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변은 사적 물리력을 동원해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한 사건이었다. 무고한사람들의 아우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왕의 아들에서 지존이된 세조에게나 궁지기에서 공식 실세가 된 한명회에게나 ‘계유정난‘은 운명이었다. - P15
세조의 꿈은 구체적이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한순간도 나태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점을 보완한 사민정책을 추진했다. - P16
각 고을을 독립적 군사 단위인진으로 삼아 진관으로 조직함으로써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지키는 강력한 조선을 만들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 여진에 대한 정벌을 독자적으로 단행해 군왕으로서의위의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 P16
만세법인 《경국대전》을 편찬해 조선 체제를 확정했다. 《동국통감>을 편찬해서 단군으로부터 시작하는 한국 역사의 정통을 세웠다. 검약을 기치로 내걸고 <횡간>을 제정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표준화했다. 이로써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에 비견될만한 조선의 주인이 되었다. - P16
세조와 세조의 ‘내편‘은 권력 장악이라는 목적이 같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함께했으며 권력을 장악한 이후 ‘열매‘도 함께했다. - P17
그러나 세조시대가 전개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양자 관계에 균열이발생했다. 세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예를 찾기 어려운‘연석정치‘를 구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경과 무례행위가 난무했다. 세조는 군신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ו - P17
세조 사후 훈척 공신의 권력이 예종의 그것을 압도했다. 열아홉 살의 새 왕은 아버지의 신하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들이 최종 승리자였다. 계유년의 참극을 경험한 바로 그들이 세조의 아들 대에 오히려 더욱 강고한 권력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그토록 강조하던 군군신신君君臣臣의 명제는 사라졌다. 이후 조선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다. - P18
충녕은 1412년(태종 12) 대군으로 승진했는데,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장차 세자(형 이제)를 도와서 큰일을 결단할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형인 세자 이제(양녕대군)도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 P28
태종은 세자 이제에게 절망했다. 헤어지라 했던 어리를 도로 받아들이고 또 아이를 가지게 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태종은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교체했다. 어리 문제가 표면적이었지만, 명분은 ‘어진 이를 선택한다는 택현擇賢‘ 이었다. - P29
특히 1439년(세종21) 7월에는 23세의 젊은나이에 왕실의 계보인<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종부시를 통솔하는 제조가 되었다. - P31
당시 세종은 종실을 관리하는 것이급무라 여겼다. 그들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방종하고 태만한 종친뿐만아니라 그들의 하인까지 백성을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리라 판단했기때문이다. - P31
세종이 이 임무의 중차대함을 알고서도 약관의 아들을 종친의 대표자 지위에 앉힌 것은 아들이 스스로 수양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판단한 때문이다. 아들을 믿었기에 이직임을 통해 실무를 처리하면서나랏법도 배우고 아울러 종실도 관리하도록 했던 것이다. - P31
태조의 현신왕의 아들로서 이유가 맡은 일은 다른 이와 견주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무예에 관한 한 그는 반짝반짝 빛났다. 항상 활과 화살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활을 쏘고 말을 탔다. 매날리기도 즐겨 한 마리 매만 얻어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P32
이유의 이런 능수능란한 무예는 신궁이었던 창업 군주 태조를 떠올리게 했다. 1435년(세종 17) 2월 사냥에서 16 발로 16마리의 사슴을 맞춘 이유를 보고 늙은 무인 이원기 · 김감 등은 "태조를 다시 뵙는 것 같다"며 울먹였다. - P33
1442년(세종24) 3월 평강 강무에 참여한 귀화 야인 동나송개 역시 그들 사이에서 ‘큰호랑이‘라 칭해졌던 이유의 신기하고이상한 무술을 보고 찬탄했다. "참으로 우리의 나연이십니다. 우리 땅에 계셨더라면 진실로 ‘바투[]‘였을 것입니다." ‘나연‘이란 여진 말로 우두머리 되는 장수를 일컫는 용어였다. 그러므로 이 언급은 이유를 ‘신궁‘이라 칭해진 태조의 현신으로 보면서 극찬하는 의미였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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