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을 곳 없이 온전한 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이렇게 온전한 글이라니, 간직할 말을 따로 추릴 필요조차 없는 사유가 너무 좋다.


일거리가 없어도 채마밭이나 꽃밭에 퍼질러 앉아 몇 시간이고 이유 없이 보내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름모를 두메산골의 촌부가 되어 묻혀 사는 것을. 그러나 일면 스스로 여유에서 온 사치이며 현실을 도피하려는 약자의 변이 아니냐고 비웃기도 한다. 도시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확실히 피곤한 일이다. 상대방의 허식보다 나 자신의 허식을 감당하고 돌아오는 길은 자기 혐악의 고독에 가득 찬 시간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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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쉰 살이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며 전집을간행하기로 했다. 마흔 살 쉰 살 이렇게 10년씩 생애를 구분 짓는 건 일종의 편의이자 감상이며, 대체로 인간의 태만한 습성에 불과해서, 내 정신의 진실로는 내키지 않지만, 이런 관습의 파도에라도 젖지 않으면 살아생전에 전집을 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으리라.

그중에서는 <독서>라는 제목의 7.5조 6행 시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1912년 1월에 썼다. 내가 마구잡이로 책을 사는 게 사람들은 쓸데없는 사치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다 가슴속에 희망과 비애가 있기 때문이라고 어린아이처럼 항의하는 시였다.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다.

인간은 태어난 후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혹은 태어나기 전, 말하자면 유전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신에게 물든 것을 스스로 씻어 내고, 거기에서 도망쳐, 어떤 지점까지 되돌아오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에게 물든 것을 가령 오모토교에서 알기 쉽게 악령이라고 부른다면, 진혼귀신도 필요 없으리라.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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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줄어들거나 줄이고는 있지만 더이상 무엇을 하겠다고, 얼마나 나아지거나 혹은 그럴만한 사람이 되겠다고 인문학을 중간중간이라도 읽는 것에서 안정감이나 쾌를 느끼는 것이 나의 자본주의적 습인가 하는 의심이 짙었는데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을."

"나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만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만큼 완전히 시간을 낭비했다. 그 낭비는 어떤 틀 같은 것, 상 같은 것이었다. 성취였다. 문학은 당연히 낭비다. 그러나 상이란 그저 시간 그 자체였다."

더 심오한 시간 낭비, 내가 하고자 하는 것. - P30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베껴서, 내가 그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게, 저녁식사 자리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자기 작품 이야기를 떠들어대던 그 작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말이다. - P64

나는 이 이야기를 꽤 산뜻하게 해내면서도, 그 어떤 것의 반영도 아닌 그 자체로서 거의 낙서에 가까운 스타일로 존재에 접근하는 삶과 글쓰기의 경험을 전달하려 애쓰고 있다. 모든 것은 어떻게 보면 공공장소의 벽이고, 심지어 가장 사적인 표현도 이따금 가시성으로 달아오른다. 너무 추상적인가? 내 말은, 중요한 건 지나치게 긴 삶을 대비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느릿느릿 영원을 향해 다가간다는 점이다. 속절없이. - P86

나는 지금까지 쓴 모든 시를 기억한다. 
암송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파도처럼 돌아온다. 
모두 내 뇌의 일부니까. 
그것들이 내 뇌를 이룬다. 
내 뇌는 안팎이 뒤집혀 있다. 
시가 나를 증명한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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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른들이 얼마나 옛날 사람들인지, 정신적 충격과 우울함과 전쟁 같은 것에 얼마나 길들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이 세상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아니고,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잔디를 돌보고 잡초를 뽑아 댄다 한들 사실 잔디 따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들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최소한 울타리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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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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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쇄로 오늘 오후에 받았는데 아까워서 당장은 못 읽겠다. 당장 읽고 싶은 마음과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중인데, 조만간 좋은 날, 좋은 곳에서 읽어보려는 생각만으로도 좋다. 벌써 특별판 나오면 또 살 생각으로 일단 한권만 소장하기로...특별판에 특별판에 또 특별판이 계속 나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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