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지주인 그분을 보호하는 데 떳떳한 명분을 세우고자함이었고, 다음은,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데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 P197
염상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양쪽 손에 그릇을 든 하대치가씽긋이 웃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태평하고 건강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염상진은 자신의 몸에도 탄력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래, 저게 바로 혁명전사의 모습이다. 불필요한 생각을 곱씹는 건 혁명의지를 약화시킬 뿐이다.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있을 뿐이다. - P198
지금까지 보릿고개라는 춘궁기는 없어질 줄 몰랐고, 소작농들이나 품팔이꾼들은 으레 그 시절을 얼굴이 비치는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몸이 푸석푸석 부어오르는 부황기에 시달려야 했다. - P199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로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 수있었을까. 죄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전개하고 있는 싸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202
이념의 현수막을 내건 정치적 전쟁은 바야흐로 그 수레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에서나 민족은 내세워졌으나, 정작수레바퀴 아래 깔려야 하는 건 민족이었다. - P203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 P205
언제부턴가 ‘벌교가서돈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하지 말라‘는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P205
농민들과는 달리 귀와 눈이 밝았고, 따라서 입이 야무졌다. 돈의 마력탓이었는지 읍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인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벌교의 그런 분위기에 김범준이 긴장의 찬물을 끼얹은것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1년이 가까워서였다. 학생지하운동에가담했다가 발각이 나서 일본을 탈출했다는 것이 벌교에 퍼진 첫번째 소문이었다. - P206
"긍께 말이요, 염상진인가 위원장 동무가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지주덜 전답을 싹 다 뺏어갖고 소작인덜헌테 골고로골고로 갈라준다고 했다는디, 고것이 참말일께라?" 김범우는 엷게 웃었다. 염상진이 사람들 앞에서 가장 자신만만하게 외쳤을 말이었다. "문 서방 생각으론 참말 같소?" "금메 말이요, 고렇게 됨사 싫을 작인 한나또 없을 것이지만서도, 시상에 고런 기막힌 인심이 워디 있을라디냐 하는 생각이 듬시로,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이 요상시럽당께라." - P209
"문서방, 문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하이라, 살아생전에 안 되면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 P209
"그렇지요. 농사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미쳤간디요? 지가 진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지 손으로 간수허는 맛에 살제 무신 초친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라, 닌장맞을 동냥아치도 아니겠고, 고런 농새도 안 지어라." - P210
"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겠소? 그 누구의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어허, 갈수록 태산이시. 아, 니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눔에 농새 아조자알되야묵겄소.지농새짓대끼쎄빠지게 일헐 놈하나또 없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수북농새지나마나 아니겠소?" "문 서방, 염상진이가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오." - P210
"머시 워째라? 명의도 없는 땅에 다 항꾼에 농사짓고 배급 타묵는다는 것 말인게라?" "그래요." "워메 시장시럽고 깝깝헌 거. 고것도 말이라고 헌당가? 그려서다 항꾼에 잘살게 된다고 떠들어쌓는갑구만. 근디 고건 공염불이여,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네밭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먼지도 몰르고." - P210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찜질당헐 소리제만 서방님앞이니께 허는 소린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한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덜해제, 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워디 믿고 의지헐 디 없는 판에 빨갱이 시상되면 지주다 쳐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이 워디 있겄능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 P212
"문 서방도 눈치로 다 알고 있겠지만 뒤숭숭한 세상이 됐소. 각별히 말조심하도록 하시오. 한 치 혀가 역적 만든다는 옛말이 있는데, 마음에 있는 생각이라고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P214
"긍께・・・・・・ 뒷돈 댄 일이 발각나서 잡혀갖고 농업학교운동장까지 끌려갔는디, 하늘이 도왔는지 거그서 잘 아는 사람을 만내 포도시 총살을 면허고 경찰서에 갇혔당마요. 고것이 어지께 아침 일 ‘인디, 앞일이 워쩌크롬 될랑가 알 수가 없응께, 얼렁 손잠 쓰라고친정서 사람을 보냈드만요." - P220
생각을 굳힌 것은 식민시대를 살아내서만이 아니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OSS동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포로취급을 당하면서였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수용소를 거쳐 하와이 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내면서 그 생각은 굳어졌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자존이나 독립을 철저하게 우롱하고 기만하며 강대국들의 상호 이익보호를 위한 연극적 대사였듯 연합국이라는 존재들이 해방된 한반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 P223
김범우는 백범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분이 2월 10일에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으로 발표한 3천만 동포에고함」이란 글은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피가 통하는 진실의 기록이었다. ‘ - P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