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났는가 당대총서 1
송두율 지음 / 당대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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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인’ 송두율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그 동안 명성은 익히 접해왔었지만, 그의 육필을 직접 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늦게 그의 책을 집어든 느낌이 든다. 당대 철학계의 대두, 하버마스의 수제자로 유명할뿐더러 지난 해 위험을 무릎 쓰고 입국해 스스로 수인의 몸이 되기를 꺼려하지 않아 세간의 이목이 집중이 되었던 인물의 책을 이제야 읽다니. 지적인 게으름을 탓할 일이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노성두 씨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계재가  되었다.

 송 선생님의 이번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북한에 대해 ‘내재적․비판적’접근 방법을 이용해 연구․분석할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북한의 불안정하고 낙후된 현실적 지위에 근거해 북한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결론으로 선행삼아 놓고, 그 학문적 근거를 찾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왔다. 따라서 어떠한 관점에서든, 어떠한 연구방법을 통해서든 북한은 붕괴되고 흡수되어야 할 부정적 체제인 양 인식되어왔다. 설령 이러한 연구 평가에 북한에 대한 일면적 진실이 담겨있다 해도, 이는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오류를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내재적 연구 방법은 가치 평가의 선행을 배제한 북한 연구가 가능한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의 방법에 따르면 북한이 스스로의 국가 목표로 삼은 것을 일단은 인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이 과연 적절하였는가를 잣대로 북한에 대해 총체적인 평가를 내려야 마땅하다. 존재 내부에 내재된 기준으로 그 존재 자체를 평가하는 일은 그 합리성이 충분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연구 방법은 남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이라는 수구적이고 체제옹호적인 연구를 사전에 차단하고, 양 체제를 동등한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을 안고 있다. 북한의 것으로 북한을 평가하고, 남한은 남한의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연구자 입맛에 맞는 특정 이념으로 체제를 재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시민․여성․환경․소수자 운동’이 대세인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근대적 과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고 근대적 가치 실현에만 몰두한 나머지 탈근대적 가치의 유의미함에는 눈감아버리는 편협한 지식인도 아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는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적어도 큰 이야기가 완료될 때 까지는. 근대의 기본 조건인 민족 국가를 이루지도 못했고, 근대적 갈등인 노동과 자본의 대립도 결코 해결하지 못한 우리에게 근대의 과잉을 걱정하고 있는 서구의 ‘작은 이야기’몰두 경향을 그대로 수입한다는 것은 최신 유행만을 추구하는 지적 댄디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이념에 맞춰 현실을 제 마음껏 재단해버리는 관념론자가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을 풀기에 적절한 이념을 찾기 위해 애쓰는 현실론자이다. 또한 그는 근대주의자이자 동시에 탈근대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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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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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끔찍하지만 이런 상상을 즐긴 적이 있다. 눈이 멀어 장님이 되는 상상, 귀가 멀고 혀가 굳어 어떠한 소리를 듣지도 내뱉지도 못하게 되는 상상, 사지가 마비되어 신체의 자유를 몰수당하는 상상 등.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 자신이 불구가 되는 상상을 끊이지 않고 해왔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고도 슬프리라 짐작했던 것이 바로 눈이 멀게 되는 경우였다. ‘눈이 보이지 않다니…, 암흑 속의 세계에 갇혀 살아야한다니….’마치 하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듯한 진한 죄책감을 느끼고는 서둘러 그런 못된 상상을 한 나 자신을 책망하곤 했다. 동시에 안도의 한 숨을 쉬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지만. ‘아직 내 두 눈은 말짱하다.…’

 이 소설에선 이런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는 비극이 이야기되고 있다. 더군다나 누군가 한 명 만이 아니라 한 도시민 전체가 눈이 멀어 버리는 상황이 닥쳐오게 된다. 수만인지 수십만인지 알 수 없으나 한 도시의 시민 전체가 암흑 속에 갇혀버리고, 도시의 기능은 물론 인간의 문명 생활 자체가 마비될 지경이 이르는 종말론적인 세계가 책 속에선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했던 세상의 종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그 상황은 끔찍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사실 이제는 지상 명제처럼 여겨지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류가 그 동안 이룩해왔던 문명의 힘이 지속되고 있기에 성립가능한 명제일 것이다. 만약 문명이 사라져버린다면 인류는 지구상 유일의 존엄한 생명체가 아니라 단지 직립보행이 가능한 포유류의 한 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시력을 상실한 인류에게 문명이 가당키나 할까. 문명은커녕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부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의 교양과 질서가 구축된 사회가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문명이 구축된 인간 사회가 구축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면. 실제로 책 속의 눈먼 자들은 당장 ‘먹고 싸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소위 말하는 ‘짐승만도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비참함은 놀랄 만한 작가의 구체적인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마치 예전에 한 번이라도 눈이 멀었던 적이 있는 사람처럼.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속설이 있다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오랫동안 지속된 부가 남긴 여력 덕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만 년간 다른 동물들을 따를 수 없도록 가꾸고 다듬어진 생활을 영위해왔던 인류 사회가 전 인류의 시력 상실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아래서도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류가 지난 유구한 역사 기간 동안 쌓아온 여력 덕분일 것이다. 인류의 존엄함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정도로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시력을 잃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인류 문명의 존엄함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당장 닥친 재앙 하에서도 살아남게 됨은 물론 결국 문명의 회복마저도 기약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될 것이다.

 실제로 전 도시민 중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은 인물인 ‘의사의 아내’는 흡사 갓난아이와 같이 되어버린 인물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물론 그녀는 문명과 존엄이 붕괴된 인간 사회의 끔찍함을 두 눈으로 관찰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역사의 증인으로 남게 되고 그 때문에 숱한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그래도 그녀는 눈먼 자들에 비하면 분명 행복한 이이다. 아직도 보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 주변의 맹인들이 ‘먹고 싸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해준다. 마치 세상의 종말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구세주, 예수가 재림하신 것과 같다. 예수처럼 전 인류를 구원하는 전지전능함을 보여주지는 못한 다 할지라도.

 한편 그녀뿐만 아니라 구세주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게 된 맹인들은 더 이상 짐승이기를 거부한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곤궁에 처해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연대와 나눔의 숭고를 몸소 실천하며, 붕괴된 존엄함의 고리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더디지만 강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처럼 이 책은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슬픈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실존 자체를 위협하는 비극 아래서도 미래의 희망을 잃지 않는 숭고함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묵시론적인 소설이다.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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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막심 고리키 지음, 최윤락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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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없어 즉흥적으로 적는다. 형편없는 글일 것임이 분명하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언어 역시 흔적을 남긴다. 특히나 모든 이의 공감을 살만한 보편적 의미를 지닌 언어는 더욱 깊고 넓은 흔적을 남길 것이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그런 언어 범주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어머니’를 되 뇌일 때, ‘어머니’를 떠올릴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념을 품게 되며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가. ‘어머니’가 연상시키는 생각과 느낌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연상 작용의 폭을 한층 더 넓혀주는 소설이다. 막심 고리끼의 그것에는 이전에 우리가 숱하게 접하고 경험했던 것과는 또 다른 어머니가 등장한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혁명과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물론 모든 어머니가 가슴 안에 품게 마련인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식을 위한 강인함 역시 지니고 있지만, 이와 같은 이미지는 닐라노브가 그려내는 혁명적인 자취에 덮여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닐라노브는 극히 드물게도 변혁을 위한 자식의 열정에 감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인물이다. 흔히 사회 운동에 뛰어든 자식을 가진 부모는 자식의 설익은 열정과 치기를 나무라며 사회에 안착하기를 종용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과 성숙이라는 농익은 말로 감싸버려, 자식의 반항과 거부를 애써 억누르려고 한다. 물론 자식보다 수십 년의 인생을 더 산 부모의 생각이 자식의 그것보다 짧지 않을 것이며, 자식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것은 당연한 부모의 도리일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 정의와 역사의 진리를 위한 젊은이의 고뇌에 싸인 몸부림을 무작정 부정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식이 옳다면,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자식이 보다 근접해 있다면 자식일지라도 그를 배우고 돕는 것이 올바른 부모됨의 발로일 것이다. 닐라노브는 바로 그러한 부모의 대표 선수 격이다.

 닐라노브는 자신의 아들인 빠벨의 열정에 점차로 물들게 된다. 마치 맑은 물에 떨어뜨려진 잉크가 번지듯이. 서서히 그렇지만 막을 수 없도록. 그리고 닐라노브는 제 2의 빠벨, 아니 중년 여자로서는 최초의 혁명 전사가 되어 뜨거우나 불안하고, 강하나 여리기만 한 젊은 혁명 투사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거듭나게 된다. 너무나 갑작스럽지만 너무나 자랑스러운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닐라노브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강인함에서부터 불가측한 인생유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감상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볼 때 이 소설은 그다지 돋보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소설과 비교해본다면, 서술 방법 등에서 그렇게 뒤처지는 것만도 아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의 한계를 재단하는 몰지각함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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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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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말이지만 책은 생각의 창고이다. 책을 읽는 중에나 모두 읽은 후에는 언제나 일련의 생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소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비록 소설이 그 특유의 문학적 표현 때문에 뚜렷치 못한 생각의 실마리들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소설 역시 글로 채워진 세계이기에 생각꺼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좋은 글은 깊고 넓은 생각의 꺼리들을 소환한다. 이는 영양이 고른 좋은 음식이 어린이의 발육에 보다 이로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좋은 소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좋은 소설을 읽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김현 선생은 ‘과연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했다. 이러한 의식은 분명 소설을 쓰는 이의 뇌리에서도 맴돌고 있을 것이다.

 성석제의 이번 소설도 이런 의식을 유념하며 읽어야 한다. 언뜻 보면 이 소설집은 매우 기괴한 소설들의 모음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흡사 판타지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개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기 까지 한 인물들이고, 이야기의 진행 역시 깔끔하게 결말지어지지 않는다. 여느 소설에나 담기기 마련인 작가의 의도 역시 좀체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괴이함이 작가의 뛰어난 이야기꾼 실력이 발휘되고 있는 극적 흥미와 함께 이 글의 특징이자 매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의 정상성을 검토하는 관점에서 이 글을 읽으면 또 하나의 돋보임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괴이한 인물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제시한 것은 극적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선정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이다. ‘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소외받는 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 자,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도대체 그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자들의 존재를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존재 확인은 더 나아가 적극적인 정치적 의미를 띈다.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들에 대한 옹호이자 그들을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 고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비정상인들을 그려냄으로써 ‘정상인’의 삶만을 인정하는 속 좁고 비좁은 우리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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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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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말이지만 책은 생각의 창고이다. 책을 읽는 중에나 모두 읽은 후에는 언제나 일련의 생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소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비록 소설이 그 특유의 문학적 표현 때문에 뚜렷치 못한 생각의 실마리들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소설 역시 글로 채워진 세계이기에 생각꺼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좋은 글은 깊고 넓은 생각의 꺼리들을 소환한다. 이는 영양이 고른 좋은 음식이 어린이의 발육에 보다 이로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좋은 소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좋은 소설을 읽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김현 선생은 ‘과연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했다. 이러한 의식은 분명 소설을 쓰는 이의 뇌리에서도 맴돌고 있을 것이다.

 성석제의 이번 소설도 이런 의식을 유념하며 읽어야 한다. 언뜻 보면 이 소설집은 매우 기괴한 소설들의 모음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흡사 판타지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개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기 까지 한 인물들이고, 이야기의 진행 역시 깔끔하게 결말지어지지 않는다. 여느 소설에나 담기기 마련인 작가의 의도 역시 좀체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괴이함이 작가의 뛰어난 이야기꾼 실력이 발휘되고 있는 극적 흥미와 함께 이 글의 특징이자 매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의 정상성을 검토하는 관점에서 이 글을 읽으면 또 하나의 돋보임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괴이한 인물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제시한 것은 극적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선정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이다. ‘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소외받는 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 자,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도대체 그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자들의 존재를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존재 확인은 더 나아가 적극적인 정치적 의미를 띈다.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들에 대한 옹호이자 그들을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 고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비정상인들을 그려냄으로써 ‘정상인’의 삶만을 인정하는 속 좁고 비좁은 우리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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