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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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예전의 나로 남아 있고, 또 그런 나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넌더리가 났다." (p.64)

 

 아주 가끔, ‘나’라는 인간의 가장자리가 확실하게 만져지는 순간이 있다. 여기저기 흩어지고 뒤섞이는 것 같아서 억울해하던 차에 불현듯 하나의 모습으로 내가 나를 느낄 수 있는 그때, 우리는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은 것 마냥 신이 난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그 순간을 재현해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 뿐이다. 게다가 내가 찾은 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서 마치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괴로움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이런 우습고 불행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다시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이 소설은 짧은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아내를 찾으러 떠나는 내용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 기대하고 책을 읽어나간다면 얼마 못가서 지루한 소설이라고 내던질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아내 유디트는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을 짧고 강하게 드러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이별’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주로 ‘타인’과 헤어지는 행동을 지칭할 때만 이 단어를 사용해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별’이라는 행위에 반드시 타인을 포함시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데에는 우리 개개인이 ‘완전한 형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것의 내부에서 갈리어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 단어를 으레 타인과의 분리로만 받아들여 온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이 재미있다고 말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아마 페터 한트케는 '이별’에 대해 남들과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보다는 ‘누구’와 이별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 작품을 읽을 때 주인공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면서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우리 자신과 이별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소설 초반에는 아내를 찾으러 미국으로 건너간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생김새, 신문에서 읽게 되는 단편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말하기 전에는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불만이나 아내에 대한 원망을 간혹 내비치면서 고립된 상태로 지낸다. 그러던 중 친구인 클레어와 그녀의 딸이 하는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주인공은 기억하려 하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기 시작한다. 소심하고 비겁했던 자신과 자신의 콤플렉스, 생활양식 등에 대해 돌아보면서 그의 상태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타인을 대할 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메스꺼움 대신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시기에 나타나는 뚜렷한 변화다.

  다시 혼자가 된 주인공은 아내로부터 해코지와 살해 위협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감독인 존 포드를 만나러 간다. 이곳에서는 ‘나’와 ‘우리’에 대한 존 포드의 인식이 대화의 핵심이 된다. 그런 후에 "이제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말로 이야기의 바통이 유디트에게 넘어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때문에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의 변화를 뚜렷하게 감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우리는 그가 그 자신과 이별하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이 책의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 속의 나 자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어떤 부분과 서서히 이별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반드시 ‘우리’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소외감이라고 하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포즈에 묻혀서"는 결코 자기 자신과 이별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 이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날마다 조금씩 이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내게 적합하면서도 남들 또한 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가 아닐까. 그랬을 때 비로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연출되지 않은 모습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쓰다듬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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