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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들 시간을 흐르는 물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시간은 우리에게 어떻게 흘러와서 흘러가는 것일까. 그리고 시간 속에 담겨있기 마련인 수많은 만남과 갖가지 사건들을 우리는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일까.
<운명>은 이러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으로 대신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에 따르면 시간이란 결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시간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와선 다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진다. 고로 시간이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다는 흔한 비유는 수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시간은 느리게, 우리 인간이 오고 감을 직접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느리게 지나는 무엇일 뿐이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가 그 시간 속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도 결코 우리를 세차게 흔들거나 위협할 순 없다. 다만 조용히 다가와선 우리를 사뿐히 즈려 밟고 우리 기억 속에 어여쁜 발자국만 남겨놓고 갈 뿐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잔혹하고 비참한 사건들로 가득 채워진 것일지라도. 작가의 말마따나 우리 앞엔 필연적인 행복만이 놓여있을 뿐인 것이다.
이렇기에 작가는 20세기 최대의 비극이라 할만한 만행이 버젓이 저질러졌던 그 곳, 아우슈비츠에서의 1년 남짓한 경험의 참혹함을 놀라울 정도의 필체의 담담함으로 가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행복하게 그려진 지옥을 맛보고 싶다면 꼭 감상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