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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김쿠만 지음 / 허블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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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어떻게 받아들 것인가? 미래는 어떻게 도래할 텐가? 이것이야말로 현대(소설)의 아포리아다. 우리는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갈 길도 끊긴 시대에. 이마저도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시간 관념에서 벗어난 채로 알 수 없는 지점을 맴돌고 있다. 폐쇄회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김쿠만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제목과 필명에서부터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첫 소설집의 제목에서도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마니아』를 빌려 왔듯이, 김쿠만은 이번에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근작에서 제목을 빌려 왔다. 그의 필명 또한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한 오마주인 만큼, 더욱이 소설 내내 타란티노 영화의 시그니처인 ‘레드애플’ 담배가 등장하는 만큼, 타란티노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게다가 김쿠만이 타란티노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사실 단순한 제스처 같지는 않다.


누구나 알다시피, 타란티노는 젊은 시절 비디오가게 점원으로 근무하며 스파게티웨스턴과 각종 익스플로이테이션필름들을 섭렵했다. 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B급 영화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당시에 수집한 6070 영화들의 소스를 입맛대로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90년대의 기념비적인 감독이 되었다. 그의 출세작인 〈펄프 픽션〉은 비선형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성공적으로 장르화한, 그러니까 시간 순서를 이리저리 마구 뒤섞어 놓은 영화였는데, 한국 개봉 당시 한 영사기사가 이를 오해하곤 적확한 시간 순서대로 필름을 복원해 놓았다는 우스운 후문도 있다(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하나에서도 차용한 일화다).


이전에도 시간이나 의미라는 테마를 독창적으로 다룬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펄프 픽션〉이 상업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타란티노는 제시간에 나타났다. 90년대는 타란티노를 쿨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X세대』의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는 자기 시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정의할 만한 문화적 활동이나 그런 순간을 만들어 낼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무시간성timelessness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 언젠가 공산주의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헤드라인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냥 "오!"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 사회 전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 나는 다시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시간을 규정할 수 없으면 플롯을 구성할 수 없다. 플롯을 구성할 수 없으면 의미를 생성할 수도 없다. 적어도 서사라는 맥락에서는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의 폭력은 샘 페킨파의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건드리지도 않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처럼 불가해하지도 않다. 타란티노의 폭력은 오로지 유희에만 봉사한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나는 타란티노를 꽤 좋아한다. 타란티노의 영화에 미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타란티노야말로 의미의 강박을 완전히 벗어던져 버린 첫 번째 세대였다고. 타란티노는 역사나 현실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문제는 우리가 90년대를 떠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근작은 60년대를 회고하는 영화고, 그다지 재미있진 않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포스트모던'하게 시간 축을 뒤섞는다. 소설 바깥의 참조점을 거부하거나 마음대로 전용하고, 작가 멋대로 세계를 창조해 낸다. ‘레드애플’, ‘남해’, 소설가, 게임과 AI 등의 테마는 이 소설집을 한 편의 연작소설처럼 읽게 만든다. 김쿠만이 구술하는 ‘판교’는 장류진의 판교 리얼리즘과는 다르며, 그가 회고하는 기억은 사실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포스트-포스트모던'하게 시작과 끝을 가리키고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한다. 시작은 찾을 수 없거나 아무렇게나 뒤적거린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끝은 그렇게 벌려 놓은 이야기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적당히 끝맺으면서도, 마치 백년열차의 속도처럼 느리게, 자꾸 뒤돌아보며 진행하는 소설은 예측 또는 상상으로 찾아낸 '과거의 미래'를 그리워한다. 열차를 멈춰 세우고, 밖으로 나가 헤매려 한다.


나야 물론 안 그래도 헤매고 있고, 또 게으르고 걸음이 더딘 탓에, 이런 소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또한 아직 미래-소설은 아니라는 확실한 예감, 또한 여전히 방향 감각이 불분명한 '요즘 소설'일 뿐이라는 아쉬움도 남는 것이 사실이다.


말미에 실린 비평마따나 이 소설이 과거의 낭만과 자유로움을 애정하면서 폭력과는 '깨끗하게 결별'했다면, 그건 작가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직 도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쿠만의 소설은 타란티노처럼 오락적인 폭력을 전시하고 즐기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타란티노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김’쿠’만이겠지만…)


요컨대 김쿠만은 아이린과 메구미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 중'인 것이다. 어쩐지 치열하다기보단 약간 늘어진 듯한 모양새로. 그러니까 하루키풍으로.


작가나 작품에 책임을 돌릴 생각은 없다. 어쩌면 이건 시대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예측 가능성을 돌파하여 미래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소설을 기다린다. 텍스트는 시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는 의미심장한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기어코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계 태엽을 다시 돌려야 하는 때라고 나는 믿지만, 그러나, 약간 졸리운 듯이 손가락을 꼬며 태엽을 되감지 않고서는 태엽을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멋대로 과거를, 현실을, 정치를, 도덕을 점유하고 섣불리 전쟁에 나서는 ‘가짜 미래 소설'들—나는 지금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과 그 밖의 엇비슷한 ‘요즘 소설’들을 떠올리고 있다—보다야, 나는 이쪽이 더 미덥다는 얘기다.


물론 그것도 여기까지다. 첫 책부터 '레트로 마니아'임을 밝혔던 작가가 세 번째 책에서도 '원스 어폰 어 타임'을 읊었다면, 다음 책은 이제 현재를, "그러니까 미래의 일이 될" 소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미래로 다가가야 될 것이다. 포스트-타란티노 시대로. 펄프픽션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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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투라 CULTURA 2024.9 - Vol.123
작가 편집부 지음 / 작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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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잡지를 좀 읽으려 한다.


일간지 기자를 거쳐 단행본 편집자로 일하다 보니 담론-현실의 시차와 매체 간 차이를 꾸준히 의식하게 된다. 국내 계간지들을 매개 삼아 90년대를 역사화하는 윤여일의 저작을 읽은 뒤로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이번 호 《쿨투라》를 읽게 된 건 단순한 동기에서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오랫동안 관심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효용 따위를 자문하고 회의하고, 그러다가 저주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풀리는 종류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게 됐을 뿐이다. 관건은 계속하는 데 있다. 이유를 캐묻는 게 아니라.


뭔가를 물어야 한다면, 근거보다는 좌표와 벡터를 묻는 편이대체로낫다. 어쨌거나 계속 읽고 쓸 생각이라면.



*



《쿨투라》는 담론 구축보다는 정보 전달 성격이 강하다. 구체적인 현실을 진단하고 사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옅어 뵌다. 각종 전시에 대한 소개글은 재미있지만


지금 한국에서 예술은 정치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 다섯 편의 테마기사는 이 물음을 충분히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벨트를 질끈 동여맬 따름이다. 비평에는 불필요한 태도다. 운전을 할 때라면 몰라도.


그래도 문예비평가 출신 1호 국회의원인 강유정과의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작금의 문예/비평이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상황에서, 현실정치에 뛰어든 강의원의 목소리는 확실히 눈길을 끌었다. “문화예술은 삶의 보충재 혹은 사치재가 아니라 필연적 산물이자 요구이고 매개라는 선언에는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다.


올 초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정부가 취약 계층에 무료 OTT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기사였는데 부정적인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닥 놀랍지 않게도, 논쟁은 대부분먹고사니즘수준에 그쳤다. 많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가난뱅이에게 문화는 사치라는 생각이 박혀 있다.


챌린지 문화를 소개하기 전에 여기 먼저 개입해야 하지 않나. 2024년 한국의 문화지라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해리스 지지 선언을 보고 든 생각인데, 연예인의 정치 참여 문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



아래는 다섯 편의 테마기사에 관한 단평이다.


최선희의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을까?」는 뱅크시에서 아이웨이웨이를 거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는 글이다. 요지에는 동의하지만, 딜레마를 좀더 깊이 제기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뱅크시만 하더라도 훨씬 흥미로운 모순을 품고 있지 않나. “뱅크시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바로 그것, 백만장자의 집을 꾸미는 트로피가 되었다.”(『뱅크시 벽 뒤의 남자』 中)


강성률의 「역사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 영화계」는 〈건국전쟁〉과 〈파묘〉로 표상되는 요사이 한국 영화계의 담론 투쟁을 기술하다가영화판이 정치판이 되고 말았다는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의 한탄은 명백히 한쪽을 겨냥하고 있음이대통령 지지율과 뉴라이트 옹호 수치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지지하진 않지만, 이럴 거라면 짐짓 중립적인 체하기보다는 〈건국전쟁〉에 대놓고 싸움을 거는 편이 나을 것이다.


허희의 「국가의 법과 사랑의 주체」는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를 다룬 두 편의 희곡을 통해법에 우선하는 개인의 윤리라는 안티고네적 테마를 다루는 글이다. 동시대 이슈를 다루진 않지만 본질적인 주제를 한국적 텍스트와 접합시켜 역사적으로 독해한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최연정의 「예술에 있어 ‘PC’함」은 가장 짜증 나는 글이었다. PC주의에 호의적임이 뻔한데도 안 그런 척하는 건 둘째치고, 하이데거를 길게 인용하면서 예술과 정치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대목도 지겹다. 굳이 하이데거씩 끌어올 필요가 없는 나이브한 얘기다. 이 글은 차라리 PC주의적 예술 실천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이 됐어야 한다. 나야 PC주의 자체를 싫어하지만, 그 편이 읽기엔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김세은의 「지금 무슨 노래 듣고 계세요?」는취향정체성을 동일시하지 말자는, 가볍게 읽을 만한 에세이인데, 동의하고 싶진 않다. “취향은 취향일 뿐 인생을 걸지 말자는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는 슬로건을 부제로 내걸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현대의 문제는 취향에의 지나친 진지함이 아니라 지나친 가벼움이다. 유운성의 말마따나, ‘취향 존중이란 네가 뭘 좋아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냉소주의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그것보단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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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역사 -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 필로버스 총서 2
김민호 지음 / 에디스코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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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데리다의 언명이 어떻게 오해되어 왔는지, 데리다를 따라 다니는 ‘상대주의자‘, ‘회의주의자‘라는 딱지가 어째서 얼토당토않은 오독인지 해명해 줍니다. 게다가 꽤 친절하기까지~ 관련된 논의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습니다. (3부는 좀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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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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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서평단 #알려지지않은밤과하루 #배수아

https://www.youtube.com/watch?v=07WXXtF1tyw


어쩌면 추리소설인지도 모른다. 대강 이렇게 전개되는.


흰 무명 천 너머 흔들거리는 실루엣의 희미한 흔적을 눈으로 쫓는다. 흔적은 “실체가 아닌 형체들”이며, 질량이나 부피를 갖지도 않고, 그나마 윤곽조차 흐릿하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임의로 정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금도 침범하지 못”한다(이건 제발트의 문장인데, 배수아가 번역한 것이다).


그때 창문 너머에서는 “예리하게 날 선 보랏빛이 늙은 부모인 회색빛 흐릿한 어둠을 살해”하는 중이다. 그 장면은 눈먼 부엉이의 시신경에 전달되는 신호 같은 것이다. 해는 뜨겠지만 그들은 눈을 뜰 수 없다. 막연하게 흔적을 좇을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러니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들의 밤과 하루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다. 알려지지 않은 채로. 이 도시의 숨겨진 이름은 ‘비밀’이다.




어둠은 어둠인 이상 방 안 좁은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다(이건 이상의 문장인데, 내가 적당히 번역한 것이다). 존속을 살해하려 한 보랏빛이 창문의 프레임에까지 넘실거린다. 그림자의 군사들이 붉게 피를 흘린다. 흰 무명 천으로 만든 옷이 피에 젖는다. 아니 물인가?


그 순간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헤더야트는 이란의 작가로 『눈먼 부엉이』는 그의 대표작이죠.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입니다. 특히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신비한 반복 진술이 환상과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느끼게 합니다. (…) 그의 생애에는 알려진 자살 기도가 한 번 있었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해 그는 파리에서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그는 센 강변 으슥한 곳의 한 낡은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리 아래의 보트에서 한 쌍의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즉시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익사 직전의 헤더야트를 구했습니다. (…)”


그는 물속에 있다. 오래전부터 물속에 있었던 것 같았고, 물속에서 빠져 나가는 법도 알지 못한다. 검은 강물과 새벽 공기의 모호한 경계에서 어푸어푸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누군가 생각한다. “거기에는 물결이 만드는 작은 떨림 같은 것도 있고 낯선 외로움 같은 것도 있다. 결국 물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이장욱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배수아는 이렇게 쓰지 못한다.


사데크 헤더야트는 물속에서 빠져나왔거나 끌려나온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다시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계선을 지우는 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을 수 있다. 넘나들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그저 지우기 위해서거나.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선 우선 경계를 전제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 작가들은 선을 흐리게 뭉갤지언정 아예 지워 버리진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선명하게 긋기도 한다.


배수아나 제발트 같은 작가들은 아무래도 넘나들지 못하는 쪽이다. 그들은 쪼그려 앉아서 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벅벅 지운다. 다시 일어나서 걸어 보지만, “순간적으로 갑자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좌표의 혼란을 겪는다. 이들에게 혼란은 비일상적인 사건이라기보단 늘상 겪는 일이다. 원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현기증을 극복하는 법을 모른다. 글을 쓰는 것밖에는.


정지돈은 사데크 헤더야트의 소설에서 이름을 빌려 소설을 썼다.「눈먼 부엉이」에서 그는 눈을 감거나 반쯤 뜬 채로 말한다.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글을 쓰라고.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고.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배수아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두 권 번역했다.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아구아 비바Agua viva』라는 소설인데, ‘아구아 비바’는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이고, 보통은 해파리를 말한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낯선 포르투갈어를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국역본의 제목으로 옮겼다는 점이 눈에 띈다. 편집자 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살아 있는 물'은 뼈대 즉 특정한 형태를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 살아 있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해파리는 그 세계와 가장 닮은 개체다. (…)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것, 심지어 세계인 동시에 개체인 것을 그리기. 즉 모든 구조와 경계를 넘어선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


배수아는 이 소설을 번역하거나 편집하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2uyHtg56yTY


갑자기 어디선가 라디오가 켜졌고, 오디오북이거나 예전에 들어본 노래가 나왔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는. 상처가. 있다."


아무래도 이 소설을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사건의 실체가 있어야 하지만, 말했다시피 여기에는 “실체가 아닌 형체들”만 있다. 형체들의 희미한 윤곽이 소설의 세계를 온통 잠식해 온다. 이 세계에는 뚜렷함이나 질량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안팎이라는 구분도 전연 무의미하다.


그걸 환영이라고 부르든 그림자라고 부르든, 좋다. 저절로 켜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출처 불명의 낯선 음성처럼, 배수아의 언어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간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품은 꿈과 어둠, 그러니까 비밀의 도시로.


거기서 우리는 물속에서 꿈꾸는 것 같거나, 무더위에서 신기루를 보는 것 같다. 아야미, 여니, 마리아, 얼굴이 얽은, 힘줄이 불거진 앙상한 다리, 시인이거나 은퇴한 무명 배우인, 극장장이거나 부하인,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면서 여자인… 정체성의 증폭과 중첩은 소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게 만든다.


단지 다음의 두 대목을 나란히 포개어 놓고 여러 번 읽어볼 따름이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고립되어버리지 않을까요? 단 한 사람도 설득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우리의 무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혼자서 고개를 돌리고 아주 멀리 가버려야 한다는 의미잖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말이죠. 우리는 평생 동안 황야에서 양들과 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별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양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면 당신은 세상은 변함이 없노라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75p)


"당신이 편지에서 쓴 것처럼..." 극장장이 말했다. "이제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아야미는 극장장의 머리를 껴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가만히 놓았다. 그리고 그가 구토를 다 마칠 때까지 대못의 뭉툭한 대가리가 만져지는 피투성이 정수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마치 그것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두 인간이 동시에 한 장소에 있기 위한 유일한 주술의 몸짓이라고 믿는 것처럼. (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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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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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정물화 #예술책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 협찬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아직도, 삶이 가능하다면(Still-Life)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2006)는 사라져 가는 풍경을 쓸쓸한 정물처럼 담아내는 슬로우시네마다. 해당 장면은 이 느릿느릿한 영화가 느릿느릿하게 선사하는 가장 놀라운 광경이다.


죽지 않은 자연 Natura NON morte
그것은 과일 한 그릇이었다.
찰스 올슨, 「모닝 뉴스」


〈인트로덕션〉(2021)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홍상수가 수상소감으로 보여준 달팽이.


가만히 멈춰 있는 것, 또는 아주 느리게 약동하는 것들에 좀처럼 집중하기 힘든 정신없는 세상이다. 아스팔트를 기어 건너는 달팽이의 끈적함에 발이 묶여 한참을 들여다보던 시절은 이미 빛바랜 기억이 되었고, 한곳에 오래도록 주저앉아 있기에 지구의 자전 속도는 너무 빠르기만 한데, 시간당 1,670km의 속도, 그러니까 매 초 460m씩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잡기에 나는 너무 더디고, 가끔은 그런 의지조차 비웃으면서(어차피 한 바퀴 돌아봤자 다음 바퀴가, 또 다음 바퀴가 지루하게 이어질 텐데 그리 열심히 뛰어서 무엇하나, 하는 메스꺼운 냉소), 다시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사라진 달팽이의 흔적을 찾다가, 땅바닥에 처박고 있던 고개가 뻐근해지면 목덜미를 지그시 주무르고,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똑바로 앞을 쳐다보고 싶진 않은 반항심에, 차라리 고개를 거꾸로 쳐든 채로, 낮에도 밤에도 별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대기를 올려다보며 내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닐까 곰곰이 의심하다가, 별안간 별이 뜨지 않는 나의 시대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지구와 반대방향으로, 말하자면 마이너스 243일의 속도로 하루를 나는 금성에서의 여유로움을 떠올리면서 달콤한 낮잠에 잠시 빠졌다가,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이어지는 한낮의 그 끔찍한 지루함, 느림,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쨍쨍함에 완전히 질려버릴 다른 행성에서의 권태를 상상하게 되면, 급히 고개를 젓고 도로 길을 나서는.


국도변에는 코스모스가 있다. 추석을 맞아 시골에 다녀오던 길. 도로의 가장자리를 나른하게 감싸는 그즈음의 코스모스는 한가했고, 추억은 여태 그곳에 머물러 있다.


요즘엔 명절에도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아직 거기 있을까.






느린 것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우리 시대는 영화를 스킵하거나 배속으로 보고, 간간히 찾아가는 전시회에서조차 멈춰 있는 그림들 사이를 스쳐가듯 급하게 지나친다. 노래는 길어도 4분을 넘지 않는다. 더이상 아무도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지 않고, 긴 호흡의 장편소설을 읽지 않는다.


모든 예술이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두려는 부질없는 시도라면, 그러니까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시간을 거부하려는 인간 삶의 눈물나는 분투라면, 우리는 예술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예술을 향유할 수 없는 삶은, 그건 이미 삶이 아닌 것 아닐까.


돌아갈 길은 있을까?


대븐포트의 대답: "예술은 주기적으로 그 상징적 의미가 고갈되며 가치 절하의 시기를 겪는다. 그런 시기가 오면 예술은 스스로 재생이 필요하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71p)


『스틸라이프』는 부서진 파편들 사이를 차분히 헤집고 되짚어 가며, 지금까지의 예술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돌아보는 책이다. “부서진 파편은 바로 과거라는 조건 자체다.”(67p) (그리고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구는 둥글어서, 길을 충분히 오래 걷고 나면 처음 출발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지구는 둥그니까. 그걸 도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째서? 매번의 여정이 모두 같지는 않고, 반복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게 인간의 역사이니까. 『피네간의 경야』에서 조이스는 “같은 것이 새롭게 반복된다”고 썼다.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는 정물화의 역사, 라기보단 차라리 인류의 역사에서 정물이 의미하는 바를 멀고도 크게 에둘러 오는, 그리하여 처음의 지점—그러나 처음과 같지는 않은—으로 우리를 되돌려놓는, 짧지만 짧지 않은, 시간을 품은 책이다.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1596)


풍요로운 여름 과일 광주리는 “하나님의 자애로움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상징하게 되었다."(32p)고 대븐포트는 아모스서를 빌려 말한다. 그는 풍성한 바구니에서 빈 바구니를 보고, 빈 바구니에서 가득 찬 풍요로움을 읽어낸다. 이 모든 모티프는 “음식의 그림이 어떤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완전히 원시적이고 태곳적인 생각”(30p)에서 비롯하는데, 독자는 책을 덮을 즈음이 되어서야 이 말이 시사하는 바를 좀더 분명히 깨닫게 된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우리는 정물화에서 어디서 물질이 끝나고 정신이 시작되는지에 관한, 그리고 그들의 상호 의존성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명상을 발견한다.”(199p)


한마디로 정물—불어로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고 읽는—은 죽어 있는 게 아니라고, 대븐포트는 역설한다. 물질은, 설령 그게 멎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격렬하게 살아 있다. “예술은 인공적이고, 무기적이고, 돌로 만들어지고, 물감으로 그려지고, 종이 위에 잉크 또는 흑연의 흔적으로, 표백한 나무 펄프에 젖은 탄소를 찍는 타자기의 금속 키로 만들어지지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의미는 살아 있는 것이다.”(198p)

말하자면 예술은, 멈춰 있는 시간에 서사를 되돌려주는 것. 또는 박제되어 버린 좌표에 움직임을 돌려주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삶을 삶답게 하는 거라고.




구조를 상정하지 않고 쓰인 듯한, (도무지 맥을 잡을 수 없는 목차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모를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는 이 ‘에니그마’(수수께끼)적인 에세이는, 슈펭글러의 순환적 시간으로 이제까지의 서구문명사를 읽어낸다. 정물은 이 여정에서 읽기의 도구를 담당한다.(“정물화는 (…) 문명과 공생하는 예술이다.”(37p))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닮은 것 같은) 그의 콜라주적 글쓰기는 구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배치 그 자체가 구조를 생성하는 글쓰기라고 볼 수 있다. 대븐포트는 미리 정해진 틀에 맞춰 정돈된 앎을 제공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떠오르는 복수의 정물들 가운데서, 또는 가장자리에서, 독자들이 구조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행성의 공전과 같은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까? 빠르지 않게 느린 걸음으로 자전하는,


우리의 공전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가 인용하는 목록은 너무 방대하고, 때때로 지엽적이거나 우리의 여정을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서, 독자는 당황하고 길을 헤맬 수도 있지만, 그는 기어코 우리를 같지만 다른 곳으로 되돌려놓는다. 우리가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곰브리치가 『예술과 환영』에서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와 얽힌 일화를 평하듯이, 대븐포트의 이 책이 "닮지 않은 것에서 유사점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141p)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건 슈티뭉stimmung, 즉 ‘갑자기 주변의 사물들에 부여되었던 기존의 의미가 사라지고 낯설어 보이는 듯한 어떤 무드나 분위기’를 수반하는데, 정물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는 거기서 아폴리네르가 보고 <초현실주의>라는 말로 일컬었던 새로운 예술,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자각이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계시처럼 느껴지는 종류의 리얼리즘”(168p)의 가능성을,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미래를 본다.




현대의 예술은 비교적 느린 속도로 서서히 영락했던 선배들과 달리, 전례 없는 속도로 시들어 가고 있다. 이것은 <서구의 몰락>인가? 책의 막바지에 짤막하게 언급된 저자의 우려는, 우리가 지금 도정의 어느 즈음에 와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다소간의 우울하고 염려스러운 색채를 띠고.


“시대를 거듭하며 정물화의 운명은 혁신에서 진부함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낯익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필연적으로 정물화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선구자로 또는 스타일의 전형으로 스스로를 재생해 왔는데 말이다.”(208p)


결국 대븐포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통찰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 하는 것이다. 그건 또한 “시대에 따라 자연이라는 기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211p)이기도 하다.


미래는 우리 손에 놓여 있다.

어쩌면 과거에?


대븐포트의 이러한 결론을 사이먼 레이놀즈가 지시한 대로 레트로마니아적인 퇴행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진 않다. 우리는 과거를 다르게 볼 것이다. 과거는 다른 미래가 될 수 있다.


정말로?






트레드밀의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고 잠깐 쉬어 가는 텀이 너무 길어질 때면 이러다 영영 뒤쳐지는 게 아닌가 가끔 겁을 내게 된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레일 위에 다시 올라타려고, 어쩌다 떨어진 나의 세기가 멱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렇게나 놓쳐버릴 때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발을 굴려야 한다.


미래는 움직임 속에 있다. 과거는 정지 속에 있다. 현재는 정중동. 조용한 가운데 격렬한.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삶의 양식은 그렇게 올 것이다. Still-Life. 그 정적 속에서 영원히 움직이듯.”(T. S. 엘리엇. 이 책의 마지막 구절.)


가이 대븐포트, 『스틸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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