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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정의로운가 - 서울대 이정전 교수의 경제 정의론 강의
이정전 지음 / 김영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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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경제학 교재나 입문서는 대체로 수요와 공급으로 시작합니다. 경제학의 정의로 시작하더라도 곧바로 수요와 공급, 그리고 시장의 탄력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아마도 경제학의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수요와 공급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도덕, 사회와 같은 과목들을 배우기 전에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과 같은 과목들을 먼저 배웠습니다. 그처럼 경제학을 배울 때도 기본 개념을 배우기 전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부에서 시행하는 정책이나 언론에서 쏟아지는 기사를 보아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을까요?

 

 이 책 <시장은 정의로운가>는 ‘인문학’(특히 철학)을 바탕으로 경제학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해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저술된 책이 경제학 입문서(入門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책표지에 써있는 ‘한국의 경제학자가 이런 책을 써주길 기다렸다!’라는 문구가 과장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다고 2010년에 가장 화재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정의에 관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정의의 관점에서 조망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이 공정하다고 주장하는 기존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던지며 논리적인 반박을 통해 독자의 생각을 이끌어 내자는 것이지요.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내용에 따라 크게 2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부(1장부터 4장까지)는 ‘기존 시장 경제체제에 대한 의문’을, 그리고 2부(5장부터 9장까지)는 ‘과거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시장 경제체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회의 균등’을 통해서 ‘공정한 경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로 ‘기회의 균등’에 초점을 맞추죠. 그런데 초점을 ‘공정한 경쟁’으로 맞춰 보면 어떨까요?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책의 저자 이정전 교수는 <정의론>으로 널리 알려진 롤스의 말을 빌려 불가능하다고 답합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일의 기쁨과 슬픔>의 저자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알랭 드 보통 역시 한 강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요.

 

<알랭 드 보통의 강연 中 >

 

 즉, 알랭 드 보통은 우리 삶에는 가정환경, 사회적 지위처럼 우연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공정한 경쟁이란 불가능하며, 이를 통해 능력에 따라 사람을 구분 짓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롤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능과 탁월한 능력, 그리고 노력까지도 우연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우연적인 것은 결코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요즈음 유명 야구 선수들이 돈을 많이 버는 이유는 야구가 인기 있기 때문이다. 이기가 없다면 아무리 야구 천재라도 돈을 벌 수 없다. 그러나 야구가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다분히 우연적인 것이다. 요즈음의 유명 야구 선수들이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그렇게 큰 인기와 함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야구 천재들이 큰돈을 버는 이유는 그들이 우연히 그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재능이 우연히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연이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사람에게 그 재능만을 이유로 남보다 더 많은 소득과 재산을 허용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는 것이 롤스의 기본입장이다. (p.37-38)

 

 롤스는 노력하는 성향 역시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결과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노력하는 성격은 상당한 정도로 좋은 가정이나 사회적 여건 덕분에 얻게 되는 성격이다. 가난에 찌든 집안의 아이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내고 이것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할 정신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p.39)

 

 특히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분야가 부동산과 자본시장입니다. 불확실성이 넘치는 시장에서 과연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정확한 처벌과 보상시스템이 공정하다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임을 주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계생산이론을 들고 있습니다. 한계생산이론이란 ‘부의 창출(생산)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각자의 정당한 몫을 가늠하고 분배한다는 이론인데, 이 이론의 핵심 주장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완전한 자유경쟁시장(완전경쟁시장)에서 각 개인은 ‘생산에 기여한 정도’만큼을 보수로 받게 된다. 노동자는 생산에 기여한 만큼만 임금을 받으며, 호미를 가진 사람은 호미가 생산에 기여한 만큼만 보수를 받게 되고, 토지를 가진 사람은 토지가 생산에 기여한 만큼만 보수를 받게 된다.

 둘째, 이렇게 생산에 기여한 정도만큼을 보수로 주고 나면 기업별로 총수입과 총지출이 꼭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남는 것(잉여)이 없다. 달리 말하면 정상이윤보다 더 큰 이윤(초과이윤)은 없으며 따라서 불로소득도 없다는 것이다. (p.112)

 

 그런데 한계생산이론에 입각한 소득 정당화 논리는 앞의 내용처럼 완전경쟁시장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경쟁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굉장히 많은 독과점이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큰데, 이는 완전경쟁시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또한 한계생산이론은 한계생산이 측정 가능함을 전제로 하는데 이것이 과연 정말로 측정이 가능하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가령 집을 지을 때를 생각해보자. 목수는 도구 없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목수와 도구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한계생산이론에 의하면 목수의 한계생산은 오직 목수 한 사람만 늘어났을 때 추가 생산량인데, 도구 없는 목수의 생산성이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도구의 한계생산은 오직 도구만 한 단위 증가시켰을 때의 추가 생산량인데 목수 없는 도구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p.126)

 

 결국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 경제체제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는 최근 통계자료에서 나타나듯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등 수많은 문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오른쪽부터 벤담, 밀, 칸트, 롤스, 마르크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벤담과 밀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곧 쾌락을 의미했고요. 때문에 공리주의에서는 이로운 것이 옳은 것이요, 옳은 것이 이로운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반면, 칸트와 롤스는 이러한 논리를 분명하게 비판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서구 사회는 매우 오랫동안 인간의 욕망이 이성에 의해서 적절히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성이 주인의 위치에 있었고 욕망은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성과 욕망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성은 욕망을 가장 잘 달성하는 수단을 찾는 역할을 맡는다. 즉 욕망이 주인의 위치로 올라갔고 이성은 그 욕망에 봉사하는 일꾼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p.196)

 

 위의 글처럼 욕망이 목적이 되고 이성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곳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임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은 쉽게 조작되고 바뀌는데,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욕망이 과연 기준이 되고 정의가 될 수 있냐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또한, 이로운 것과 옳은 것은 철저히 구분되어야 하며 의(義)가 이(利)보다 우선시 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공리주의에서도 소득 재분배는 매우 정당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시장이 자발적 합의에 의한 것인지, 정의로운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이며 ‘정의’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인지 등의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정의란 것은

 

 경제 영역에서는 성과주의에 입각해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생산을 많이 하도록 하며, 정치 영역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서 분배를 고르게 하고, 사회화 영역에서는 필요의 원칙에 따라 알맞게 나누어 쓴다면 우리 사회는 잘 조화된 사회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요, 일찍이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적 사회다. (p.279)

 

 라고 밝힌 바와 같이 삶의 영역별로 각기 다른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한쪽 바퀴가 비대해져 제자리를 맴도는 수레처럼,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 복지에 대한 논쟁이 화두입니다. 한쪽에서는 복지의 필요성을 말하고, 한쪽에서는 포퓰리즘을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담-1> 철학적, 경제학적으로 부족한 저의 식견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에 대해 반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여담-2> 최근 유가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화두였습니다. 지난 20일 정부는 S사를 다섯 번째 휘발유 공급사로 선정했습니다. 즉, 경쟁을 택한 것이죠. 경쟁을 통해서 유가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인데, 앞으로의 변화를 지켜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단, 현재 유가가 3월 중순 이후로 점차 하락세에 있는데, 이로 인한 것을 경쟁으로 인한 하락으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경쟁으로 인한 가격하락,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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