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혼
김원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원일씨의 소설과는 초면이었다. 또한 그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타 주변의 잡음에 휩쓸리지 않고 순수하게 그의 소설과 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의 가장 최신작인 이번 소설집도 그렇거니와 책 맨 뒷면에 간략히 소개된 그의 이전 작품들에 대한 소개글에서 미루어 알 수도 있듯이 그는 과거사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인 듯 하다. 또한 그의 소설 우리 과거사의 추악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아우르며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우리네의 굴곡진 현대사를 정면에서 다루는 작가는 그 외에도 적잖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 그다지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라 하겠다. 그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의 다른 작품을 전혀 접해본 적이 없어서, 스타일의 독특함이 그의 소설 전반에 깔린 특색인지 아니면 이번 소설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여섯 편의 중편 소설들로 묶인 이번 소설집을 관류하는 글쓰기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다고 여겨진다. 문학 이론상으로 이러한 서술 경향을 뭐라 칭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할미가 어린 손자를 무르팍위에 앉혀 놓고 옛날 얘기를 옴팡지게 해주듯, 과거의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하게 늘어놓는 스타일은 꽤 고전적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 외에도 상당히 복합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이번 소설의 경우처럼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려고 하는 집필 의도에 매우 부합하는 전략이면서, 동시에 자칫하면 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기 쉬운 논쟁적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선택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평면적으로 전개되는 극적 구성은 그렇지 않아도 소재의 특성상 무거울 수밖에 없는 소설을 더욱 둔하고 더디게 소설의 극적 흥미를 크게 반감시켰고, 선과 악의 극명한 구분이 선행되고 그에 뒤이어 한 편에 대한 일관된 찬양과 다른 편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와 비판으로 가득찼던 점은 차라리 소설이 아닌 다른 형식의 글을 썼더라면 더 낳았겠다 라는 소회까지 불러일으켰다. 아무튼 이러한 형식의 리얼리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그의 소설은 또 하나의 논쟁점을 자극한다. 문학이 역사를 다룰 때 과연 역사학과 다를 수 있는가, 다르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의 소설은-그것을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정면으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문학과 역사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이미 깊은 수준까지 이루어졌고, 최근 탈근대의 바람이 역사학계에도 예외 없이 몰아치면서 그 주제에 대한 논의는 더욱 더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그 연구의 진행과 결과들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이번 소설처럼 작가가 역사학자의 소임마저 성공적으로 대행해버린 문학 작품을 대할 때면 자연스레 역사학과 문학의 구분이 과연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고개를 들게 된다. 그리고 역사학과 문학이 만나는 지점이 새로운 학문 혹은 새로운 방법론이 시작될 디딤돌 역할을 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까지 빼곰히 고개를 내밀게 된다.

 또 다른 이야기로 한편 그의 소설이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혁당 사건이라는 역사적 소재는 단순히 그동안 은폐되었던 역사적 진실이 이제야 밝혀진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은, 비록 그 사건이 매우 크게 주목받았음에는 틀림없으나, 역사의 전면에 서본 적이 없었던 무명의 인사들이었다. 그 희생자들이 지방 재야의 무명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시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새로이 일깨어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에 대해 접근하려는 시도가 부단히 이어지는 최근의 연구 경향과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사실 걸출한 인물들 위주로, 혹은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갈등 위주로 과거를 되짚어본다면 인혁당 사건은 단지 민주화 운동사에 있어서의 큼지막한 사건이라는 관점에서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놓인 희생자들이 결코 시대를 뒤흔든 영웅도 아니었고, 그들이 치열한 이념 갈등의 전장에 서서 그것을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시대의 모순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항거했던 인물들이었음에 주목한다면, 과거를 살피는 데 있어 그동안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현미경의 배율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줄이자면, 비록 극적 흥미는 덜한 소설이었지만, 소재가 지닌 강한 폭발력, 서술 스타일이 야기한 복합적인 효과 등 덕분에 적지 않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소설이었다. 좋은 역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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