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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외국 소설이라 별로 당기지 않았다. 하지만 상, 그것도 우리로 치자면 이상문학상 정도에 해당하는 권위 있는 부커상을 받은 소설이라고 해서 펼쳐들게 됐다. 그리고 선물 받은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서가에 꽂아버리는 것은 선물해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수오지심도 약간은 작용했다. 하지만 상의 권위가 마련해준 후광도 외국 소설에 대한 나의 혐오를 분쇄시킬 수는 없었나 보다. 400 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읽는 내내, “끝까지 읽을까 말까.”하는 고민이 수없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결국 한 번 펼쳐든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고지식한 고집 덕에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는 있었으나, ‘과연 읽을만한 책이었나.’하는 후회와 아쉬움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실 책의 내용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본래 종교적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했던 한 소년이 태평양 한 가운데,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호랑이와 단 둘이 남겨져 이 백 여일의 생존투쟁을 해나갔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소년이 처한 상황은 숨이 달려있는 인간이 감내해낼 수 있는 고통이 가장 극에 달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일순간에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슬픔은 물론, 한 뼘 남짓한 조그마한 구명보트 안에서 맹수와 함께 지내야만 하는 극도의 공포심, 배고픔은 물론 목마름조차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그 중 하나만 겪고 있어도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지경일진데, 서넛의 고통이 열셋의 조그마한 소년의 몸 위로 동시에 떨어졌으니,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여느 모험 소설이 그렇듯이-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싹을 찾아 그것을 꽃피우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 해나간다. 비록 더딜지라도. 여기까진 평범하다 못해 진부할 정도로 익숙한 모험소설의 전형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여느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이 강인한 의지로 그 역경을 헤쳐 나갔던 것과는 달리, 이 소설 속의 그는 신에 대한 믿음과 자연에 대한 경외의 힘으로 무시무시한 고난들을 이겨나간다.
이 소설의 유의미한 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한 인간을 그려냈다는 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절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의 진정성, 그리고 그 희망이 신과 자연-즉,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며, 우리 세계의 질서를 재단하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질 것을 이야기 속에 녹여내 주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평범함을 넘는 비범함의 범주에 속하기 힘들다. 여느 왠만한 소설이라면 이 정도의 내용과 깊이는 충분히 담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정도의 소설이 상을 받을 만한 소설인가. 혹시 내가 깊은 소설의 표면만 훑고 그 얕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수준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이런저런 상념들만 머릿속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