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이병철 지음 / 북레시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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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여자와 낚시와 詩와 자기 수련

[리뷰] 『낚 ; 詩』(이병철, 북레시피, 2018.08)

 

“자연의 일생이 오기에, 낚시는 단순히 물고기를 잡기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물고기라는 한 방문객과의 교감이다.” 『낚 ; 詩』(이병철, 북레시피, 2018.)에서 작가는 그의 생애와 자연 전체와의 교감을 멋진 에세이로 완성했다. 얼핏 책 제목을 보자면 ‘낚시’에 관한 이야기인지 ‘시’에 대한 이야기인지 분간이 안 된다. 내용조차 잔잔한 산문시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갖 화려한 어휘들로 가득하다. 책을 모두 읽고 느낀 점은 작가가 ‘시를 제대로 낚았다.’는 점이다.

 

책은 크게 ‘1부 낚시 사랑을 놓치다.’와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낚시’로 나뉜다. 1부에서는 한때 사랑하던 여인이 떠난 순간을 낚시와 비교해 설명했고, 2부는 낚시를 배운 계기와 기억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희열을 느낀 인생 순간들이 묘사된다. 84년생인 작가는 35살로서 그 중 거의 25년을 낚시를 하며 인생을 보냈다. 그만큼 이 책은 작가의 자선이라 할 수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는 은연중에 작가의 모든 삶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리라.

 

한때 ‘미생’이라는 만화가 인기였다. 바둑의 세계와 직장인의 삶을 수긍가게 만든 훌륭한 이야기였다. 비슷한 느낌이 책 『낚 ; 詩』를 읽는 동안 다가왔다. 작가는 삶을 낚시와 대비시켜 설명했다. 조금 아쉬운 건 미생만큼 삶의 그림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이지만, 조금 손본다면 나아질 것이었다. 작가에 의하면 낚시는 그저 순간에의 집중이다. 강바닥과 바다 속 지형을 상상하고, 물고기의 생각을 읽는 행위로, 낚시할 때는 세상에 오직 물과 자신만을 생각한다. 걱정도 없고 고뇌도 없는 낚시라는 세상이지만, 이곳을 벗어난 삶은 작가에게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로 가득한 1부

 

“어린 물고기들까지 꿰미에 꿰고는 바나나다발처럼 들고 자랑하는 꼴을 보면 몹시 쓸쓸하다……. 잔인한 짓이다. 내가 그랬다. 물고기에게는 관대하면서 당신에게는……. 사랑에도 캐치 앤 릴리즈가 필요하다.” 떠나버린 여인을 생각하며 작가가 쓴 한 문장이다. 문장만 따로 놓고 보면 슬픈 세레나데가 따로 없다. 그러나 낚시 이야기에 한창 빠져있던 독자라면 갑자기 여자 이야기로 전환되는 전개가 매우 어색할 것이다. 심지어 여자 이야기로 빠졌던 문장은 다시 낚시 이야기로 돌아오지 않고 끝나버린다. 이러한 단편의 글들이 수십 개다.

 

무엇보다 그 여자에 대한 간단한 비유가 아닌 완전히 벗어나 버린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떠난 여자’와 작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어렴풋이 추축하게 만들 정도다. 앞부분에 대비시킨 낚시 이야기로 ‘아 그 여자랑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하고 상상할 수 있을 뿐. 여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기에 더욱 그랬다. 작가로서는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조금 낮선 기법이다.

 

예를 들어 “미늘이 박혀 바늘 빼는 데 시간이 걸리면 스트레스에 취약한 송어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늘은 강력한 무기이자 양날의 검이다. 이미 당신의 손은 나를 놓아버렸지만 당신이라는 바늘은 내게 단단히 박혀 빠지지 않는다.”처럼 산문시로 흘러가다가 흐름이 딴판이 된다. 작가와 여자와의 구체적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그림자 같은 여자를 머리에 그리며 감정을 대비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는 ‘떠난 여자’와의 그리움이 사무쳐 낚시를 꾸준히 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떠올리며 반성하는 일기 모음집처럼. 대비와 비유 등 온갖 수식으로 낚시라는 삶의 현장과 떠난 그녀와의 삶을 묶는다. 그렇게 엮는다. “당신이 곧 내 세상이던 시절”을 기리며, 슬프고, 그립고, 좋은 세상이 사라졌음을 낚시로 위로 받고 자기 수련을 하는 식이다.

 

삶을 내려놓고 바라보아야 할 2부

 

2부에 들어서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강렬히 내비췄다. 기쁨과 그리움이 강렬했고 친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가족’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절제하던 마음을 풀어헤치는 존재가 아닌가. 인상 깊은 장면은 붕어찜에 대한 행복한 추억이었다. “무려 50cm 대형 쏘가리를 낚아냈다. 등단한 것보다 군대 전역보다 더 기뻤다……. 그 뒤로 한 며칠은 혼자 화장실 다녀오다가도 허공에 어퍼컷 세리머니를 했다.”는 부분과 노르웨이 여행 중 70cm 짜리 황금빛 대구를 잡은 장면에서 작가의 희열이 책을 뚫고 나올 정도였다.

 

화려한 묘사가 가득했고, 낚시 방법 뿐 아니라 낚시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묘사도 가득했다. “흘림낚시의 묘미는 물살 흐름에 따라 일정한 속도로 방출되던 낚싯줄이 물고기가 입질하는 순간 급격히 빠르게 풀려나가는 데 있다.”는 이 부분은 독자 역시 낚싯줄이 빠르게 풀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문장이 급박하며 상황에 맞다. 무엇보다 객관적 설명묘사보다 주관적 묘사가 많았고, 1부 보다 감정들이 생생하여 작가와 낚시를 간접 체험하며 이야기 듣는 듯 기행의 순간을 느끼게 한다.

 

낚시, 작가를 키운 그리움의 손짓

 

작가는 우연히 글을 쓰게 된 낚시 전문 작가가 아닌 시인이다. 직업이 낚시꾼이 아닌 진짜 ‘작가’란 말이다. 작가로서의 심정은 책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글을 쓰는 일보다 낚시를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원고 마감에 쫓길 때는 낚시가 마감의 동력이 된다…….”, “시는 쓰려고 하면 안 써지고 불안과 강박을 잠시 밀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고, 창문을 열어 빗소리 들을 때 온다……. 낚시도 계속 붙잡는다고 찌가 오르지 않는다.”며 항상 낚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특히 “낚시와 글 쓰는 일은 서로 닮아 있다. 낚싯줄의 긴장을 온몸으로 느낀다. 팽팽한 낚싯줄과, 찰나의 입질을 포착하는 행위……. 글은 자기 영혼을 갉아먹어 문장을 살찌우는 사람들이다. 자기 상처와 은밀한 내면을 미끼로 흔들어, 심연에서 헤엄치는 단 한 줄의 문장을 낚는다……. 둘 다 고도의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해야 한다.”는 부분은 왜 작가가 글쓰기와 낚시를 함께 하게 되었는지 알게 한다. 둘 다 비슷하면서도 힘든 일이지만 하나는 삶을 긴장시키는 일이고 나머지는 삶의 긴장을 푸는 일인 것이다.

 

작가는 아홉 살 때 낚싯대를 처음 잡았다. 아버지에게서 처음 배운 낚시는 그간 동네 골목서 친구들과 하던 술래잡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따위보다 훨씬 즐거웠다. 자가용이 생기고 작가는 더 부지런히 낚시를 다녔다. 그리고 온갖 낚시터를 헤매고 물고기를 잡아본 뒤, 처음 입문했던 붕어 낚시로 돌아왔다. 맛있게 붕어찜을 만들어주시던 어머니와 가족의 정을 포함해, 낚시를 처음 했을 때의 즐겁고 경이롭던 순수함들이 작가에게는 붕어낚시에 담겨있었다. “대부분 낚시꾼들이 비슷한 풍경으로 마음속에 간직한 어린 시절 추억 등 때 묻지 않은 초심을 향한 그리움이 결국 처음 낚시를 배운 물가 쪽으로 등을 떠민다.” 마치 어른이 되어서도 VR 게임 대신 동전 오락기를 즐겨 찾는 남자들과 비슷했다.

 

작가는 낚시야말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키운 팔 할이라고 강조했다. 낚시가 스승이고 학교며 책인 것이다. 『낚 ; 詩』는 다양한 얼굴을 지닌 책이다. 에세이고 개발서이고 시집이고, 낚시 입문서이고, 일기이자 자서전이고 기행문이다. 책을 덮고 끝부분에 작가가 쓴 글이 기억에 남는다.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아흔아홉 법 실패를 견디는 불가해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낚시는 인생과 무척 닮아 있다.” 작가는 아무래도 지금, 또 한 번의 기분 좋은 실패를 위해 낚시터에 가있으리라. 인생을 배우고, 지난날을 되새기고, 어른이 되어가는 한 소년의 성장 스토리를 보고 싶다면, 다가오는 가을에 어울리는 책 『낚 ; 詩』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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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빅마인드 - 초지능 초연결 시대의 거대 물결에 대비하라
박형준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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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 좌우되는 인간 행동 … 행복과 공감능력이 관건

[리뷰] 『빅데이터 빅마인드』(박형준, 리드리드출판, 2018.7)

 

저자의 필력이 제대로 느껴지는 좋은 책을 한 권 만났다. 바로 『빅데이터 빅마인드』이다. 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삽입돼 있지 않지만 내용이 정말 충실하다.

 

저자인 박형준 씨는 내 안의 ‘행복능력’과 내 밖의 ‘공감능력’을 강조한다. 이 두 키워드가 바로 책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 빅마인드』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부터 인공지능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최신 지식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행복능력은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고, 공감능력은 그것을 타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빅데이터 빅마인드』의 프롤로그 타이틀은 ‘뛰지 마세요! 아무도 쫓아오지 않습니다.’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박형준 저자는 왜 그렇게 불안해하며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지난날 생존의 위협을 느낄 만큼 부족한 시대에 살았던 현대인들의 유전자엔 성장 압박이 자연스레 박혀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번영을 추구하는데, 번영을 위한 환경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행복과 공감능력 배양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우선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잘 아는 게 중요하다. 인간의 뇌에는 무수히 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 모든 데이터들을 뇌가 이해하는 건 아니다. 『빅데이터 빅마인드』는 현대 뇌과학 이론인 ‘경쟁적 자취이론(Competitive Trace Theory)’을 인용한다. 뇌의 해마는 정보 중에서 생존에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들만 선별하고 패턴을 만든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데이터들이 최신 것들인지, 집단 공동체의 지향점과 일치하는지 등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건 바로 데이터다. 데이터는 데이텀(datum)의 복수 형태다. 그 자체로 많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데이터 기억 결과로 축소와 강화가 수반된다. 개인들의 ▶ 경험 ▶ 유전 정보 ▶ 문화가 뇌의 기억 정보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 정보가 어떤 정보들을 수집할지 결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소리가 좋다고 판단하는 건 그 집단의 가치관이 영향을 끼친다. 실험에 의하면 꼭 화음만 좋은 게 아니다. 불협화음도 누군가에겐 좋은 소리일 수 있는 것이다. 고전음악에만 심취한 문화는 다양한 소리를 이단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다. 기존의 데이터가 그 사람의 가치관까지 좌우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보단 내·외부 데이터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집단의 기억은 개인의 행동을 이끈다.

 

따라서 공동체는 매우 중요하다. 사실 인간의 몸 역시 인간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몸에는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수보다 약 10배 정도 많은 미생물들이 공생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미생물들을 위한 서식 환경인 것이다. 『빅데이터 빅마인드』에선 “‘나’라는 존재는 여러 생명체 정보의 집합체이고, 집단의식은 이러한 개인의 정보집합을 공유하는 (동질감을 느끼는) 범위이다”면서 “뇌는 이러한 정보들로 재구성된 세계를 바라보는 창구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박형준 저자는 “인간이 안으로는 다양한 세포기관과 관계를 맺고 밖으로는 다양한 사회관계를 맺는 것처럼 안과 밖에 복수의 ‘동질감 범위’가 존재하는 생명체는 다층구조의 테두리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식환경으로서의 내 몸과 생명체의 관계

 

인류의 뇌는 오랜 과정을 거쳐 필요한 정보들만 취사선택해왔다. 사실 뇌를 작동시키는 데에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인간이 섭취하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다. 현생인류의 대뇌엔 △ 운동지시 △ 감각처리 △ 기억 △ 언어기능이 있다. 모두 생존과 진화와 직결된 능력들이다. 그런데 인류의 기억은 뇌에만 저장되는 게 아니다. 실제 과학 실험에 따르면, 심장, 간, 신장 등 뇌 이외 기관에도 기억의 증거들이 포착된다.

 

인간은 기억 정보를 공유하는데, 그 방식이 특이하다. 『빅데이터 빅마인드』는 ‘양자적 동시성’을 언급했다. 이는 “생명체의 집단 정보 및 주변 환경 정보는 물리적 DNA로 전달되지 않고, 양자 공유(얽힘)를 통해 뇌가 인지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주인공 스캇 랭이 재닛 반 다인과 양자 공유되는 것을 장면과 같다. 중요한 건 정보가 전달되는 게 아니라 공유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박형준 저자는 “생명현상의 핵심은 유전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전체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적었다.

 

생명체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 변화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실험에 의하면, 사람은 지루함을 느끼는 것보다 차라리 전기충격을 선택한다. 결국 생명체란 “‘변화(엔트로피 증대)’를 촉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독립된 의식을 가진 개체”로 정의 내릴 수 있다. 내 안으로 작용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려면 변화와 탈주의 범위를 잘 구획해야 할 것이다.

 

경제성장만이 중요하던 시대에서 이젠 소비시대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시대엔 ‘초연결’과 ‘초지능’이 관건이다. 박형준 씨는 공감을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감은 타인과의 접촉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직접 행동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미래의 청사진은 ‘에피쿠로스 플랫폼’이 요청된다. 필요한 만큼의 생산이 가능해져, 각자 원하는 일을 하고,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다. 행복은 창조적 일을 하면서 나타난다.

 

『빅데이터 빅마인드』의 첫 페이지엔 피터 드러커의 말이 인용돼 있다. “계획이란 미래에 관한 현재의 결정이다.” 책의 말미엔 R.W. 에머슨의 명언이 기록돼 있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희망은 드디어 빛을 발한다.” 데이터의 흘러넘침 시대(빅데이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빅마인드가 필요하다. 빅마인드를 위해선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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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호기심 많은 관찰자 - 임정욱의 인사이드 아메리카 이야기
임정욱 지음 / 더난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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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타임, 성과, 직책보다 이름’ … 의전 없는 기업문화

[리뷰] 『나는야 호기심 많은 관찰자』(임정욱, 더난출판사, 2018.05.10)

 

저자는 실리콘밸리에 자주 간다. 미래를 읽기 위해서다. 2008년 처음 출장을 가고부터 그 곳에서 접한 정보와 경험, 생각을 SNS에 올리기 시작해 벌써 10년이 되었다. 글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읽었고 이 과정에서 현장의 고수들의 답을 받았다. 저자의 글들은 마침내 책 『나는야 호기심 많은 관찰자(임정욱의 인사이드 아메리카 이야기)』로 담겨 인쇄 매체로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2008년임에도 실리콘밸리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폰이나 블랙베리를 쓰고 있었다. 저자는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이를 한국에 알렸다. 라이코스의 CEO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미국 문화를 체득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회식이 있는 날의 경우 오후 2시에 회식을 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회식으로 영화를 볼 경우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5시를 넘으면 안 됐다. 5시 이후 미국인들의 삶에 패밀리타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야근 문화가 없고 일을 빨리 끝내면 집에 일찍 갈 수도 있다. 미국인들이 점심을 밖에 나가 먹지 않고 일을 하면서 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패밀리타임의 한 가지 단점은 직원들에게 특별한 일 없이 저녁식사를 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미국 문화의 특징은 회식에 흥미가 없는 직원들에 대해서는 일찍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한국 회사 생활의 경우 직원들의 단합이나 회식은 저녁에 이루어진다. 심지어 워크숍을 토요일에 가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는 관행이다. 직장이 삶의 중심인 한국과 달리 미국은 가족 구성원들 삶의 질이 중심인 것이다. 이를 회사에서도 배려하기에 가능했다.

 



패밀리타임을 중요시 여기는 미국 회사

 

실리콘밸리에서 CEO와 직원들과의 관계는 독특했다. 중요한 서류를 책상이 아닌 의자에 두고 가는 경우나, 이력서 작성법 등이다. 미국은 학력과 경력만이 이력서에 기재되곤 하는데 나이를 넣지 않는다는 점이 한국과 대조적이다. 우리는 여러 사람이 모일 경우 자연스럽게 누가 연장자인지 밝히고 시작한다. 상대를 부를 존칭이 필요하기에 그렇다.

 

미국처럼 상사에게 편하게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부르는 언어문화가 아닌 것이다. 미국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과정에서 상대를 더 기억하고 친근감을 느낀다. 청소부에게도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고 인간적으로 대한다. 호칭 없는 문화로 인해 나이를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소통한다. ‘나이가 많아 이 일은 못 할 거야.’와 같은 쓸데없는 편견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책 중간 중간 저자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곤 했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덧붙였다. 독자로서도 미국의 사례만 주구장창 듣는다면 재미는 없었을 것이었다. 또한 저자는 경험에 덧붙여 미래의 전망까지 제시하였다. 그 중 하나가 재택근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뜨는 문화이기도 하다.

 

미국은 성과위주로 평가받는 사회이기에 어디서 근무하건 성과만 좋다면 재택근무도 문제없다는 인식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는 회사도 있지만 대체로 성과가 좋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해고되는 것이 미국 회사이기에 열심히 해야 한다. 이로써 저자는 미국의 비즈니스 문화를 건조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경조사조차 지인만 불러내는 문화로 인해 3년간 근무하며 딱 한 번 결혼식에 초대받았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거래처 접대나 경조사, 관공서 대응 등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아 직원들이 비즈니스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에만 집중하고 남는 시간을 가족에게 쏟게 하는 것이 주요 관행이기 때문이다.

 

특유의 갑을관계가 적은 실리콘밸리의 모습

 

미국에서 직원들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우선시 한다. 회사 대표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직 내 모든 사람에게서 아이디어를 찾고 그 가치를 인정해준다. 심지어 2013년 9월 『뉴욕타임스』는 미국을 정면 비판하는 러시아 대통령의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타국의 다양한 견해를 수용한 것이다. 높은 지위가 사람을 꼭 창의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유명 인사라고 언론에 자유롭게 글을 실을 수 있는 것도 아닌 사회다. 다채로운 인종과 그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가능하다.

 

미국문화에 대한 이해는 질문의 정도에도 영향을 준다. 저자는 강연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도 책에 재미있게 풀어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문답 시간이 오면 질문을 하는데 대체로 한국 학생인보다 외국인들에게서 더 많은 질문이 나온다고 한다. 설사 질문이 우스꽝스럽더라도 멋지다고 박수를 쳐준다.

 

미국 직장인들은 항상 서로에 도움이 되는 파트너십을 맺는다. 승자독식에 가까운 한국과 다르다. 한국은 가장 높은 대표가 질문을 하고 나면 다음으로 한 단계씩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질문을 해나간다. 한국 특유의 갑을관계가 직장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한국은 지나치게 대기업 회장이나 고위 임원을 제왕처럼 모시는 듯하다.” 귀빈이 행사에 참석하거나 출장을 간다고 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은 미리 동선을 짜고 예행연습을 한다. 그러면서 진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국은 사장일지라도 비행, 숙박, 약속시간, 운전 등 출장의 모든 계획을 스스로 짜야한다.

 

임원들이 부하를 지위와 권위로 다룰 경우 솔직한 피드백을 해주는 사람을 얻기는 어렵다. 이 경우 임원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쉽다. 이러한 부정적 관계는 인수합병과 같은 기업 간 문제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인수합병은 회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역량을 단시간 내에 채울 수 있는 수단이다.

 

미국은 필요한 기능에 대해 직접 개발하기보다 관련된 회사를 인수한다. 덕분에 실력 있는 스타트업들도 이익을 얻는다. 한국의 스타트업은 인수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협상 과정을 도와주는 인수합병 전문 회사가 없는 것도 이유지만, 대체로 큰 회사가 헐값에 사려고 하기 때문이다. 기업 간에 인수합병 경쟁이 없으니 인수가가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구글은 창사 이래 지금까지 인수합병을 200건이 넘게 했다. 거기서 안드로이드와 유튜브가 나왔다. 인수합병을 잘하는 회사가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자면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은 외부의 혁신을 받아들여 빠르게 흡수하는 능력이 탁월한 셈이다.

 

제2의 실리콘밸리가 되어가는 중국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다음 실리콘밸리가 될 국가로 중국을 꼽아 이야기 해나갔다. 중국에서도 ‘선전’이라는 지역은 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현금을 쓰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물건을 사면서 현금이나 카드를 사용하면 비문명인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스마트폰을 애용한다. 동서울 부근 과일집에서 딸기를 사고 카드를 내민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현금만 된다.’는 이야기에 실망하고 나온 기억이 있다. 돈 ‘지불’이 물건 구매를 가능하게 하는 시대가 과거라면 이젠 지출방법도 고민해야 할 시대인 것이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지기도 했거니와 그에 따라 사업자들도 진화하려면 수고를 해야 한다.

 

저자는 실리콘밸리보다 중국의 스타트업 열기가 더 뜨겁다고 보고 있다. 2018년 3월 스타트업 분석 업체 CB인사이츠가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글로벌 유니콘스타트업 236개 중 28%인 66개 사가 중국이다. 미국 다음인 것이다. 중국 스타트업은 IT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창업이 이루어진다. 약국, 병원, 부동산 등 전통 산업 영역에도 도전이 끊이지 않는다. 자금 조달 환경이 풍부하고, 대박을 터뜨릴 투자 환경이 있기에 그렇다.

 

우리 국민들은 삼성과 LG의 능력만큼 중국의 기업이 거대하지 않다고 보는데, 우물 안 개구리이기에 그렇다. 진정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중국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됨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중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지금을 기회로 여겨야 한다고 적었다.

 

한 자리에 앉은 채로 세상의 흐름과 문화를 보았다. 『나는야 호기심 많은 관찰자(임정욱의 인사이드 아메리카 이야기)』는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세계의 기업가들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졌는지를 배우게 한다. 시야를 세계로 넓히고 싶다면 저자의 SNS를 팔로우 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매일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소개하기에 그렇다. 저자의 글들이 또 다시 묶여 10년 뒤 흥미로운 세상 안내서로 또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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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복잡한 세상을 만나다 -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지식인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완웨이강 지음, 이지은 옮김 / 애플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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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보단 ‘재차’ 주목해야 복잡한 문제 해결

[리뷰] 『지식인 복잡한 세상을 만나다』(완웨이강, 이지은 옮김, 애플북스, 2018.03.20.)


정말 멋진 책이다. 읽으면서 계속 감탄을 했다. 물리학도인 저자 완웨이강은 사회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는데, 대중적 학술의 접근으로 현안을 들여다본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제기하는 물음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 인공지능이 서서히 인간을 대신하고 있다. ▶ 많은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사회 전체적인 계층화 현상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사회과학이나 현대의 첨단과학은 과연 어떤 예측을 보여주고 있을까? 실제 실험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 같은 예측을 전문가들이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세 가지 선택지, 즉 ‘붕괴한다, 안 한다, 잘 모르겠다’의 3분의 1이라는 확률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이는 그동안 고슴도치처럼 빅 아이디어에만 주목한 결과다. 여우같은 스몰 아이디어로 한결 타협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스몰 아이디어의 예는 다음과 같다. 두고두고 새겨야 할 대목이다.


▫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는 데 능하다.

▫ 자신의 결정에 대한 신뢰도가 고슴도치보다 현저히 낮다.

▫ 결단을 내렸다고 해도 여전히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재검토한다.

▫ 자신의 예측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데 적극적이다.

▫ 고슴도치처럼 특정 영역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지만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 ▫ 다양한 문제를 쉽게 이해한다.

▫ 다양한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 갈등이 불거졌을 때, 당사잔 간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기꺼이 친분을 맺는다.

▫ 일하는 도중에 명확한 규정과 질서를 결코 추구하지 않는다.

▫ 정답이 여러 개인 문제를 선호한다. 문제를 해결할 때 종종 다양한 선택을 발견할 수 있다.


고슴도치와 여우를 대치시킨 건 단순함과 복잡함을 살펴보자는 이유다. 현대사회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현대사회가 얼마나 복잡하냐면, 정말 좋은 음악이 다운로드가 되는 게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최초의 승부가 시작되고 최후의 승자까지 결정된다. 그 어떤 합리성이나 인과가 없는 것이다. 저자인 완웨이강은 “단순함은 복잡함을 이기지 못한다”면서 복잡성을 갖춘 사람만이 복잡함을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얻으려면 죽도록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여우의 스몰 아이디어로 복잡성 접근하자


책의 제1장은 세계관 각성이다. 우리가 그동안 지니고 있던 편견들이 이 복잡한 세계에서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깨달아야 한다. 소위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어떤 사건 혹은 사안에 대해 사후적 의미의 해석에만 치우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예측은 상식만으론 안 되는 것이다. 상식이 부여하는 해석은 믿을 게 못 된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규칙을 찾아내려면 반복 실험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에 반복은 없다. 상식은 계속 나중에 작용되어, 상식으로 굳혀갈 뿐이다.


사람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느냐면, 프랑스의 폭력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2005년 10월, 소년 2명이 경찰 추적 피해 도망 다니다 감전사 했다. 이 때문에 사회적인 공분이 발생했다. 여러 사람들이 시위대로 나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런데 거리에 나선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나서기도 했다. 모방의 본능 때문이다.


문제를 스스로 분석한 후에 행동에 나설 것을 결정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니까 따라한 것이다. 심지어 모방을 위한 모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완웨이강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최초의 원인이나 사태가 확산된 이후의 결과가 아닌, 사건 발생 초기의 대응에 따라 결정된다.”면서 “안정을 유지하려면 ‘최초’가 아니라 ‘재차’의 존재 유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초가 아니라 재차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완웨이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특히 경제학이라는 것에 희망은 있다. 시장은 가치에 민감하다. 어떤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면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 반대로 좋은 것의 가치가 훨씬 크다면 대가를 치러도 괜찮다. 저자에 따르면, 시장은 회복 탄력성이 있다. 한 번 도태되더라도 사회와 시장은 엄청나게 복잡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가장 쉬운 경제학을 이해하는 포인트다.


책에서 더욱 주목할 대목은 품격이 강조되는 측면이다. 아무리 중국과 미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인성이 없으면 말짱 황이다. 명문대생은 섬세한 이기주의자일 가능성이 크다. 인성과 재능을 겸비하기 위해 일명 차터 스쿨이라는 곳에서 참고한 7가지 덕목이 책에는 소개돼 있다. ▷ 강인함 ▷ 자제력 ▷ 열정 ▷ 사교 ▷ 감사 ▷ 긍정적인 마음 ▷ 호기심. 성현이 되는 길은 겸손함에 있으며, 품격을 수련하기 위해선 충동을 없애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게 중요하다. 큰일을 하고 싶다면 더더욱 품격을 길러야 한다. 책에서 인용한 <역경>의 “군자가 날이 마치도록 최선을 다하고 저녁에는 반성한다”는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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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종활 일기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정환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스무 살 생일부터 ‘죽음’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자

[리뷰]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하시다 스가코, 김정환 옮김, 21세기북스 2018.03.06.)

 

일본의 대표적 드라마들의 대본을 쓴 작가답게 글을 매우 잘 썼다. 바로 하시다 스가코의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말이다. 그녀는 고령의 나이를 맞아 ‘안락사’가 허용되길 소망한다. ‘오싱’과 ‘세상살이 원수 천지’라는 드라마 대본을 쓴 작가라 그런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역설적이게도 풍성하다. 90세를 넘기면서 기력이 쇠하는 것을 느낀 스가코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길 바란다.

 

작가 스가코는 본인의 생각을 한 잡지 <분게이슌주>에 투고했다. 그리고 그해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분게이슌주 독자상까지 거머쥐게 된다. 특히 여러 독자들로부터 공감의 편지와 사연을 받았다.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의 말미에는 안락사 허용에 공감하는 독자 3인의 편지가 실려 있다. 또한 나만의 엔딩노트를 작성할 수 있도록 죽음에 대한 질문과 여백을 두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이다. “나는 ‘평안하게’, ‘즐겁게’ 죽고 싶다.” 작가 스가코는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종활 일기를 쓰고 있다. 그녀는 젊은 나이인 스무 살 생일에 죽음을 생각하자고 조언한다. 모든 생명이 평등한 건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작가 스가코는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면서 “매년 생일에 케이크를 사듯이 생일이 찾아올 때마다 죽음에 관해 두세 줄 적어놓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스무 살 생일에 죽음을 논해보자

 

작가 스가코는 전쟁을 겪으며 죽음의 참상을 직접 보았다. 일상은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만날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만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죽음을 당연하게, 무섭지 않은 것으로 느끼고, 체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심지어 전쟁 통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살아계심을 확인했다. 그러자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죽음이 당연했고, 생존이 기적 같은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후 이젠 살기 위해 작가 스가코는 전력을 다했다.

 

전쟁이 그녀에게 끼친 영향력은 크다. 한국에서도 ‘오싱’은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들을 만난 적 있다. 작가 스가코는 <오싱>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썼다. 전쟁의 책임을 잊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한편, 전쟁에서 진 덕분에 신분 차별이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작가 스가코는 적었다.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계급이 사라진 건 전쟁에서 일본이 진 ‘덕분’이라는 것이다.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서문엔 국내 법의학자 유성호 서울대 교수의 추천 글이 쓰여 있다. 국내외 안락사 관련 제도와 현황 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허용되는 죽음에는 ▷ 자발적 안락사 ▷ 조력사망 ▷ 연명의료 중단 결정 등이 있다. 안락사를 뜻하는 영어 ‘euthanasia’는 그리스어 편안한(eu) 죽음(thanasia)을 뜻한다. 책에서는 존엄사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자기 결정권의 표현이라고 했다. 또한 의사 조력 자살(Physician Assited Suicide, PAS)과 적극적 안락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는 조금씩 논의되는 분위기다. 안락사와 존엄사는 다르다.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에 따르면, 환자가 원해서 치사약을 처방받으면 ‘적극적 안락사’다. 반면, 연명 치료를 거부하여 죽음을 맞으면 그건 바로 ‘소극적 안락사’다. 그런데 안락사 허용으로 인해 합법적 자살이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작가 스가코는 미국 오리건주 사례를 들었다. 이곳에선 안락사 약을 받은 약 40%의 사람들이 마지막엔 약을 실제로 복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 중간 중간에 들어가 있는 삽화(그림)가 참 멋지다.

 

안락사와 존엄사는 결국 자기 결정권의 표현

 

1976년 설립된 일본존엄사협회는 본인의 말기 의료에 관한 사전 지시서인 ‘리빙 윌(living will)’에서 다음과 같이 내용에 대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서명한다. “저의 부상이나 질병이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태이며 이미 죽음이 임박했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경우, 단순히 죽음의 시기를 늦추기 위한 연명 조치는 거부합니다. 다만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 등을 적절히 사용해서 충분한 완화 의료를 실시해주십시오. 제가 회복 불가능한 천연성 의식 장애(지속성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을 경우 생명 유지 조치를 취하지 말아주십시오.”

 

죽음의 방식은 결국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생명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 ‘노노간병(老老看病 : 노인이 노인을 간병)’은 사회적 문제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게 큰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뒷받침이 없으면 개인의 노력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고 만다.

 

작가 스가코는 죽음을 전공한 의사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죽음을 편안하게,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의료인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치료뿐만 아니라 잘 죽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역시 의사가 해야 할 일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것만 아니라 언젠간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작가 스가코는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문화에 대해 “의료가 발달한 시대를 사는 우리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죽음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얘기할 때다. 모든 생명에 부여된 죽음이라는 운명은 결코 피하거나 막을 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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