 서로의 개성과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개인들,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자유로운 영혼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곳이고, 이런 공동체에서만 “인종 정체성과 성 정체성의 결합이 그들의 전 생애를 결정”(<흑인 페미니스트 선언>, 148쪽)짓고 마는 흑인여성과 같은 피억압주체들이 마음껏 사랑하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탐험하고 발견하고 발명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농담을 던지고 음악을 만”들며, “이 모든 일을 충만한 사랑과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마법 같은 세상을 만”(<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 188쪽)들 수 있을 것이다.


작년의 메갈리아 탄생이나 올해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몇 개의 마일스톤을 거치며 페미니즘 담론은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다. 최근에는 트위터에서 시작된 각계의 성범죄에 대한 폭로가 있었고, 오래 숨겨졌던 성차별적 병폐가 여성들의 용기 덕에 드러났다. 물론 가해자들이 응분한 처벌을 받을지는 미지수고 고발 여성들은 위험과 불안에 떨어야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것 자체가 성과이며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고무적이다. 침묵 대신 고발을 택할 여자들은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코르셋을 벗어던진’ 여성들은 이제 누군가의 좋은 여자친구, 딸, 아내 대신 자기 자신이 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자기 선언을 마친 우리가 약 반 세기 전에 이루어졌던 <페미니즘 선언>을 지금 읽어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의 싸움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기 위해서다. 사적맥락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성으로 사는 것은 여전히 천형으로 느껴지지만 이만큼이나마 온 것은 계보와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하단 사실을 에너지 가득한 언어로 확인하는 것은 도리 없이 감동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유산은 좌절을 주기도 한다. 반세기전의 언어를 아직도 급진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가부장제의 공고함 앞에서 우리는 주저앉거나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선언들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도 전한다. 이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먼 연대다. 하지만 이 연대는 멀어서 깊어질 수 있다. 오래 전 저 먼 곳에서도 이런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우리에게 지금의 자리가 주어졌다는 걸 알게 된 후의 싸움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2016년의 한국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칭하는 우리는 우리보다 넓은 세계와 이어져 과거를 다시 쓰고 미래를 더 나은 길로 이끌어 가는 싸움의 긴 여정에 놓여 있고, 그렇기에 더욱 포기할 수 없다. <페미니즘 선언>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고통 받고 있지만 또 함께 싸우고 있다고. 이 싸움은 “가장 가난한 여성, 가장 악랄하게 착취당한 여성이”(<레드스타킹 선언문>, 46쪽) 최고의 성취를 달성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현실문화에서 서포터즈 잉문예술덕후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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