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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달구지 여행 ㅣ 열린어린이 그림책 22
윌리엄 스타이그 글.그림, 윤인웅 옮김 / 열린어린이 / 2009년 3월
평점 :
윌리엄 스타이그의 새 그림책이예요. ‘뒤죽박죽 달구지 여행’ 표지의 빨간색 글씨가 이제 막 덜커덩거리며 달구지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자국 같아요. 불그스름히 물든 하늘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어요. 농부 팔머와 일꾼 에브네저가 달구지 가득 야채를 싣고 시장으로 향하는 중이군요. 그림책을 설렁설렁 한번 보고나서 다시 표지를 들여다보니, 아, 이때까지는 별일이 없었겠네요. 때는 8월이라 아무리 서둘러도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뙤약볕 아래를 걸어야 하니, 새벽 공기를 가르며 부지런히 걷고 있는 농부 팔머와 일꾼 에브네저의 모습이 일견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요.
아침 일찍 마을 시장에 도착해 두어시간 만에 가져온 야채는 모두 팔렸지요. 농부 팔머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고, 자기 걸로는 은시계를 장만했어요. 일사병에 시달리는 늙은 에브네제에겐 밀짚모자를 선물했어요. 이제 칡즙 한 잔씩 걸치고 목도 축였으니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일만 남았어요. 야채도 다 팔았겠다, 사진기, 연장함, 자전거, 하모니카 등등 식구들 선물도 잔뜩 샀겠다, 아지랑이 사이로 이글거리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대수인가요? 집으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지요.
비라도 한바탕 오면 좋겠다고 주고받은 말이 씨가 되었는지, 깊은 숲속에서 장대비를 만났네요. 번개에 맞아 쓰러진 나무는 그대로 달구지를 덮쳐 버렸고요. 농부 팔머와 일꾼 에브네저는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집에 가지? 사랑하는 아내와 애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말이야.” 곧 농부 팔머는 침착하게 스스로 답을 찾았어요. 아들 맥에게 주려고 산 연장함에서 톱과 도끼를 꺼내 쓰러진 나무를 찍어댔지요. 이 장면을 놓칠 수 없었던 에브네저는 팔머 부인의 사진기를 찾아 눈에 힘을 꽉 주고 어금니를 앙다문 채 “썩썩, 씩씩, 쩍쩍” 톱질을 하고, 도끼질을 하는 돼지(농부 팔머는 돼지, 일꾼 에브네저는 당나귀랍니다.)를 찍었어요. 마침내 달구지가 풀려났고, 비도 멎었어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는 내리막길에서 바퀴를 축에 고정시키는 암나사 하나가 풀려나갔어요! 혼자가 된 것이 기쁜 듯이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바퀴. 헐레벌떡 바퀴를 쫓아 뛰어내려가는 농부 팔머. “제발 거기 좀 서. 안 그러면 우린 이제 집에 못 가게 된단 말이야. 식구들이 기다린단 말이야!” 이윽고 농부 팔머는 막내아들 지크에게 주려고 산 하모니카를 꺼내, 가쁜 숨을 내뱉고 들이키며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쀼우 푸우, 뿌이 푸우-” 마침내 바퀴가 이 기막힌 연주를 듣고 제자리에 멈췄어요. 농부 팔머는 바퀴살을 움켜잡고 한껏 흔들어 야단을 쳤지요.
바퀴를 달구지 축에 다시 고정시키고 둘은 지친 발걸음을 뗐어요. 얼마쯤 가다 에브네저가 거북이를 피하려다 발목을 삐끗하긴 했지만 농부 팔머가 일꾼 에브네저를 태우고 달구지를 몰았어요. 휴식을 취하게 된 당나귀는 짐나르는 돼지의 사진을 찍었어요. 흠, 역시(?) 언덕 너머 언덕이네요.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 내리막길을 바라보며 가볍게 발돋움을 하는 찰나 이번엔 바퀴가 아닌 달구지가 통째로 내달리기 시작했고요. 당나귀와 돼지, “한때 달구지였던 것들”은 제각각 들판에 널브러지고 말았어요. 그래도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는 구나 싶었던 위기에서는 벗어났네요. 이제 둘은 농부 팔머의 딸 마리에게 주려고 샀던 자전거에 올라 집으로 향하지요. 식구들 선물을 짐받이와 에브네저의 등에 나눠 묶고요. 농부 팔머가 자전거 핸들을 잡고, 일꾼 에브네저는 뒤에 올라탔어요.
문 앞에서 서성이던 아이들 눈에 휘청거리는 뭔가가 들어온 건 이미 저녁 해가 기운 뒤였어요.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웃음과 눈물이 뒤엉킨 인사와 뽀뽀가 오고갔지요. 무사히,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집에 돌아온 거예요! “조금 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쉴 틈 없이 재잘거리며 흥겨운 식사를 했어요.” 늙은 일꾼 당나귀 에브네저는 삔 발목 때문에 침대에 누워 저녁 식사를 했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요? 집에 돌아왔는데.
잘 안 될 게 뭐가 있겠냐 싶었던 시장 다녀오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이야. 농부 돼지 팔머와 일꾼 당나귀 에브네저는 뒤죽박죽 달구지 여행에서 ‘세상의 마지막’을 한두번도 아니게 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들의 뒤죽박죽 여정을 보는 입장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아요. 목가적인 전원 풍경과 상관없이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숱한 우여곡절이 배꼽을 쏙쏙 뽑아가니까요. 게다가 표정과 동작이 살아 있는 윌리엄 스타이그의 그림, 그 편안하고 따뜻한 색감이 마음놓고 웃게 해줍니다. 다양한 의성어·의태어로 생생하게 표현한 이야기도 흥미롭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닥치고 어려운 사정이 생겨도 스스로 충분히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서로 도우면 문제 해결이 한결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것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언제나 힘과 지혜를 북돋아주는 건 '내가 돌아갈 집과 가족'이라는 것도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