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근술을 염려하는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마음들이 모아지고 있을 때 그의 배려로 예비검속에서 죽음을 면하게된 스물일곱 사람은 이미 한 덩어리로 뭉쳐져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근술이 갇힌 분주소로 몰려가구명운동을 펴는 한편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면민들은 하루만에 구명운동에 한 덩어리가 되어 나섰다. - P196
그와의 첫 대면 이후 서로가 바빠 좀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첫 대면한 김범준은 역시 소년시절부터 흠모해 왔던 대상으로서 부족감이 없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준수하면서도 예리한 얼굴에는 사십객의 혁명가다운 중량감과 원숙감이 담겨 있었다. 만주 그 어느곳에선가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인민군관이 되어 해방전쟁을 통해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 P197
"저는 범우 친굽니다. 소학교 때부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염상진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첫인사를 삼았다. "아, 범우 친구요?" 김범준은 반색을 하며 손을 잡았고, "부끄럽소,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도 못했는데" 하며 쓸쓸한 느낌의 웃음을 얼핏 지었다. 김범준은동생 범우의 사상적 동향을 알고자 했다. - P198
염상진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민족의 발견・・・・・… 그 말 한번 재미있군. 반민족세력을 제거한다는 전제 아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념투쟁에앞서 민족의 단합을 꾀하자는 뜻이라니, 현실성은 약해도 논리성은 강하군. 민족은 백번 강조되고 확인되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김범준은 혼잣말을 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첫 대면은 그것으로 끝났다. - P198
"계급혁명을 전제로 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민족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또 얼마만한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인가・・・・・・ 하는문제는 아주 심각하고 그리고・・・・・・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소. 그러니까, 중국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인데……… 거기에 민족문제는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오. - P203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되 민족자주적 혁명, 민족주체적 혁명을 분명히 했던 것이오. 그러니까 중국인의 힘으로 중국민족을 위한 공산주의계급혁명을 추진한다는 노선이오. 그 노선에 따라 모든 전략·전술은 수립되고 추진되었소. 코민테른의 지시 거부도, 부르주아 혁명단계를 생략하고 농민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주체로 삼은 것도, 어제까지 적이었던 국민당과의 투쟁을 중지하고 일본놈들을 내몰기 위해 팔로군으로 국민당군에 편입된 것도, 그리고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것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쏘련에 넘겨주거나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 P203
"그 다툰 일이 뭐요?" "긍께, 예비검속 때여서만 총질이 없었는디, 그 일로 서장이나헌데 책임추궁을혔제라. 그러다봉께 말쌈이 벌어졌는디, 서장은 무조건 시행명령이라고 했고, 나 현지 책임자의 판단권한이라고 혔고, 쪼깐 고약시런 일이었제라." "이 지서장은 그때 왜처형을 하지 않았소?" 염상진은 ‘당신‘을‘이 지서장‘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는 이근술이그 일로 보복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 P207
진작에 서장헌테도 입에 춤이 보트게 헌 말인다. 진짜배기 좌익이야 다 산에 있고, 그 사람덜이야 인자 땅이나 파묵음스로 사는디다가, 모이라면 모이고 가라면 가는 그 순헌 사람덜이 좌익이 아니란 것을 뻔하게 암스로 워찌 총질을 허겄는게라. 그것뿐이구만요." - P207
이근술이 다시 불려나왔다. "면인민 전체의 뜻을 존중하여 이 지서장의 석방을 결정하는 바이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이근술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면민 200여 명이 오래전부터 분주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그늘 아래 말없이 모여 서 있었다. - P208
인천은 불바다라고 했다. 상륙을 시도하기 위한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인천시내는 불바다만이 아니라 피바다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했다. 신문사 안은 그런 소식들로 술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 P208
미국은 마침내 해군까지 동원한 것이다. 육·해·공군의 삼면 입체작전 앞에 이쪽은 육군밖에 없는 것이다. 김범우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학송은 눈을 감았다. - P209
오늘로 3개월이구나・・・・・・. ‘해방전쟁‘은 ‘3개월전쟁‘으로 해방이 무산되어 가고 있었다. 김범우는 자신이 염려했던 예상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 허망하고도 안타까웠다. 미국은 결국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한 민족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가려고 하는 길을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가로막고, 동강내고, 좌절시키고 있었다. "후퇴는 일시적이네. 미국이 이런 식으로 만행을 부린 이상 쏘련이나 중국도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까." - P231
박두병이가 일부러 목적지를 안 밝힌 게 아닐까! 손승호는그 의견에 동조하고・・・・・….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승호까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박두병은 그러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박두병이도 망할 자식이다! - P244
글먼워찌헐 것이나, 겁묵지도 말고 시건방지게 나대지도 말고, 그저 내 한 목심 보존시켜주십소사 허는 맘으로 산허고 친해지는 것이여. 글먼 산타기도 몸에 쉴허게 익고, 산이 엄니 품이 돼야 목숨도 보존하게 되는 것이제. 긍께로 산이 엄니맹키로 보듬아주먼 이쪽에서는 순헌 애기맹키로 보듬낀다 그 말이여." - P282
이미 전쟁 전부터 야산투쟁을 해왔다는 솥뚜껑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는지 모르지만 손승호는 그의 말을 유심히 새겨듣고 마음에 담았다. 그의 나이는 스물대여섯밖에 안 되었지만 그말은 경험이 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인 의미가 깊었던 것이다. - P282
빨치산이면 됐지 무슨 이름이 더 필요하며, 그냥솥뚜껑으로 부르라고 했다. 별명에 걸맞게 그의 두 손은 두껍고도넓었다. 꼴머슴살이부터 했고, 그 손으로 꼰 새끼가 수천 리는 될거라는 그의 출신성분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는 손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단출해 보이는 짐 속에 조선공산당사자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좌익을 한 다음부터 한글을 완전히 깨쳤고 - P282
솥뚜껑이 누구 앞에서나 자랑스러워하는 건 자신이 ‘구빨치‘라는 사실이었다. ‘구빨치‘는 전쟁 전부터 야산투쟁을 전개해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구분짓는 뜻을 포함시켜 일상어로 쓰이고 있었다. 그 말은 ‘구빨치산‘을줄인 것이었고, ‘구‘라는 글자는 구닥다리나 쓸모없음이란 의미는전혀 없고 오히려 ‘혁혁한 투쟁경력이나 ‘산 경험의 혁명전사‘라는뜻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후퇴와 함께 새로 입산한 사람들은 자연히 ‘신빨치‘일 수밖에 없었다. - P283
"시방 이 전쟁터에 일본놈덜 구구식 장총, 미국눔덜 에무왕에카르빙, 쏘련제 따발총, 구구각색이요. 근디, 다른 것 싹 다 보덜 말고요 에무왕만 꼭 지니씨요. 요것을 쓰면 두 가지가 항꾼에 이문이요. 총중에 성능이 질로 좋아 이문이고, 웬수덜 총으로 웬수럴죽잉께 이문이요. 웬수덜총으로웬수럴 죽이는 고것이 을매나 재미지고 꼬신 일이요." - P287
그럼 총알이 문제 아니요?" "어허, 고것도 웬수덜이 다 대주제라 미국놈덜언 원체로 물자가흔해논께 도망험시로 질로 먼첨 내부는 것이 총알이요. 무건께라. - P287
"손 동무도 엠원이요? 어떻게 재수가 좋았습니다그려, 신빨치로서." 박두병은 멀리서 굳이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걸며 장난스럽게 웃고는 "김범우가 이 총을 제법 잘 쏘았지요. 나도 좀 쏜다고 쏘는데김 형이 언제나 나보다 나았어요." 그러고는 먼 데로 눈길을 잠시보내고 있다가, "손형, 우리 함께 고생 좀 해봅시다. 이게 옳은 길아니겠소?" 하며 손승호의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P288
손승호는 그가 ‘손 동무‘가 아니라 ‘손형‘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 그의왼손에도 M1이 들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 P288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 게 아니라구요. 이번에 부역한 사람들은아주 본때를 보일 거라는 소문이에요. 날마나 사람들이 수없이 잡혀 들어가구 있구요. 이런 판국에 기자증을 가지고 있으면 훨씬더 안전할 게 아녜요?" - P291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지배욕구의 산물인 것이 분명한데 발명일 수가 없는 것이고, 어떤 형태의 정치든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허위조작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있는 한 정치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추악한 것이었다. 그 분류자야말로 정치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번성을 전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맹신하는 단견의 소유자였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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