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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2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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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를 알레고리로만 읽는다면 유치한 한 편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을 풍자하고, 휴머니즘적 저항을 옹호하는 표면적인 교훈극. 간단한 삼단논법으로 이를 증명해 보자.


코뿔소는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는 유치하다.

코뿔소는 유치하다.

QED.


논증은 막강하다. 논증은 무적이다. 이 또한 간단한 삼단논법으로 증명해 보자.


펜이 총보다 강하다.

총이 코뿔소보다 강하다.

펜이 코뿔소보다 강하다.

QED.


이게 이오네스코가 하려는 것이다.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웃기려고? 어쩌면 물어보려는 것일 테다. 당신은 이런 헛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우습다고?


그래, 우리 모두 다 우습다.


이마에 뿔이 솟으려 한다.



*



이오네스코는 논리의 파산을 연출하는 극작가다. 그의 언어는 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며 그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낸다. 네 발 달린 짐승은 모두 고양이이며, 모든 고양이는 죽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고양이라는 논리학의 극의. 헛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드는 황당한 농담들의 난장. 말이 되지 않는 말은 우습다. 말이 되는 말도 우습다.


이렇게 말을 비웃고 있으려니 내 처지가 옹색하다. 엉덩이가 간지럽고 뒷덜미가 따끔하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우스운 말 없이는 도무지 살 수가 없질 않나. 나는 그런 인간 중에서도 말이 많은 편이고. 과묵한 사람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진 않을 터. 인간은 말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동물이니까. 말을 지어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고, 가끔 그냥 못 들은 척하고. 그러지 않고서 이 시끄러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단 말이야?


그때, 멀리서부터 코뿔소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살다 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가끔 덮치는 것이다. 실은 자주.



*



그러므로 『코뿔소』의 등장인물들을 어떤 전형으로 읽는다면, 그건 피상적인 정치적 태도—기회주의자라거나 보수주의자라거나—의 분류학에 그치기보다는, 경황없는 말이 가까스로 새어 나오는 입술 모양을 살피는 독순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턱은 완고하고, 어떤 입꼬리는 옹졸하며, 어떤 입술은 부루퉁하다. 어떤 입술은 촉촉하고, 어떤 치아는 가지런하며, 어떤 혓바닥은 유연하다. 어떤 이의 생각은 합리적이고, 어떤 이의 어조는 열광적이며, 어떤 이의 말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일 뿐.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뒤집어지고, 혓바닥이 비비 꼬이며, 코뿔소는 턱을 다물고 질주하듯 달아난다. 콧김을 씩씩 뿜으며. 그리고 우리 이마에선 뿔이 솟는다. 또는 입이 떨어져 나간 주둥이에서. 한 개 또는 두 개의 뿔이.


달리는 코뿔소의 이마에 솟아난 뿔피리는 얼마나 우스운가. 우리는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게 만들고, 믿고 싶은 것을 말이 되게 만든다. 모든 건 말 만들기 나름. 언어란, 논리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닌가.


돌진하는 뿔 끝에 걸린 비극의 진실은, 우리가 이 헛소리를 웃어 넘길 수만 없다는 데 있다. 우리 이마는 늘 간지럽고, 피리 소리는 하염없이 머릿속을 울린다. 소음은 공기를 떠나지 않는다. 말은 공기에 형태를 만든다.


우리는 자기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세상을 믿는다. 토사물을 보여 주면서 소통한다고 믿는다.


현실은 말 만들기 나름.



*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는 자가 현실에 닻을 내리지 못한 주정꾼 베랑제라는 사실은 그래서 별로 놀랍지 않다.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기존 세계의 질서도, 신 세계의 광풍도. 질주하는 코뿔소 무리가 일으키는 소음과 먼지 속에서 ‘최후의 인간’으로 남겠다는 베랑제의 외침은 그러므로 애달프면서 공허하다. 베랑제가 고수하려는 ‘인간’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이 극을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휴머니즘적 저항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그것이 겨냥하는 이데올로기만큼 취약하고 순진하다. 베랑제의 외침이 단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지는 않겠다는 다짐이라면, 그 정도가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윤리이거나 미학일 것이다.


인간은 고독에 짓눌리면서, 사회에 짓밟히기도 한다. 고독과 사회를 동시에 버거워하는 건 모순이라는 장의 ‘타당한’ 비판과 달리, 여기에는 모순이 없다. 삶에는 배중률이 적용되지 않는다. 베랑제가 끝까지 남은 것은 그가 강한 신념과 명징한 정신으로 무장한 덕분이 아니다. 그저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코뿔소』에 대한 가장 나은 이해는, 베랑제가 시대의 발굽에 짓밟히고 낙오된 인간-고양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끝나야 하지 않나. 우리처럼 찢기기 쉬운 피부를 지닌, 죽어야 하는 발 달린 짐승이라는 건조한 사실에서. 거기엔 도덕이 없다. 도덕은 그다음에.


일단 낙오가 먼저다.



나는 차마 후피동물이 못 되려나 보다. 아직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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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김쿠만 지음 / 허블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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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어떻게 받아들 것인가? 미래는 어떻게 도래할 텐가? 이것이야말로 현대(소설)의 아포리아다. 우리는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갈 길도 끊긴 시대에. 이마저도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시간 관념에서 벗어난 채로 알 수 없는 지점을 맴돌고 있다. 폐쇄회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김쿠만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제목과 필명에서부터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첫 소설집의 제목에서도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마니아』를 빌려 왔듯이, 김쿠만은 이번에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근작에서 제목을 빌려 왔다. 그의 필명 또한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한 오마주인 만큼, 더욱이 소설 내내 타란티노 영화의 시그니처인 ‘레드애플’ 담배가 등장하는 만큼, 타란티노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게다가 김쿠만이 타란티노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사실 단순한 제스처 같지는 않다.


누구나 알다시피, 타란티노는 젊은 시절 비디오가게 점원으로 근무하며 스파게티웨스턴과 각종 익스플로이테이션필름들을 섭렵했다. 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B급 영화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당시에 수집한 6070 영화들의 소스를 입맛대로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90년대의 기념비적인 감독이 되었다. 그의 출세작인 〈펄프 픽션〉은 비선형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성공적으로 장르화한, 그러니까 시간 순서를 이리저리 마구 뒤섞어 놓은 영화였는데, 한국 개봉 당시 한 영사기사가 이를 오해하곤 적확한 시간 순서대로 필름을 복원해 놓았다는 우스운 후문도 있다(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하나에서도 차용한 일화다).


이전에도 시간이나 의미라는 테마를 독창적으로 다룬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펄프 픽션〉이 상업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타란티노는 제시간에 나타났다. 90년대는 타란티노를 쿨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X세대』의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는 자기 시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정의할 만한 문화적 활동이나 그런 순간을 만들어 낼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무시간성timelessness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 언젠가 공산주의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헤드라인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냥 "오!"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 사회 전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 나는 다시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시간을 규정할 수 없으면 플롯을 구성할 수 없다. 플롯을 구성할 수 없으면 의미를 생성할 수도 없다. 적어도 서사라는 맥락에서는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의 폭력은 샘 페킨파의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건드리지도 않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처럼 불가해하지도 않다. 타란티노의 폭력은 오로지 유희에만 봉사한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나는 타란티노를 꽤 좋아한다. 타란티노의 영화에 미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타란티노야말로 의미의 강박을 완전히 벗어던져 버린 첫 번째 세대였다고. 타란티노는 역사나 현실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문제는 우리가 90년대를 떠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근작은 60년대를 회고하는 영화고, 그다지 재미있진 않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포스트모던'하게 시간 축을 뒤섞는다. 소설 바깥의 참조점을 거부하거나 마음대로 전용하고, 작가 멋대로 세계를 창조해 낸다. ‘레드애플’, ‘남해’, 소설가, 게임과 AI 등의 테마는 이 소설집을 한 편의 연작소설처럼 읽게 만든다. 김쿠만이 구술하는 ‘판교’는 장류진의 판교 리얼리즘과는 다르며, 그가 회고하는 기억은 사실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포스트-포스트모던'하게 시작과 끝을 가리키고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한다. 시작은 찾을 수 없거나 아무렇게나 뒤적거린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끝은 그렇게 벌려 놓은 이야기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적당히 끝맺으면서도, 마치 백년열차의 속도처럼 느리게, 자꾸 뒤돌아보며 진행하는 소설은 예측 또는 상상으로 찾아낸 '과거의 미래'를 그리워한다. 열차를 멈춰 세우고, 밖으로 나가 헤매려 한다.


나야 물론 안 그래도 헤매고 있고, 또 게으르고 걸음이 더딘 탓에, 이런 소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또한 아직 미래-소설은 아니라는 확실한 예감, 또한 여전히 방향 감각이 불분명한 '요즘 소설'일 뿐이라는 아쉬움도 남는 것이 사실이다.


말미에 실린 비평마따나 이 소설이 과거의 낭만과 자유로움을 애정하면서 폭력과는 '깨끗하게 결별'했다면, 그건 작가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직 도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쿠만의 소설은 타란티노처럼 오락적인 폭력을 전시하고 즐기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타란티노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김’쿠’만이겠지만…)


요컨대 김쿠만은 아이린과 메구미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 중'인 것이다. 어쩐지 치열하다기보단 약간 늘어진 듯한 모양새로. 그러니까 하루키풍으로.


작가나 작품에 책임을 돌릴 생각은 없다. 어쩌면 이건 시대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예측 가능성을 돌파하여 미래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소설을 기다린다. 텍스트는 시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는 의미심장한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기어코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계 태엽을 다시 돌려야 하는 때라고 나는 믿지만, 그러나, 약간 졸리운 듯이 손가락을 꼬며 태엽을 되감지 않고서는 태엽을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멋대로 과거를, 현실을, 정치를, 도덕을 점유하고 섣불리 전쟁에 나서는 ‘가짜 미래 소설'들—나는 지금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과 그 밖의 엇비슷한 ‘요즘 소설’들을 떠올리고 있다—보다야, 나는 이쪽이 더 미덥다는 얘기다.


물론 그것도 여기까지다. 첫 책부터 '레트로 마니아'임을 밝혔던 작가가 세 번째 책에서도 '원스 어폰 어 타임'을 읊었다면, 다음 책은 이제 현재를, "그러니까 미래의 일이 될" 소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미래로 다가가야 될 것이다. 포스트-타란티노 시대로. 펄프픽션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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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투라 CULTURA 2024.9 - Vol.123
작가 편집부 지음 / 작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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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잡지를 좀 읽으려 한다.


일간지 기자를 거쳐 단행본 편집자로 일하다 보니 담론-현실의 시차와 매체 간 차이를 꾸준히 의식하게 된다. 국내 계간지들을 매개 삼아 90년대를 역사화하는 윤여일의 저작을 읽은 뒤로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이번 호 《쿨투라》를 읽게 된 건 단순한 동기에서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오랫동안 관심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효용 따위를 자문하고 회의하고, 그러다가 저주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풀리는 종류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게 됐을 뿐이다. 관건은 계속하는 데 있다. 이유를 캐묻는 게 아니라.


뭔가를 물어야 한다면, 근거보다는 좌표와 벡터를 묻는 편이대체로낫다. 어쨌거나 계속 읽고 쓸 생각이라면.



*



《쿨투라》는 담론 구축보다는 정보 전달 성격이 강하다. 구체적인 현실을 진단하고 사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옅어 뵌다. 각종 전시에 대한 소개글은 재미있지만


지금 한국에서 예술은 정치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 다섯 편의 테마기사는 이 물음을 충분히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벨트를 질끈 동여맬 따름이다. 비평에는 불필요한 태도다. 운전을 할 때라면 몰라도.


그래도 문예비평가 출신 1호 국회의원인 강유정과의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작금의 문예/비평이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상황에서, 현실정치에 뛰어든 강의원의 목소리는 확실히 눈길을 끌었다. “문화예술은 삶의 보충재 혹은 사치재가 아니라 필연적 산물이자 요구이고 매개라는 선언에는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다.


올 초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정부가 취약 계층에 무료 OTT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기사였는데 부정적인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닥 놀랍지 않게도, 논쟁은 대부분먹고사니즘수준에 그쳤다. 많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가난뱅이에게 문화는 사치라는 생각이 박혀 있다.


챌린지 문화를 소개하기 전에 여기 먼저 개입해야 하지 않나. 2024년 한국의 문화지라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해리스 지지 선언을 보고 든 생각인데, 연예인의 정치 참여 문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



아래는 다섯 편의 테마기사에 관한 단평이다.


최선희의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을까?」는 뱅크시에서 아이웨이웨이를 거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는 글이다. 요지에는 동의하지만, 딜레마를 좀더 깊이 제기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뱅크시만 하더라도 훨씬 흥미로운 모순을 품고 있지 않나. “뱅크시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바로 그것, 백만장자의 집을 꾸미는 트로피가 되었다.”(『뱅크시 벽 뒤의 남자』 中)


강성률의 「역사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 영화계」는 〈건국전쟁〉과 〈파묘〉로 표상되는 요사이 한국 영화계의 담론 투쟁을 기술하다가영화판이 정치판이 되고 말았다는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의 한탄은 명백히 한쪽을 겨냥하고 있음이대통령 지지율과 뉴라이트 옹호 수치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지지하진 않지만, 이럴 거라면 짐짓 중립적인 체하기보다는 〈건국전쟁〉에 대놓고 싸움을 거는 편이 나을 것이다.


허희의 「국가의 법과 사랑의 주체」는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를 다룬 두 편의 희곡을 통해법에 우선하는 개인의 윤리라는 안티고네적 테마를 다루는 글이다. 동시대 이슈를 다루진 않지만 본질적인 주제를 한국적 텍스트와 접합시켜 역사적으로 독해한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최연정의 「예술에 있어 ‘PC’함」은 가장 짜증 나는 글이었다. PC주의에 호의적임이 뻔한데도 안 그런 척하는 건 둘째치고, 하이데거를 길게 인용하면서 예술과 정치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대목도 지겹다. 굳이 하이데거씩 끌어올 필요가 없는 나이브한 얘기다. 이 글은 차라리 PC주의적 예술 실천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이 됐어야 한다. 나야 PC주의 자체를 싫어하지만, 그 편이 읽기엔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김세은의 「지금 무슨 노래 듣고 계세요?」는취향정체성을 동일시하지 말자는, 가볍게 읽을 만한 에세이인데, 동의하고 싶진 않다. “취향은 취향일 뿐 인생을 걸지 말자는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는 슬로건을 부제로 내걸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현대의 문제는 취향에의 지나친 진지함이 아니라 지나친 가벼움이다. 유운성의 말마따나, ‘취향 존중이란 네가 뭘 좋아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냉소주의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그것보단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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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역사 -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 필로버스 총서 2
김민호 지음 / 에디스코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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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데리다의 언명이 어떻게 오해되어 왔는지, 데리다를 따라 다니는 ‘상대주의자‘, ‘회의주의자‘라는 딱지가 어째서 얼토당토않은 오독인지 해명해 줍니다. 게다가 꽤 친절하기까지~ 관련된 논의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습니다. (3부는 좀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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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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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서평단 #알려지지않은밤과하루 #배수아

https://www.youtube.com/watch?v=07WXXtF1tyw


어쩌면 추리소설인지도 모른다. 대강 이렇게 전개되는.


흰 무명 천 너머 흔들거리는 실루엣의 희미한 흔적을 눈으로 쫓는다. 흔적은 “실체가 아닌 형체들”이며, 질량이나 부피를 갖지도 않고, 그나마 윤곽조차 흐릿하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임의로 정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금도 침범하지 못”한다(이건 제발트의 문장인데, 배수아가 번역한 것이다).


그때 창문 너머에서는 “예리하게 날 선 보랏빛이 늙은 부모인 회색빛 흐릿한 어둠을 살해”하는 중이다. 그 장면은 눈먼 부엉이의 시신경에 전달되는 신호 같은 것이다. 해는 뜨겠지만 그들은 눈을 뜰 수 없다. 막연하게 흔적을 좇을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러니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들의 밤과 하루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다. 알려지지 않은 채로. 이 도시의 숨겨진 이름은 ‘비밀’이다.




어둠은 어둠인 이상 방 안 좁은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다(이건 이상의 문장인데, 내가 적당히 번역한 것이다). 존속을 살해하려 한 보랏빛이 창문의 프레임에까지 넘실거린다. 그림자의 군사들이 붉게 피를 흘린다. 흰 무명 천으로 만든 옷이 피에 젖는다. 아니 물인가?


그 순간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헤더야트는 이란의 작가로 『눈먼 부엉이』는 그의 대표작이죠.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입니다. 특히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신비한 반복 진술이 환상과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느끼게 합니다. (…) 그의 생애에는 알려진 자살 기도가 한 번 있었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해 그는 파리에서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그는 센 강변 으슥한 곳의 한 낡은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리 아래의 보트에서 한 쌍의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즉시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익사 직전의 헤더야트를 구했습니다. (…)”


그는 물속에 있다. 오래전부터 물속에 있었던 것 같았고, 물속에서 빠져 나가는 법도 알지 못한다. 검은 강물과 새벽 공기의 모호한 경계에서 어푸어푸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누군가 생각한다. “거기에는 물결이 만드는 작은 떨림 같은 것도 있고 낯선 외로움 같은 것도 있다. 결국 물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이장욱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배수아는 이렇게 쓰지 못한다.


사데크 헤더야트는 물속에서 빠져나왔거나 끌려나온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다시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계선을 지우는 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을 수 있다. 넘나들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그저 지우기 위해서거나.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선 우선 경계를 전제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 작가들은 선을 흐리게 뭉갤지언정 아예 지워 버리진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선명하게 긋기도 한다.


배수아나 제발트 같은 작가들은 아무래도 넘나들지 못하는 쪽이다. 그들은 쪼그려 앉아서 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벅벅 지운다. 다시 일어나서 걸어 보지만, “순간적으로 갑자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좌표의 혼란을 겪는다. 이들에게 혼란은 비일상적인 사건이라기보단 늘상 겪는 일이다. 원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현기증을 극복하는 법을 모른다. 글을 쓰는 것밖에는.


정지돈은 사데크 헤더야트의 소설에서 이름을 빌려 소설을 썼다.「눈먼 부엉이」에서 그는 눈을 감거나 반쯤 뜬 채로 말한다.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글을 쓰라고.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고.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배수아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두 권 번역했다.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아구아 비바Agua viva』라는 소설인데, ‘아구아 비바’는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이고, 보통은 해파리를 말한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낯선 포르투갈어를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국역본의 제목으로 옮겼다는 점이 눈에 띈다. 편집자 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살아 있는 물'은 뼈대 즉 특정한 형태를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 살아 있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해파리는 그 세계와 가장 닮은 개체다. (…)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것, 심지어 세계인 동시에 개체인 것을 그리기. 즉 모든 구조와 경계를 넘어선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


배수아는 이 소설을 번역하거나 편집하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2uyHtg56yTY


갑자기 어디선가 라디오가 켜졌고, 오디오북이거나 예전에 들어본 노래가 나왔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는. 상처가. 있다."


아무래도 이 소설을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사건의 실체가 있어야 하지만, 말했다시피 여기에는 “실체가 아닌 형체들”만 있다. 형체들의 희미한 윤곽이 소설의 세계를 온통 잠식해 온다. 이 세계에는 뚜렷함이나 질량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안팎이라는 구분도 전연 무의미하다.


그걸 환영이라고 부르든 그림자라고 부르든, 좋다. 저절로 켜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출처 불명의 낯선 음성처럼, 배수아의 언어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간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품은 꿈과 어둠, 그러니까 비밀의 도시로.


거기서 우리는 물속에서 꿈꾸는 것 같거나, 무더위에서 신기루를 보는 것 같다. 아야미, 여니, 마리아, 얼굴이 얽은, 힘줄이 불거진 앙상한 다리, 시인이거나 은퇴한 무명 배우인, 극장장이거나 부하인,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면서 여자인… 정체성의 증폭과 중첩은 소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게 만든다.


단지 다음의 두 대목을 나란히 포개어 놓고 여러 번 읽어볼 따름이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고립되어버리지 않을까요? 단 한 사람도 설득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우리의 무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혼자서 고개를 돌리고 아주 멀리 가버려야 한다는 의미잖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말이죠. 우리는 평생 동안 황야에서 양들과 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별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양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면 당신은 세상은 변함이 없노라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75p)


"당신이 편지에서 쓴 것처럼..." 극장장이 말했다. "이제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아야미는 극장장의 머리를 껴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가만히 놓았다. 그리고 그가 구토를 다 마칠 때까지 대못의 뭉툭한 대가리가 만져지는 피투성이 정수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마치 그것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두 인간이 동시에 한 장소에 있기 위한 유일한 주술의 몸짓이라고 믿는 것처럼. (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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