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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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는 제가 무척 좋아하지만, 좋아한다 말하기가 어려운 작가입니다. 이번에 읽게 된 <이별의 왈츠>를 포함해 기껏해야 세 작품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총 열다섯 권으로 예정된 밀란 쿤데라 전집에서 세권이면 20%이니까요. 물론, 한 작품만으로도 얼마든지 좋아한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엔 쿤데라의 작품을 하나라도 온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며, 많은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좋아한다 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그의 통찰력 때문입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우리네 인생을 참 절묘하게 표현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읽는 내내 감탄을 연발하게 합니다. 이는 아마 많은 분이 동감하실 것 같습니다. 책에 줄을 그으며 읽으시는 분들은 책에 밑줄이 한 가득할 테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도 꽤 손목이 아프실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읽은 <이별의 왈츠> 역시 그랬습니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트럼펫 주자 클리마는 한적한 시골의 온천마을을 방문하고, 이 온천마을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루제나를 만나게 됩니다. 클리마는 아내가 있었고, 아내를 사랑하기에 루제나와의 관계는 그저 하룻밤의 만남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루제나가 임신을 한 것 같다며 클리마에게 연락을 해옵니다. 이것이 시작이죠. 이 소설은 이후 5일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작은 클리마와 루제나의 관계였지만, 결코 이 둘의 이야기만이 이 소설의 중심이 아니란 것이죠.

 

 먼저, 클리마는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내가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죠. 그 이유는 오히려 다른 여자를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마다 아내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이해 못해요. 그 누구보다 제 아내는 더욱 이해 못 하죠. 그녀는 위대한 사랑이 우리가 바람피우는 걸 포기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매순간 뭔가가 저를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나 그 여자를 소유하는 순간, 마치 다시 아내 카밀라 곁으로 저를 되던져 버리는 어떤 강력한 반동에 실린 것처럼 그 여자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되죠. 그래서 제가 다른 여자들을 찾는다면, 그건 단지 매번 새로 부정을 저지를 때마다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제 아내에게로 저를 이끌어 주는 이 반동과 약동, 그리고 (다정함과 욕망, 겸손에 가득 찬) 이 찬란한 비상 때문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아요.” (p.50)

 

 또 한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루제나는 작은 온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오길, 즉 한편의 영화 같은 삶이 펼쳐지길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이 자신에게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점차 포기해가던 도중, 클리마를 만나고 그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 자신이 인생이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죠.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스의 폰(Pawn: 졸)이 마침내 체스 판의 끝에 다다라 여왕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제나는 임신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고 생각하고요. (실제로 체스에서는 폰이 체스 판의 끝에 도착하면 자신이 원하는 말로 바꿀 수 있죠.)

 

 이 외에도 과거에는 가수였고 현재는 클리마의 아내이자 남편의 부정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투하는 카밀라, 미국 출신의 사업가이자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는 부호 베르틀레프, 몽상가적 기질이 있는 의사 슈크레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인간을 혐오하고 자신의 조국을 떠나려는 야쿠프, 그리고 올가, 프란티셰크 같은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작지 않고요.

 

 저에게는 이 많은 인물들의 관계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묘미였습니다. 클리마와 아내 카밀라는 서로를 무척 사랑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신뢰하진 않죠. 상대를 위해 연기를 하고, 또 그것이 연기인 것을 알면서도 연기로 답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클리마는 그녀의 어조로, 자신이 방금 말한 강연에 대해 그녀가 한마디도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카밀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걸 감히 드러내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신이 그를 화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리마는 오래전부터 아내가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진실을 말하든 거짓말을 하든 그녀는 언제나 자기를 의심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p.37)

 

 루제나의 경우에는 양쪽에 클리마와 프란티셰크가 있습니다. 클리마는 루제나가 그동안 원했던 삶을 가져다 줄 사람이었으며, 반면 프란티셰크는 현재의 삶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클리마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이며 프란티셰크는 자신이 멀리하고 싶어하는 상대입니다. 이런 관계에 야쿠프가 들어오면 좀 더 복잡해지는데요, 야쿠프에게 있어서 루제나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상대입니다. 루제나가 자신에게서 개를 빼앗으려는 모습을 보고 과거에 처형장에서 구경하고 때에 따라 집행을 돕기도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죠. 그리고 이 모습은 자신이 혐오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떠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야쿠프에게 카밀라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자, 자신이 떠나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의 정반대를 상징합니다. 자신이 카밀라의 아름다움을 일찍 알았다면, 자신이 삶이 이렇게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하죠.

 

 많은 인물이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똑같습니다. 똑같이 저마다의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그렇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표적을 향해 시위를 당깁니다. 하지만 아주 작고 우연한(어쩌면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계기로 저마다의 화살은 조금씩 어긋나게 됩니다. 야쿠프가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하기 위해 갖고 있던 조그만 알약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면서 말이에요. 이로 인해 처음에는 아주 조금씩 어긋났던 화살들이 점점 날아가면서 더 크게 어긋나게 되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게 되죠.

 

 

<이별의 왈츠>는 비교적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것 같더군요. <농담>이 1967년이고 이 작품이 1972년이니까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 자신이 토마시를 어떻게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언급하는 것처럼)작가의 직접적인 개입도 거의 없고,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농담>과 <이별의 왈츠>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정말 많은 분들이 극찬하는 쿤데라의 매력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불멸>에서 더욱 흠뻑 느낄 수 있겠지만요.

 

※ 개인적으로 <이별의 왈츠> 표지의 마그리트 그림(9월 16일.1957)이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 전집 시리즈의 표지들 중 가장 좋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조심히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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