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코이 온천의 숙소에서 남자(나)가 잠든 사이 여자(나미)는 슬며시 들어와(손님이 없을 때 자신이 사용하던 방) 자신의 물건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리고 남자가 잠들기 전에 적어 놓은 하이쿠를 보고는 그 밑에 자신도 하이쿠를 남겨 놓습니다.
“해당화에 맺힌 이슬을 떨어뜨리네, 미치광이”
“해당화에 맺힌 이슬을 떨어뜨리네, 아침 까마귀”
“꽃 그림자, 몽롱한 여자 그림자인가”
“꽃 그림자, 겹쳐진 여자 그림자인가”
“정일품, 여자로 변신했나 으스름달”
“도련님, 여자로 변신했나 으스름달”
사실 이 장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습니다. 그저 남자는 잠이 들고, 잠결에 여자가 방에 들어왔다 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오매(寤寐)의 경계를 소요하고 있을 때 입구의 장지문이 쓰윽 열렸다. 문이 열린 곳에 환영처럼 홀연히 여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놀라지도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다. 바라본다고 말하면 말이 너무 강하다. 감고 있는 내 눈꺼풀 안에 환영의 여자가 양해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온 것이다. 환영은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온다. 선녀가 파도 위를 건너는 것처럼 다다미 위에는 사람의 발소리 같은 것도 나지 않는다. 감은 눈 안에서 보는 세상이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살갗은 하얗고 머리는 짙으며 목덜미가 긴 여자다. 요즘 유행하는 바림 사진을 등불에 비쳐 보는 것 같다.
환영은 벽장 앞에서 멈춘다. 벽장이 열린다. 소매를 미끄러지는 하얀 팔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벽장이 다시 닫힌다. 다다미의 파도가 저절로 환영을 돌려보낸다. 입구의 장지문이 저절로 닫힌다. 나의 잠은 차츰 깊어진다. 사람이 죽어 소나 말로 환생하기 전의 상태가 이럴 것이다. (p.52)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방에 돌아와 보니 자신이 적은 하이쿠 밑에 누군가가 하이쿠를 적어 놓았다는 묘사만 있을 뿐이죠.
아무 생각 없이 방석 위에 앉아 보니, 당목으로 만든 책상 위에 내 사생첩이 연필이 끼워진 채로 마치 소중한 부분인 듯 펼쳐져 있다. 꿈속에서 붓 가는 대로 써내려간 하이쿠를 아침에 보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 손에 든다.
“해당화에 맺힌 이슬을 떨어뜨리네, 미치광이”라는 하이쿠 밑에 누군가 “해당화에 맺힌 이슬을 떨어뜨리네, 아침 까마귀”라고 적어놓았다. 연필이라 서체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여자치고는 너무 딱딱하고 남자치고는 너무 부드럽다. 이런, 하고 다시 놀란다. 다음을 보니 “꽃 그림자, 몽롱한 여자 그림자인가”라는 하이쿠 밑에 “꽃 그림자, 겹쳐진 여자 그림자인가”라고 적혀 있다. “정일품, 여자로 변신했나 으스름달”이라는 하이쿠 밑에는 “도련님, 여자로 변신했나 으스름달”이라고 되어 있다. 흉내를 낼 생각이었을까, 첨삭을 할 생각이었을까, 풍류를 나눈 건가, 바보인가, 바보 취급을 한 건가, 나는 무심코 고개를 갸웃했다. (p.57)
『풀베개』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 ‘목욕탕에 들어온 나체의 나미, 그 묘사는 압권이자 안쓰러움이다.’ 라고 적힌 것처럼 많은(?) 분들이 목욕탕의 장면에 대한 묘사를 이야기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보다는 앞에 적은 것처럼 ‘나’의 하이쿠 밑에 ‘나미’가 하이쿠를 적어 놓은 장면이 더 좋았습니다. 작가의 직접적인 묘사가 없으니 상상하게 되고, 상상하다 보니 오히려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이 말고는 가가미가 연못에서 동백꽃을 묘사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보고 있으니 빨간 것이 물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요한 봄에 움직인 것은 그저 이 한 송이뿐이다. 잠시 후 다시 뚝 떨어졌다. 저 꽃은 결코 지지 않는다. 무너진다기보다는 단단히 뭉친 채 가지를 떠난다. 가지를 떠날 때는 한 번에 떠나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도 뭉쳐 있는 것은 어쩐지 독살스럽다. 또 뚝 떨어진다. 저렇게 떨어지는 동안 연못의 물이 붉어지리라 생각했다. 꽃이 조용히 떠 있는 근처는 지금도 약간 붉은 듯하다. 또 떨어졌다. 땅 윙에 떨어진 건지, 물 위에 떨어진 건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뜬다. 또 떨어진다. 저것이 가라앉는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p.137)
어쨌든. 사실 위의 하이쿠를 주고받는(?) 장면은 어찌 보면 하나도 특별한 것도 없어 보입니다. ‘나’는 그저 평소에 하던 습관대로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 놓은 것일 뿐이고, ‘나미’는 그것을 읽고는 그 밑에 ‘그저 가볍게’ 또 적어 놓은 것뿐이죠. 그리고 하이쿠가 특별히 좋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좋을까요? 잘 생각해보니 저의 ‘산만하고, 어리석고, 가볍고, 깨끗한’ 뇌 때문인 것 같더군요.
우리 뇌 속의 신경은 언제든지 서로 연결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죠. 그래서 만약, A라는 신경과 B라는 신경이 동시에 자극을 받으면 신경 간의 연결이 강화되어, 나중에는 A신경에만 자극을 주어도 B신경도 같이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신이 ‘아주 싫어하던’ 사람이 캔커피나 자판기 커피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면, 나중에 다른 사람이 캔커피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것을 보더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전에 있었던 무엇 때문에 저 장면이 좋다고 생각했을까, 하니 영화 한 편이 떠오르더군요. 어렸을 적에 본 왕조현, 장국영 주연의 ‘천녀유혼’. 하하하. 어렸을 적에 <천녀유혼>을 보고 슬프면서도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풀베개』에서 하이쿠를 주고받는(?) 장면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천녀유혼>의 한 장면을 떠오른 게 아닐까 합니다. 영채신(장국영)과 소천(왕조현)이 헤어지면서 그림에 시를 나누어 쓰는 장면이요. 물론,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튼,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쳔녀유혼>에 대한 좋은 감정까지 떠오른 것 같습니다. 아닐까요?
<천녀유혼(1987) 中>
아아. 왕조현….
아아. 장국영….
물론 헛소리 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그 장면이 좋았을 뿐일 수도 있지요.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말도 안 듣고, 생긴 것도 모르는 제 뇌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냥 잡생각과 헛소리가 고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왕조현.
* 그러고 보니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차분 세트도 나왔더군요. 2차분 세트를 구매하면 [1] ‘노트’를 준답니다. 1차분 사은품도 노트였고…. 요즘엔 사은품으로 노트를 주는 경우가 정말 많군요. 반면에 펜 같은 필기도구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요(노트보다 비싼가?). 그리고 [2] SNS로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세트(…길다…) 출간 소식을 주위에 전하면, 댓글 남긴 사람 중 2명을 추첨해서 ‘암체어’를 준답니다(저처럼 SNS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벤트 참여의 기회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알라딘 블로그도 되려나? 받으면 잘 앉을 자신 있는데. 킁.). SNS 하시는 분들은 가볍게 응모해보시길.
이벤트 주소: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40923_hyun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