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는 사흘이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그를 놀라게 할충격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도 또한 집안식구들을 소스라치게 할충격을 가지고 있었다. - P423
범준 형님이 인민군 고급군관으로 돌아왔었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고, 집안식구들은 그의 지팡이 짚은 절룩거리는 다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 P423
민족독립을 위해 빨치산투쟁을 했을형님은 이제 민족과 인민해방을 위해 저 산속에서 빨치산투쟁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상진 선배도 물론 함께지 염선배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 뚝심 좋은 실천가, 어렸을 때부터 형님을그렇게 우러러보더니 결국 형님은 그의 차지가 되었군. - P424
김범우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는데 신경은 또 오른쪽다리로 쏠려갔다.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밀어돌렸다. 그러나 또 다리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지고 말았다. 옷을 벗게될 때마다 되풀이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의지가 지고 마는 싸움이었다. - P426
그는 오른쪽 다리에 찍힌 흉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김이 서로 다른 세 개의 흉터는 언제 보아도 흉측스러웠다. 문신이나 화인처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흉물이었다. 미군의 포탄이 찍어놓은 ‘포인(印)‘이었다. - P426
그리고 눈을 떴다. 그는 흠칫 놀랐다. 왼쪽 팔뚝에 찍힌 푸르딩딩한 글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건 ‘反共‘이었다. 수용소에서 대한반공청년단에 가입하면서 의무적으로 새겨야 했던문신이었다. 놀라긴 뭘 그렇게 놀라나. 앞으로 평생 신원보증서가돼줄 텐데,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일깨웠다. 휴전이 된 다음의남쪽 사회에서는 그 기분 나쁘게 푸른 색깔인 두 개의 글자가 상이군인만큼 당당하게 행세하게 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 P427
8절지 왼쪽 위로는 ‘적세분포요도‘라는 것이 한자로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두 개의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는 ‘4286, 6. 30. 現在‘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 전면에 걸쳐산들과 지명을 간략하게 표시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P431
그 지도는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남·북, 경남의 산악지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리산 북쪽으로 덕유산, 서북쪽으로 회문산, 남쪽으로 백운산, 서남쪽으로 조계산과 백아산이 여러 가지 모양의 타원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 P431
그리고 그 아래나 옆에는 다시 네모칸을 두르고, 그 안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무엇인가를 적어 그 옆에는 일일이 아라비아숫자를 표시해 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지도의 제목이 밝히고 있는 대로 각 빨치산지구들과, 거기에 소속된 부대들과, 그 부대의 대원들 수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 P431
남인태는 연필 뒤꼭지에 달린 고무로 조계산을 짚었다. 그 연필은 국제적십자사에서 보낸 구호물자로, 각 학교에 배급되고 있는필통 네 개쯤을 포개놓은 것만한 종이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 P432
그연필은 몸체에 잠자리가 금박으로 찍혀 있는 일본제였다. 그건 국산보다 질이 월등히 좋은데다, 특히 나무가 풍겨내는 향내가 좋아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연필까지 팔아먹어 한반도의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P432
거 염상진이나 하대치같은 놈들이다 우리군 출신이기 때문이오. 그 두 놈만 잡아없애도 그 졸개들 잡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냐 그것이오." - P435
남인태는 추궁하듯이 두 토벌대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말이야 영축없이 맞제라. 근디, 염상진이야 정해진 자리가 없이 지멋대로 동에번쩍서에번쩍 허고 댕긴께 잡든 쥑이든 워쩌크름 허기가 영판에롭고, 하대치야 조계산지구에 발얼 붙이고 있기넌 혀도 몸이 워쩌크름 날래고산얼 빠삭하게 뀌든지 무신 씨언헌방도가 없응께로 미치고 폴짝뛸일이랑께라." - P435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만3년 1개월 2일 만에 총소리가 멈추게 되었다. 따라서 1945년 8월15일 해방과 동시에 미·소의 합의로 그어진 직선의 삼팔선은 꾸불꾸불한 곡선의 휴전선으로 변했다. - P436
그 난해한 곡선은 ‘전쟁이 끝난선‘이 아니라 ‘전쟁을 쉬는 선‘이란 뜻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그 구체적인 차이를 잘 모른 채 그저 ‘전쟁이 끝났다‘고 했다. - P436
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신문들은 평양방송이 8월7일에 발표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박헌영 외에 이승엽 · 이강국·임화 · 설정식 등 열두 사람에 대한 숙청이었다. 재판을 아직 받지 않은 사람은 박헌영 하나였다. 나머지 열두 명은 재판을 거쳐 형이확정되어 있었다. - P437
이승엽·조일명 · 임화 · 이강국·박승원·배철·백형복·조용복·맹종호 설정식은 사형. 윤순달은 징역 15년. 이원조는 징역 12년그들의 죄상은 첫째, 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둘째,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 약화, 음모와 테러, 학살행위, 셋째, 공화국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였다. - P437
"아니 그럼, 박헌영동지께서 스스로 역사선택을 했단 말입니까?" 이해룡은 그동안의 생각이 완전히 뒤집히는 착란을 느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죽음도 나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소. 그건 이미 볼셰비키 당사가 입증하는 바이고, 그건 이미 볼셰비키의 전통이기도하오 - P441
삐라를 집어든 순간 이해룡은 눈앞이 새까매지는 충격에 부딪쳤다. 그건 이현상의 죽음을 알리는 삐라였던 것이다. - P443
그동안 살아남아 있는 대원은 여섯이 전부였다. 그들이 주능선에 막 올라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기관총 난사되기 시작했다. "피해라!" 이해룡이 외쳤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다 말고 푹 고꾸라졌다. 총알들이 잇따라 그의 등을 뚫고 나갔던 것이다. - P445
그의 옆에서 김범준도 허리가 휘청 꺾이며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기관총탄 수십 발이그의 전신을 꿰뚫고 있었다. 삽시간에 네 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넘어지고 뒹굴며 비탈을 내려뛰고 있었다. - P445
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병력동원이나 포위망 구축같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비트를 기습당하는순간 염상진은 새로운 배신자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 P445
"동무들, 우리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합시다." 염상진이 팔을 벌렸다. 네 사람도 양쪽 팔들을 벌렸다. 그리고 그들은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를 하게 되자 그들의 간격은 자연히 좁혀들었다. 수류탄을 든 염상진의 오른손이 그들이 만든 동그라미 가운데 놓였다. "동무들, 우리 다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염상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으로 수류탄의 핀을 뽑았다. "인민공화국 만세" 꽝! - P449
수류탄 자살로 염상진과 다른 빨치산들의 몸은 걸레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토벌대는 염상진의 목만 잘라갔던 것이다. 그 목은 순천경찰서를 거쳐 출신지 경찰서로 넘겨진 것이다. - P450
요런 개좆같은 새끼덜아,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 당장에 못 띠내리겄어!" 염상구가 두 경찰의어깻죽지를 동시에 치며 외친 소리였다. - P454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먼, 느그 성인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호산댁은 솟구치는 서러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워메, 워메, 아즘찮인거 시동상이 인자 사람이시. 예상이 뒤집히자 죽산댁도 비로소 고마움과 서러움이 범벅된 눈물을 줄줄이 흘리고 있었다. - P454
그 유명한 대장이저리죽었이니 동기나 삼수가 살았을 리가 없는 일이제. 말자리나 하고, 생각 똑바라지게 묵은 젊은 사람덜언다 죽어고 인자나 겉은 쭉찡이에, 지 욕심 채리는 것덜만 남었구만, - P458
해방이 되고 이적지 8년 쌈에 죽기도 많이덜 죽었제. 쓸 만헌사람덜 요리 한바탕씩 쓸어불고 나면, 그만한 사람덜이 새로 채와지자면 또 을매나긴세월이 흘러야 허는겨? - P458
자석덜이 장성혀야 헌께 한시상이 흘러가는 세월이제 그렇게 갑오년 그 쌈에서 3·1만세까지가시물다섯 해고, 3·1 만세에서 해방꺼지가 또 시물여섯해 아니라고 인자부텀 또 그만한 세월이 흘르먼워찌될랑고? 잉, 또 고런 심덜이 모타지겄제. 세월이란 것이 그냥 무심허 않는 법잉께. 나가질게 살아옴서 보고 겪은 세월이그렸어. - P458
그 별들이 모두 대원들의 얼굴로 보이고 있었다. 먼저 떠나간 대원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혁명의 별이 되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있었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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